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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한나 아렌트)

II. 폭력과 권력 (63-91)폭력의 세기(아렌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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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폭력과 권력 (63-91)

 

2023. 5.7.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II. 폭력과 권력

 

나는 폭력을 당연한 현상으로 다루는 데 대한 일반적인 거리낌을 언급했지만, 이제 그러한 진술을 논증해야 한다.

권력 현상에 대한 논의로 주위를 돌릴 경우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폭력은 권력 가장 극악한 발현의 다름 아니다.

 

모든 정치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다. 그리고 권력의 궁극적 본성은 폭력이다.” 라는 라이트밀즈의 말은

폭력 수단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막스 베버의 국가에 관한 정의의 메아리를 들린다

 

정치 권력을 폭력의 조직화와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국가를 지배 계급의 손 안에 있는 억압 도구로 보는 막스의 판단을 따를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

베르트랑 드쥬브넬은 권력에서 시대의 흐름을 응시하는 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의 본질에 적합한 국가의 활동으로 나타난다고 적고 있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폭력의 소멸은 권력의 종말을 초래할 것인가?

 

 

권력은 지배의 도구이며 지배의 존재는 지배 본능에 의한 것이다.

쥬브넬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자신의 의지의 도구로 만들 때 자신이 보다 사람답다고 느끼

이것은 그에게 비할 수 없는 즐거움 준다.

 

볼테르는 권력이란 내가 선택한 그대로 타인이 행위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권력은 어디서든 내가 타인의 저항에 대항하여 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수 있는가능성을 가진 곳에 현존한다는 막스 베버의 말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적대자를 복종시키려는 폭력 행동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에 대한 정의를 상기시킨다

 

폭력을 스트로즈 위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권력이라고 표현했다.

쥬브넬은 명령하는 것과 복종 지키는 것. 이것이 없다면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본질은 명령이다.

 

알렉상드르 파스랭 당트레브는 우리는 권력강제력과 구별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결해야만 하고 법에 의거하여 강제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강제력 자체의 특성을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적으로 상이한 인간관계들의 형상을 가져다주는지 확인해야만한다.

 

강제력은 적법해졌다는 바로 사실에 의해서 강제력이기를 멈춘다

 

파스랭 당트레브가 이해하는 권력은 적법한또는 제도화된 강제력이다.

 

위에서 예로 든 저자들이 폭력을 권력의 가장 극악한 발현으로 규정하는 반면에,

파스랭 당트레브는 권력을 일종의 완화된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16세기 프랑스의 장보댕, 17세기 영국의 토마스홉스, 그들이 사용한 정의들은 고대 그리스 이래로 정부 형태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사용했던 개념들과 일치한다.

 

관료주의 또는 복잡한 관료 체계의 지배로서 마땅히 지배자 없는 지배라고 명명될 수 있다.

지배자 없는 지배가 분명히 가장 전제적인데, 왜냐하면, 행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도대체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는 위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최근에 세계적으로 확산된 반란을 일으키기 쉬운 가장 유력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고대 어휘는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이전의 하느님의 계명의 일반화의 결과이며, “명령과 복종의 단순한 관계만으로도 사실상 법의 본질을 밝히기에 충분했다.

최종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관여하는 보다 근대적인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확신들이 이러한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전통들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문명화의 제1과는 복종의 제1과 와 동일하며

두 가지 기질적인 성향 하나는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행사되는 권력에 대한 기피를 이야기한다. “

이를테면, 권력에의 의지와 복종에의 의지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

전제 정치에 대한 준비된 복종이 항상 극단적인 수동성에서 기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꾸로 복종에 대한 강한 기피는 종종 지배 및 명령에 대한 강한 기피를 똑같이 동반한다.

 

 

아테네 도시 국가가 자신의 정체를 이소노미[법적 평등/ 법에 의한 지배]라고 불렀을 때

아니면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정부 형태로서 시비타스[시민 국가]를 이야기했을 때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권력 및 법 개념은 그 본질이 명령-복종 관계에 의존하지도 않았으며,

권력과 지배를, 또는 법과 명령을 동일시 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러한 전례가 18세기 혁명가들이 주목했던 것으로서 정부 형태로 일종의 공화국을 구성했으며,

이 공화국에서 법에 의한 지배는, 인민의 권력에 근거하면서

노예에게 적합한 정부라고 여겨졌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종결시킬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들 역시 여전히 복종에 관하여 논의했다.

인간이 아닌 법에 대한 복종,

하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의도한 것은 일반 시민이 동의를 표하는 법에 대한 지지였다.

이런 지지는 사실상 무조건적인 복종과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이 모든 통치는 여론에 기초한다고 말했을 때 메디슨이 의미했던 것이며

이 표어는 민주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군주 정치에서도 진실이다.

쥬브넬이 지적했듯 다수결 원리가 오직 민주주의에서만 기능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공상적인 환상이다.“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단 한 사람, 전제 군주조차, 그 인원이 다소 한정될지언정, 폭력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조력자를 필요로 한다.

 

 

 

정부의 권력은 인원수에 달려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연합하는 인원에 비례하며

몽테스키외가 발견했듯, 전제 정치는 가장 폭력적이지만 가장 덜 강력한 통치 형태들 중의 하나이다.

권력과 폭력의 가장 명백한 차별성들 중의 하나는 권력이 항상 다수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반면에,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어도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동시에 폭력은 도구 없이 단연 불가능하다

다수파는 분명히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방해자들을 압도하기를 거부한다.

또한 아무도 현상태의 유지에 찬성표를 던지는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대학의 학사 과정은 망가진다

여론조사에서 머릿수를 계산하여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잠재 권력을 소수파가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저 방관하는 다수파는 사실상 이미 소수파의 보이지 않는 동행자이다.

 

* * *

 

 

우리의 전문 용어법이 권력, 강성, 강제력, 권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과 같은 핵심 단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트레브의 말대로 물리력, 권력, 권위는 그 정확한 함의들이 별다른 비중 없이 부착되어 있는 단어들이다.

의미들이 주의 깊게 평가되고 검토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의 문제이며 항상 그래왔다는 확신이다.

권력, 강성, 강제력, 권위, 폭력, 이 단어들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을 표시하는 단어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응한다.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경우에 실제적으로는 그가 일정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도록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지시한다

권력을 생성시켰던 집단이 사라지는 순간에 그의 권력도 소멸한다.

 

강성은 독자적적인, 개인적인 존재자가 갖고 있는 어떤 특성을 명료하게 가리킨다

한 사람을 향한 다수 사람들의 거의 본능적인 적의는 그것은 집단의 본성을 이루는 것으로서, 독립성, 즉 개인의 강성이 갖는 고유 특성을 싫어하는 집단의 권력이다.

 

강제력은, ‘자연의 힘또는 상황의 힘 으로, 즉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운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한될 수 있다.

 

권위는, 인격에 귀속될 수 있다.

인격적인 권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로마 원로원, 원로원의 권위,

교회의 위계적인 성직에 귀속될 수도 있다.

위를 보증하는 것은 복종하도록 요청받는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승인이다.

강제나 설득이 요구되지 않는다.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따라서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이다.

 

폭력은, 도구적 특징을 통해 구별된다.

폭력은 강성과 가까운데 폭력의 도구들은 마지막 발전 단계에서 선천적인 강성을 대체할 있을 때까지 선천적인 강성을 배가시키려는 목적으로 설계되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공동체들의 제도화된 권력은 흔히 권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그 즉시 무조건적인 승인을 요구한다.

 

폭력과 권력의 결합보다 더 평범한 일도 없고 폭력과 권력을 순수한 따라서 극단적인 형태로 발견하는 것보다 덜 빈번한 일도 없다.

 

권력을 명령과 복종으로 환산하여 사고하고 싶어지고 권력과 폭력을 동등하게 다루려는 유혹에 특히 빠지기 쉽다

 

사실상 폭력이 권력의 필요조건이고 권력은 허울의 다름 아닌 것처럼, 즉 강철 주먹을 감추고 있거나 일종의 종이 호랑이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날 솜방망이의 다름 아닌 것처럼 보여진다

 

20세기 초 이후부터 혁명이론가들은 정부만이 처분 가능한 무기의 파괴력이 증가하는 데 비례하여 혁명의 가망성이 상당히 감소했다고 주장해 왔다

반대에서 음모로 저항에서 무장 봉기로 한 걸음씩 전진을 통해서 혁명을 만드는 법을 설명하는 교과서적인 지침은 모두 혁명이 만들어진다는 잘못된 통념에 기초하고 있다.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의 경쟁에서 정부의 우월성은 항상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 우월성은 단지 정부의 권력 구조가 손상되지 않는 한에서, 다시 말해서, 명령이 준수되고 군대나 경찰력이 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에서만 지속한다.

명령이 더 이상 준수되지 않는 곳에서 폭력수단은 효용이 전혀 없다.

동시에 복종에 대한 문제 제기는 명령-복종 관계가 아니라 여론을 통해서 그리고 당연하게 여론을 공유하는 다수의 사람 사람들을 통해서 결정된다.

모든 것이 권력 이면에 있는 권력에 좌우된다.

혁명을 예고하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권력의 붕괴는 시민복종이 얼마만큼 지지와 동의의 외부로부터의 발현에 불과한 것인가를 순식간에 드러낸다

 

권력이 붕괴한 곳에서 혁명은 가능하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최근 비교적 해롭지 않고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인 프랑스 학생 반란만으로도 어떻게 정치 체계 전체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깜짝 놀란 젊은 반란자들의 눈앞에서 급격히 붕괴했는지를 목격했다

 

말하자면, 단지 경직된 대학 체계에 도전하려는 의도였지만 통치 권력 체계가 무너졌고 거대한 정당 관료주의 체계가 무너졌다

그것은 아무도 더구나 학생들까지도 권력을 장악하여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예외적인 한 사람은 당연히 드골이었다.

그가 모색했고 받아냈던 것은 지지였지 복종이 아니었으며 또한 수단도 명령이 아니라 양보였다.

명령으로 충분했다면, 그는 결코 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폭력 수단에 전적으로 기초하는 어떤 정부도 결코 존속하지 못했다.

심지어 전체주의적 지배자조차 주요 지배 도구가 고문이지만 권력 기반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전제적인 지배, 노예에 대한 주인의 지배는, 항상 노예가 수적으로 우세했지, 그와 같은 우수한 강제 수단에 근거했던 것이 아니라 우수한 권력의 조직화에 근거했다.

권력은 사실상 모든 통치의 본질이지만 폭력은 그렇지 않다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다.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지침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든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권력은 모두들 이야기하듯이 자체로 목적이다.

또한 정부는 본질적으로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권력이기 때문에 정부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세간의 질문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권력은 결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정치 공동체의현존 자체에 내재한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이다.

이 두 단어를 동의어로 다루는 일반적 논법은 복종이 곧 지지라는 세간의 등식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일으키고 혼란시킨다.

 

 

 

 

정당성은 도전받을 경우 과거에 대한 호소에 기초하지만, 반면에 정당화는 미래에 위치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폭력의 정당화는 의도했던 목적이 미래 속으로 더 멀어질수록 설득력을 상실한다.

 

권력과 폭력은 별개의 현상이지만 대개 함께 나타난다

권력과 폭력이 결합되는 어디에서도 권력은 주지하듯이 우선하는 지배적 요소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폭력이 권력이라는 세간의 등식은 폭력 수단을 통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서 이해되는 정보에 근거한다.

 

폭력은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인원수나 여론이 아니라 도구에 의존하며, 폭력의 도구는 이미 언급했듯이 다른 모든 용구들처럼 인간의 강성을 증대시키고 배가시킨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순전히 폭력만을 통한 지배는 권력이 상실되고 있는 곳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탈식민화냐 대량 학살이냐의 양자택일로 나타났던 것이 바로 축소되고 있던 유럽의 제국주의 권력이었듯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는 것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지만 대가는 아주 엄청나다

 

제국주의 시대 동안 종속적인 인종들의 정부가 발휘하는 본국 정부에 대한 아주 두려운 부메랑 효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의 폭력을 통한 지배가 영국 정부의 악영향을 미치는 곳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

그 마지막 종속적인 인종이 영국인 자신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폭력이 더 이상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지도 억제되지도 않는 곳에서는 수단과 목적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잘 알려진 전도가 발생한다.

수단 곧 파괴 수단이 이제 목적을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목적은 모든 권력의 파괴로 나타날 것이다.

 

테러와 폭력은 동일하지 않다

테러는 오히려 폭력이 모든 권력을 파괴하면서도 완전한 통제를 포기하지 않고 반대로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나타나는 통치 형태이다.

흔히 테러의 유효성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원자화 수준에 달려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온갖 종류의 조직적인 반대가 사라져야만 테러의 완전한 강제력이 활개칠 수 있다.

 

테러에 기초하는 전체주의적 지배와

폭력을 통해 수립되는 전제 정치 및 독재 정치의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가 적들만이 아니라 동지들이나 지지자들도 대립하면서 모든 권력 심지어 동지들의 권력조차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테러는 경찰 국가가 자신의 아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할 때 어제의 사형 집행인이 오늘의 희생양이 될 이때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때가 또한 권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폭력과 권력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즉 하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다른 하나는 부재한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운 곳에서 나타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

이것은 폭력의 대립물을 비폭력으로 사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비폭력적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동어 반복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이상의 논의는 폭력과 악이 동등하다는 것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폭력이 그 대립물, 권력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The End. 20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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