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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개벽크 23. 04. 27.

 

 

진보의 역설

 

 

폭력의 도구들의 기술적 발전은 이제, 주지하듯이 어떤 정치적 목표도 그것들의 파괴적 잠재력과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무력 갈등에서 그 실제적인 사용을 정당화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24)

 

폭력-권력 power, 강제력 force, 또는 강성(strength)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항상 도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학 기술 혁명, 도구 제작의 혁명은 특히 전쟁 상태에서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 주요 특성은, 인간사에 적용될 경우, 목적을 정당화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수단에 의해서 그 목적이 압도될 위험에 항상 직면해 왔다는 것이다.(25)

 

파괴 수단의 완성에 관여했던 자들이 마침내 기술의 발전 수준을 상승시켜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한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예측 불가능성을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 접근하는 경우에도 마주한다.(26)

 

미국 혁명의 유산은 잊혀지고, 미국 정부는 좋든 나쁘든, 마치 자신이 유럽의 계승물이었던 것처럼 유럽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유럽의 권력이 쇠퇴하기에 앞서 정치적 파산, 민족국가와 그 주권 개념의 파산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유럽의 권력 쇠퇴를 수반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전쟁이 여전히 최후 수단이라는 것, 저개발 나라들의 외교 문제에 있어서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낡은 연속이라는 것은 전쟁의 폐용성을 물리치는 논거가 결코 될 수 없으며, 핵이나 생체무기 없는 작은 나라들만이 여전히 전쟁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사실도 결코 위안이 되지 못한다. ‘승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오랜 속담이 굉장히 그럴듯하게 존속하는 이들 일부 세계로부터 고명한 무작위적 사건이 가장 발생하기 쉽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다.(28)

 

역사와 저이에 관하여 사유하는 사람은 누구든 폭력이 인간상서 항상 수행하는 거대한 역할을 깨닫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폭력이 특별한 고찰을 위해 아주 드물게 선정된다는 사실을 일별하고 오히려 놀랄 것이다.(31)

 

오늘날 전쟁과 정치, 또는 폭력과 권력간의 관계에 관한 이 모든 오랜 진리들은 적용 불가능해졌다. 2차 세계대전은 평화가 아니라 냉전 및 군대-산업-노동 복합체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일차적인 구성력으로서 전쟁 수행 능력의 우위성을 이야기하는 것, “경제 체계, 정치 철학, 법전이 전쟁 체계에 봉사하여 이를 확장시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 “전쟁 자체가 기본적인 사회 체계로서, 다른 이차적인 사회 조직 양식과 갈등하거나 협력한다고 결론내리는 것 이 모두가 엥겔스나 클라우제비츠의 19세기 공식보다 더욱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이언 마운틴 보고서의 익명의 저자에 의해 제안된 단순한 전도가 그보다 더 결정적이다. 전쟁이 외교활동(또는 정치, 또는 경제적 목적의 추구)의 연장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가 다른 수단을 통한 전쟁의 연속이다. 곧 평화는 전투기술의 실제적인 발전의 소산이다.(32)

 

정치과학의 오래된 통찰들 중 하나로 권력은 부를 통해서 측정될 수 없다는 것, 풍부한 부가 권력을 잠식할 수도 있다는 것, 많은 돈은 공화국의 권력 및 안전에 특히 해롭다는 것과 불길한 유사성을 지닌다.

 

신좌파의 강렬한 맑스주의적 수사는, 마오쩌둥에 의해 주장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는 전적으로 비맑스주의적인 신념의 견고한 성정과 부합한다. 분명하게 맑스는 역사에서의 폭력을 알아차렸지만, 그 역할은 그에게 부차적이었다. 말하자면 폭력이 아니라 낡은 사회에 내재한 모순이 그 사회의 출현에 선행하지만 그 원인은 아닌데, 이것을 맑스는 생명체의 탄생에 선행하지만 당연히 그 원인은 아닌 산고에 비유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는 국가를 지배 계급이 지휘하는 폭력 도구로 간주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실제적인 권력은 폭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권력은 사회에서 수행되는 지배 계급의 역할, 또는 보다 정확하게, 생산 과정에서의 지배 계급의 역할에 의해 규정되었다.(34)

 

신좌파의 정서와 열정, 그들의 진실성은, 말하자면, 현대 무기의 섬뜩한 자멸적 발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신좌파는 원자탄의 그늘에서 자라난 최초의 세대이다. 그들은 범죄적인 폭력이 정치로 대량 침투하는 경험을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았다.

 

신좌파 운동의 아주 커다란 성공, 특히 시민권의 영역에서의 성공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여론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남아있다.(38)

 

학생 운동에 의한 부인할 수 없는 새로운 폭력 예찬은 묘한 특색을 갖고 있다. 새로운 투사들의 수사는 분명히 파농에 의해 고취되었지만, 그들의 이론적인 논증은 언제나 온갖 종류의 맑스주의적 찌꺼기의 뒤범벅에 다름아닌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빈둥거리는 자들에게 기대를 걷고,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반란의 도시 선봉대를 발견할 것이다라고 믿고 있는, “폭력배들이 인민을 위한 진로를 불 밝힐 것이다라고 확신하는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맑스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르트르는 이런 새로운 신념을 아주 솜씨있는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는 이제, 파농의 저서에 의지하여, “폭력아킬레스의 창처럼, 폭력이 입힌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45)

 

이 말이 진실이라면, 복수는 대부분의 아픔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소렐의 총파업의 신화가 그랬던 것보다 더 추상적이고, 현실로부터 더 동떨어져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존엄성을 지닌 굶주림이 노예의 몸으로 먹는 빵보다 낫다라는, 파농의 보다 심한 수사학적인 과장과 매일반이다. 존엄성을 지니고 먹는 빵이 노예의 몸으로 먹는 케잌보다 낫다고 말했다면 그 수사학적인 논지는 상실되었을지도 모르겠다.(46)

 

능욕당하는 자가 폭력을 꿈꾼다는 것, 피억압자가 최소한 하루 한번이라도억압자의 위치에 올라 앉기를 꿈꾼다는 것,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의 소유물을 꿈꾼다는 것, 박해 받는 자가 사냥감과 사냥꾼의 역할이 뒤바뀌기를 꿈꾼다는 것 그리고 뒤처진 자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 나중 되리라는 왕국을 꿈꾼다는 것을 누가 의심해본적 있겠는가? 핵심은 맑스가 보았듯이, 꿈들이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47)

 

자유주의 삿ㅇ은 진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맑스주의자나 헤겔주의자의 개념들로 역사를 예찬하는 것에 대한 아주 엄격한 거부와 결합시켰으나, 오직 그런 개념들만이 진보를 정당화하고 보증할 수 있었다.(52)

 

전체적인 인류의 진보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통념은 17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18세기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소 공통의 소신으로 발전했으며, 19세기에 와서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의가 되었다. 18세기에 있어서 진보라는 용어는 인간의 완성에 부합하려는 목적을 가진 인류의 교육을 함의했다. 진보는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었고, 또한 역사의 종말이 될 수도 있을 자유의 왕국이라고 여겨지는 맑스의 계급 없는 사회- 종종 기독교의 종말론이나 유대교의 메시아주의의 세속화로 해석되는 실제적으로 계몽운동 시대의 각인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52)

 

하지만 19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그런 모든 한계는 사라졌다. 이제 프루동의 말대로, 운동은 원초적인 본질이며 운동의 법칙만이 영원하다.” 이 운동은 시작도 끝도 없다. “운동이 존재한다. 이것이 전부다!” 인간에 대한 것으로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우리는 완성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게 빌려온 맑스의 관념,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기 자손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낡은 사회가 자신의 미래 사회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관념은 실제로 역사상 가장 정교할 뿐만 아니라 가장 그럴듯한, 진보의 영원한 연속성에 대한 개념적 보증이다. 동시에 그러한 진보의 운동은 적대적인 강제력들의 충돌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전제되기 때문에, 모든 퇴보는 필연적이겠지만 일시적인 역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53)

 

진보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논박이 존재한다. 헤르젠의 말대로, “인간의 발전은 나중에 오는 자들이 그 선행자들의 노동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칸트의 말대로, “항상 당혹스러워질 것이다 앞 세대는 단지 후세를 위해서만 힘든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단지 후세만이 완성된 건물에서 거주하는 행운을 누릴지도 모른다.”(54)

 

하지만 이러한 불리한 점들보다, 막대한 장점이 더욱더 중요하다. 즉 진보는 시간 연속을 분쇄하지 않고 과거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한 행동 지침으로서 이바지할 수도 있다. 이것이 맑사 헤겔을 뒤집었을 때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곤란한 질문에 답변을 제시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답변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보다 나은, 보다 훌륭한, 그와 같은 어떤 것으로 발전시키자(얼핏 보기에, 현재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이론들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증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합리적인 신념은 이러한 통념에 의존한다.) 좌파의 보다 세련된 수준에서, 그 답변은 현재의 모순을 모순에 내재하는 합으로 발전시키라고 알려준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의 필연적인결과를 제외하고, 전적으로 새롭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장받는다. 얼마나 안심시키는가, 헤겔의 말대로, “이미 거기에 존재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55)

 

20세기에 겪었던 우리의 경험 전체가, 우리를 시종일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맞서게 했으며, 진보의 통념 및 원리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데, 진보가 갖는 대단한 대중성은 현실로부터 유리된 안락한, 사변적이거나 유사 과학적인 도피처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56)

 

진보는, 확실히, 우리 시대의 미신 박람회에 제출된 보다 심각하고 보다 복잡한 품목이다. 무제한적인 진보에 대한 비합리적인 19세기의 믿음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유는 주요하게는 자연과학의 경이로운 발전 때문인데, 자연과학은, 근대 시대의 발원 이후로, 실제적으로 우주과학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끝없는 과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 과학이, 지구 및 지구의 본성이 갖는 유한성에 의해 더 이상 제약 받지는 않을지라도, 절대 끝나지 않는 진보에 종속되어야만 할 것인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적어도 인간성에 관한 엄격하게 과학적인 연구, 곧 이간 정신의 산물을 다루는 이른바 정신과학은 정의상 끝나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57)

 

과학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학문의 발달은 학문을 가치있게 만들었던 모든 것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진보는, 우리가 풀어놓은 재앙스러울 정도로 급격하게 변동하는 과정을 평가하는 규준으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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