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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1974) / 1/ 화니짱 / 23.10.25.

 

1장 코페르니쿠스와 야만인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에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라고 말했다. - 몽테뉴

 

p9 : 클라스트르는 니체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나 복종에 대한 선천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은 무조건 이것을 해야 한다, 당신은 무조건 이것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당신은 해야 한다라고 명령하는 일종의 형식적 의식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권력과 정치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통념을 잘 표현한 말이기에 인용했을 것이다. 이런 본성이 동물적인 본성에서 유래한다는 진화론적 주장에 대해서는 동물사회학자라피에르를 인용해 반박한다. (11) “동물들 사이의 사회적 현상에 관해, 특히 동물들의 자기통제 과정에 관한 습득된 지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동물 세계에서는 어떤 형태의 정치권력도, 심지어 맹아적인 것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클라스트르가 두 사람을 인용해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12) 우리는 고대적사회들이 공통적으로 무문자와 소위 생계경제라는 고대성을 지니고 있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라피에르가 지적한 것처럼 부정적인 정의일 뿐이다. 고대적 사회들 사이에도 심오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어떤 사회도 다른 사회와 닮지 않았으며, 모든 야만인들을 회색으로 그리는 암울한 반복은 틀린 것이다. (13) 결국 무()권력과 권력 사이의 불연속성 혹은 연속성의 가설을 전제하는 한,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들을 분류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권력의 본질이나 권력이 출현하게 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는 시사점을 줄 수 없게 되어 권력의 문제는 미스터리로 남게 될 것이다.

 

원시사회의 정치적 구성과 관련해서 항상 이야기되는 것이 경제적 발전단계이다.

p18 : 달리 말하면 고대적 사회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근근이 버텨나가는 것이고, 그 생활은 기아와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서는 기술적인 결함과 그 이상의 문화적인 결함으로 인해 잉여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에 대한 이러한 견해보다 더 뿌리 깊은 동시에 잘못된 견해는 없다. 클라스트르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이야기한 자본의 출현과 이를 통한 문명 발달 단계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9) 생계경제라는 개념은 실제 원시사회가 처했던 경제적인 현실보다 오히려 원시사회에 대한 서구 관찰자들의 태도와 습관을 반영하고 있는 과학적허위의식에 불과하다. (22) 실제적이건 잠재적이건 모든 형태의 권력은 선험적으로 권력의 본질을 표상하는 특권화된 관계로 궁극적으로 환원된다. 만약 환원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명령-복종 관계의 부재는 결국 정치권력의 부재를 초래한다는 (서구적인) 정치 개념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23)없는 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없는 사회도 존재한다. 인류학적 연구를 끊임없이 가로막는 장애이자 이미 힘을 잃어버린 적인 자민족 중심주의를 자각한 이후로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다. 자민족 중심주의는 차이에 대한 모든 관심을 매개함으로써 차이를 동일시하며 결국은 소멸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클라스트르는 모든 자민족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보편성을 자임하는 서구적 자민족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서구의 자민족 중심주의와 원시종족의 자민족 중심주의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디언 부족이든 오스트레일리아 부족이든 야만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해 과학적 담론을 만들지 않은 채 자기 문화가 다른 문화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민족학은 여러 면에서 자신의 특수성에 매몰된 채, 그리고 과학적인 거짓 담론이 곧바로 진짜 이데올로기로 왜곡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처음부터 보편성의 영역에 자신을 놓아두고자 한다. (24) 오래전부터 자민족 중심주의와 궤적을 같이한 것은 진화주의이다. 진화주의는 두 단계를 거친다. 우선 여러 사회들을 그들의 권력의 유형이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지 그 정도에 따라 평가한다. 다음으로 이런 모든 다양한 권력의 형태 사이의 연속성이 있음을 (과거처럼) 명시적으로 혹은 (현재처럼) 묵시적으로 주장한다. (...) 똑같은 도식으로 계속 사고하고자 하는 유혹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생물학적 은유를 사용한다. (25) 사실상 민족학이 공유하고 있는 이 신념은 역사가 단선진화하며 권력이 없는 사화는 과거 서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고, 서구의 문화야말로 이러한 사회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문화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서구의 권력 체계가 최상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고대적 사회들에 동일한 확신을 심어주려고까지 한다. (26)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즉 고대적 사회는 정치적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28) 한마디로 권력이 없는 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에서 정치학이 현재까지 극복하지 못한 인식론적 장애가 서구적 사고의 자민족 중심주의, 즉 비서구 사(29)회를 이국적으로 바라보는 견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27 : 그렇다면 클라스트르의 대안은 무엇일까?

정치권력을 사고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금욕적이라고 할 정도로, 고대적 세계가 이국적이라고 보는 견해를 버리는 것, 요컨대 고대적 사회에 대한 소위 과학적인 담론을 거시적으로 규정하는 견해를 폐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 우리는 정치권력은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것(이것이 혈연에 의해 규정되든 사회계급에 의해 규정되든 간에)에 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강제적 권력과 비강제적 권력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다.

2) 강제로서의 정치권력(즉 명령-복종 관계) 양식만이 준거 틀로서 여타의 다른 성격을 지닌 양식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어야 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3) 심지어 정치제도가 없는 사회(예를 들어 추장이 없는 사회)에서도, 그런 사회에서조차도 정치적인 것은 존재하며 권력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치권력은 인간 본성, 즉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 니체의 생각은 틀렸다) 인간의 사회생활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폭력 없는 정치는 상정할 수 있지만 정치 없는 사회는 생각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32) 그러므로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 없는 사회이고 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적인 사회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양한 사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다.[이 말은 분명, 맑스의 유명한 선언, “모든 역사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한 명제를 기반에 깔고 있다.]

 

p33 : 결국 이것은 일반 정치인류학의 임무를 정의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 임무는 다음 두 가지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정치권력은 무엇인가? 즉 사회는 무엇인가?

2) 비강제적 정치권력으로부터 강제적 정치권력으로의 이행은 어떻게 발생하고 왜 나타나는가? 즉 역사는 무엇인가?

 

투쟁 없는 원시공산제가 지배하는 사회들에서는 어떠한가? 맑스주의는 비()역사에서 역사로의 이행, ()강제에서 폭력으로의 이행을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맑스주의는 실제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보편 이론, 즉 인류학이 될 것이다. (34) 정치권력이야말로 사회적인 것의 뿌리인 근원적 분열, 모든 운동과 모든 역사가 출발하는 최초의 단절, 모든 차이의 모태인 최초의 갈라짐이 아닐까?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서구 그 자체가 인류학에 새겨놓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탄생한 대지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 사고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태양 중심적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미개인의 사유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우리를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 라피에르는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과의 모든 끈을 단절함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회과학들의 공통된 주장을 정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버리고자 하는 것이 실은 사고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과학과 사고는 상호 배타적이고 과학은 비사고 아니면 더 나아가 반사고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과학이나 진부한 모방 혹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열정 속에서 곧장 몽매주의로 빠지게 만든다.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기가 쉽다고 할지라도 사고라는 것은 진정 그 경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un-learning이라는 나의 문제의식, 핵듀케이션(Hackducation)! 역설계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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