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개벽크 23. 05. 18.

 

 

 

3. 폭력의 본성

 

 

 

나는 동물학자들의 많은 연구작업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94)

 

 

인간이 동물계에 속한다고 정의한다면, 왜 우리는 인간의 행위 규준을 다른 동물 종들로부터 끌어오도록 요청해야만 하는가? 그 답변은, 유감스럽지만 단순하다. 동물 실험이 더 쉽기 때문인데, 이것은 인도주의적인 이유 인간을 새장에 가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연구자를 속일 수 있다는 곤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96)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기꺼이 시인했을지도 모르는 수준을 넘어 폭력 행위를 한층더 ‘자연스런’ 반응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폭력이 자신의 근본 원리, 즉 기본적인 자기 보존 기능을 상실했을 경우,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되는데,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이런 이유로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짐승같이’ 될 수 있다.(97)

 

 

인간 본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정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 정의. 이에 따라서 우리는 오직 이성이라는 부가적인 속성에 있어서만 다른 동물 종들과 구별된다가 숨어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근대 과학은, 이 오래된 가정으로부터 무비판적으로 출발하여, 인간이 동물계의 일부 종들과 여타의 온갖 고유 특성을 공유한다는 것 ‘이성’이라는 부가적인 재능이 인간을 보다 위험스러운 짐승으로 만든다는 것을 제외하고-을 ‘증명’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성의 사용은 우리를 위험스럽게 ‘비합리적’으로 만드는데, 왜냐하면 그런 이성은 “본원적으로 본능적인 존재”의 고유 특성이기 때문이다.(98)

 

 

폭력이 짐승 같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 이 용어들을 휴머니스트의 일상어로 이해하든 과학적 이론들에 따라서 이해하든-을 논증해보고자 한다.(99)

 

 

자신에게 불리하게 허위 증언을 했던 자를 때려죽인 빌리버드가 전형적인 실례인데 이런 의미에서, 분노 그리고 분노가 때때로 항상은 아니지만 동반하는 폭력은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들에 속하며, 그래서 그로부터 인간을 치료한다는 것은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인간성을 거세한다는 의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100)

 

 

인간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손으로 법을 집행하는 그와 같은 행동이, 문명화된 공동체의 헌정과 상충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반정치적 특성이, 멜빌의 위대한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그대로, 비인간적이거나 ‘단순히’ 감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노와 폭력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변질하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대용물로 향해졌을 때인데, 이것이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공격성에 관심을 가진 정신병 의사들과 전쟁학 연구자들이 추천하는 바로 그것이며, 안타깝게도, 사회 전체의 특정한 분위기와 성찰하지 않는 태도에 조응하는 바로 그것이다.(101)

 

 

만일 참여자를 분노자로 전환시키기 쉬운 원인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한다면, 그 으뜸 원인은 불의가 아니라, 위선이다. 프랑스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위선에 대한 투쟁이 ‘자유의 전제 정치’를 공포 정치로 전환시켰을 때, 위선이 수행했던 중대한 역할은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논의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투쟁이 한참 후에 프랑스 도덕주의자들에 의해 비난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데, 그들은 위선 속에서 모든 악덕중의 악덕을 보았으며, 얼마 뒤에 부르주아 사회라고 불려진 ‘선한 사회’ 속에서 위선이 지배적인 최고 위치에 있음을 깨달았다.(102)

 

 

폭력 자체를 위해서 폭력을 예찬했던 저자 층은 두텁지 않다. 그러나 그 소수로 소렐, 파레트, 파농은 부르주아 사회의 보다 뿌리깊은 증오를 통해 동기를 부여 받았으며 전통 좌파에 비해 그 사회의 도덕 규준과 더욱더 급진적으로 단절하도록 이끌려졌는데, 이것은 주로 동정심과 정의를 향한 불타는 욕망을 통해 고취되었다.

 

 

적의 얼굴에서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것, 포격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적의 사악한 음모 및 조작을 폭로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진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절멸의 위험조차 무릅쓰고 행동을 촉구하는 것 이것이 아직도 교정과 거리에서 오늘날의 폭력이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동기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이러한 폭력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외양의 세계에서, 그 외양만을 취급하고, 현시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위선의 독단 시간이 가면 탄로나는 편의적인 책략과 구별되는 이른바 합리적인 행위라고 불려지는 것과 병행될 수 없다.(103)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그 이면의 이해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외관상의 합리성이다. 이성이 계략으로 이용되는 경우에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은 마치 정당방위에서 총기를 사용하는 것이 ‘비합리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위선에 대항하는 그러한 폭력적인 반작용은, 아무리 자신의 용어법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라도, 특정한 목표를 갖고 자신만의 전략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그것은 ‘합리화되는’ 순간에, 다시 말해서 투쟁 과정에서의 대항-행동이 하나의 행동으로 변하는 순간에 ‘비합리적’이게 되고, 그 혐의자들에 대한 사냥이, 내면의 동기를 찾아내려는 심리적인 추적을 동반하면서, 시작된다.(104)

 

 

범죄적이든 정치적이든, 모든 불법적인 계획에 있어서, 집단은 자신의 안전을 목적으로, “각 개인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실행할 것”을 요구할 것이며, 이것은 폭력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 하기 전에 남의 이목을 주시하는 사회에 배수의 진을 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성원으로 인정 받으면, “폭력의 실천은 사람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속시키는데, 왜냐하면 각 개인이 거대한 사슬에서 폭력적인 고리를, 치솟아 오르는 거대한 폭력 유기체에서 그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라는 넋을 잃게 만드는 마법에 빠질 것이다.(105)

 

 

홉스는 죽음이, 폭력에 의한 죽음에서 오는 공포의 형태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연구했던 유일한 정치철학자이다. 그러나 홉스에게 결정적인 것은 죽음 앞의 평등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지니고 있는 죽일 수 있는 동등한 능력에서 유래하는 공포의 평등으로서 이것이 공화국으로 결속하도록 자연 상태의 사람들을 설득한다. 어떤 정치체도 죽음 앞의 평등과 폭력에 의한 그 현실화를 통해 근거지워진 적은 없었다.(107)

 

 

이를테면 역사상의 자살 결사들은, 사실상 그러한 원리를 통해 조직되었으며 따라서 종종 자신들을 ‘형제’라고 불렀지만, 도저히 정치적 조직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집단적인 폭력이 생성시키는 강한 형제애적 감상은 ‘새로운 인간형’과 더불어 새로운 공동체가 그로부터 비롯한다는 희망을 갖도록 선한 사람들을 오도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희망은 환상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형제애보다 더 일시적인 인간 관계는 없으며, 그것도 생명과 신체의 직접적인 위험이라는 조건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을 뿐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소렐은, 60년 전에 이러한 노선을 따라서 사유했고 슈펭글러 이전에, 그는 유럽에서 계급 투쟁이 약화하는 분명한 징후를 관찰하면서, ‘서양의 몰락’을 예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계급 투쟁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에너지’를 상실했다. 그러므로 계급적 차별성을 재확인하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력을 사용하도록 설득될 수 있을 때만 유럽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108)

 

 

이 때문에, 콘라드 로렌츠가 동물계에서 공격성이 갖는 생명 촉진 기능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에, 폭력은 생명력과 특히 그 창조성의 발현으로 찬양되었다. 소렐은, 베르그송의 생명의 약동에 고취되어, ‘생산자’를 위해 설계된 창조성의 철학을 목표로 삼았으며 논쟁적으로 소비자 사회와 그 사회의 지식인들에 대항했다.

 

 

소렐은 노동자를 “생산자”로 보는데, 그들은 “생산을 향상시키는데 필수적”인, 새로운 “도덕적 품성”을 창조하고, “주주 총회처럼 자기 편 일색으로 구성된 의회”를 파괴하면서,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물결이 낡은 문명을 가로지를” 때, “진보의 이미지 전체적인 대격변의 이미지”와 마주할 것이다. 그 새로운 가치들은 전혀 새롭지 않음이 드러난다.(109)

 

 

그것들은 명예감, 명성과 영예에 관한 욕망, 증오가 없고 “복수심이 없는” 투쟁 정신이며, 동시에 물질적인 이익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사실상 부르주아 사회에 뚜렷이 부재하는 바로 그 덕목들이다.(110)

 

 

소렐과 파레토가 죽은 후 불과 몇십 년 동안에 완전히 명백해진 무엇인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한 관점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었다. 현대 세게의 거대한 생산력 증진은 결코 노동자들의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기인했으며, 그것은 노동 계급이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과학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지식인들’은, 소렐과 파레토에게 멸시당했지만, 갑자기 주변적 사회 집단이기를 멈추고 새로운 엘리트로서 부상했으며, 그들의 연구작업은, 불과 몇십 년 동안에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생활 조건을 변화시키면서, 사회를 움직이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되어왔다.(112)

 

 

우리의 가장 반역적인 학생들이 이런 사회 집단 이들을 더욱더 격렬하게 비난할수록 그들은 소비자 사회의 부드러운 작동을 교란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로 인해 더욱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 으로부터 ‘진정한’ 혁명적 추동력이 발생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을 회고적인 감상으로 지켜보는 일은 자주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좋든 싫든-그리고 내 생각에는 희망적인 만큼 두려워할 이유도 충분히 존재한다.(113)

 

 

표면상 아주 색다른 것처럼 보이는 폭력에 대한 생물학적 정당화 역시 정치 사상의 가장 오래된 전통들이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폭력과 동등시되는 전통적인 권력 개념에 따르면, 권력은 본성상 팽창주의적이다. 권력은 “성장하려는 내적 충동을 갖고” 있으며, “성장 본능은 권력 특유의 본능”이기 때문에 창조적이다. 마치 유기체적 생명의 영역에서 모든 것이 성장하거나 쇠퇴하여 죽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영역에서 권력은, 필경 팽창을 통해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114)

 

 

나의 견해로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 권력과 폭력이 생물학적 개념들로 해석되는 유기체적 사유 전통보다 이론적으로 E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한 개념들이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생명과 생명에서 나온다고 단정되는 창조성이 그 공통분모이므로, 마찬가지로 폭력도 창조성에 기반하여 정당화된다. 그러한 문제들에 관한, 특히 폭동에 관한 현재의 전체적인 논의에 스며들고 있는 유기체적 비유들-‘병든 사회’라는, 폭동은 그 징후라는 통념-은 단지 폭력을 조장할 수 있을 뿐이다. (115)

 

 

인종주의는, 인종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생명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며, 그래서 사실상 반사 작용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론에 기초하는 의도적인 행동을 야기한다. 인종간의 투쟁에서 폭력은 항상 살인적인 것이지만,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인종주의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과인데, 여기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어느 한쪽을 편드는 상당히 더 모호한 편견들이 아니라, 명시적인 이데올로기적 체계이다. 권력의 압력을 받을 때, 편견들은 이해관계 및 이데올로기 모두와 다르게, 포기될 수 있다.(117)

 

 

가장 커다란 위험은 다른 방향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폭력은 항상 정당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리에서의 폭력의 확대는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정말로 인종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야기할지도 모른다.(118)

 

 

공적인 문제, 공적인 것에 관해 아주 약간의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해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비폭력적으로 행위하고 합리적으로 주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120)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이므로, 그것을 정당화시켜야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일 때까지만 합리적이다. 또한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가 행하는 것에 관한 가능한 결과들을 결코 확실하게 알수 없기 때문에, 폭력은 단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다. 폭력은 원인들을 촉발시키지 않으므로, 역사도 혁명도, 진보도 반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불만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래서 공적인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121)

 

 

‘폭력은 대가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인 개혁뿐만 아니라 ‘영혼 강좌’ 및 스와힐리어 교육에 대해서까지, 무차별적으로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122)

 

 

더구나 폭력의 위험성은, 심지어 그 폭력이 단기적인 목표라는 극단적이지 않은 틀거리 내에서 의식적으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항상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만일 목표가 재빨리 달성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단순히 패배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폭력 실천을 정치체 전체로 확산시킬 것이다.

 

 

행동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며, 패배하는 경우 현상태로의 복귀도 항상 불가능할 것 같다. 폭력의 실천은,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더 폭력적인 세계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가장 많다.(123)

 

 

새로운 전형이 폭력의 실천을 통해서 세워지기는 거의 어려울 것이며, 비록 내가 현재의 폭력 예찬 대부분이 근대 세계의 행동 능력의 심각한 좌절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울지라도 그럴 것이다. 빈민가에서의 폭동과 대학 교정에서의 반란이 “좀처럼 행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사실이다. 그러한 사건 발생이 새로운 것 새로운 전형의 발단인지 아니면 인류가 이제 막 상실하고 있는 능력의 고통스런 죽음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127)

 

 

우리는 그러한 발전들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알지 못하지만,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의 공개적인 초대라는 것- 권력을 쥐고 있지만 자신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통치자들이든 피통치자들이든지 간에,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항상 깨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을 알고 있으며, 모르고 있다면 알아야만 한다.(132)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