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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제15장에의 추기

 

민족학자는 그의 연구 생활의 큰 부분을 사회성의 여러 형태집단이나 집합 생활의 가장 미묘한 짜임새 등을 지나치게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술하고 분석한다. 이것은 구조를 따르게 하면서 민족학자가 살아온 사회의 다른 사회와 혼동될 수 없는 개성적 양태를 이루고 있다. 이 미묘하게 바르르 떨고 있는 실재(實在)를 유형이나 구조로 바꿔 놓으려고 생각해본 사람은 없다. 구조의 탐구는 제2의 단계에서 문제가 된다. 그 단계에서는 존재하고 있는 것을 관찰한 다음에 비교와 분류를 가능하게 할 만큼 안정된 요소만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나는 구조화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의 선천적정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관찰의 어느 수준에서 구조 분석이 행해지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하나의 구조에서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문화의 가장 유동적이며 가장 잡기 어려운 측면이다. 자연과학의 경우 하나의 구조에서보다 포괄적이고 설명력 있는 구조로의 진보는 언제나 이전 가설이 구조를 갖지 않는 것으로 무시했던 미세한 사실의 구조화를 발견하는 데 있다(311).

실제로 민족학은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아는 데 있다기보다 그러한 사회가 서로 다른 달라지는 방식을 발견하는 데 있다. 언어학에서의 이런 시차적 차이는 민족학 고유의 대상이다. 그 본성이 불완전하게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갖가지 존재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가능성이다(312).

(313).

사회 구조의 개념을 수학적 측정과 결부시키려고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의견을 표명한 일이 없다. “계량의 관념과 구조의 관념 사이에는 필연적 결부란 아무것도 없다. 수량적인 해를 포함하지 않는 문제가 엄밀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수학은 엄밀함의 관념과 계량의 관념이 독립의 것임을 나타냈다. 새로운 수학에 의하여 필연성의 세계가 반드시 수량의 세계와 뒤섞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314).

구조주의는 음운론 속에만 그의 장소를 갖고 있으며, 언어 활동의 수준에서는 모든 의의를 잃는다는 논의는 문법이나 수사법, 나아가 단어에도 미치는 사상에 관하여 이루어진 구조주의적 연구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다(315).

구조와 형태학적 공간 개념으로의 사회적 실재나 지각되는 표면을 혼동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나의 출발점은 1) 많은 원주민 사회는 그의 제도의 도식을 공간에 투영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한다는 것, 2) 사회가 공간에 대해 의식되지 않은 구조가 무관심을 틈타 빈 영역에 끼어들어 상징적 또는 현실적 방식으로 스스로를 입증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316).

계의 계는 분석이 가해진 현상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 분석이 행해지고 있는 갖가지 면이 보유하는 있는 관계의 가장 추상적인 표현이며, 추상의 정도는 역사적-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두 곳의 사회도 때로는 같아지는 것이 당연해 질 정도의 것이다. 계의 계에 의해 하위의 집합-각각이 구조를 갖는 일정 면에서 대응하는-으로 이루어지는 집합의 형식적 특성을 생각한다(317).

나는 구조의 갖가지 면 사이에 미리 확립된 일종의 조화와 같은 것을 설정하지 않는다. 상호 간 모순되는 상태로 있을 수 있는데 모두 같은 집단에 속하고 있다. 내용에 관해서 행하여진 최종 분석과 추상에 있어 갖가지 형의 사회를 변환의 법칙에 따라 성격짓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변환의 법칙이란 구조화된 상이한 면 사이에 이상적인 상동의 관계를 다시 찾아내기 위해 폐기할 필요가 있는 꼬임의 수효나 세기나 방향, 등급 등을 나타내는 식이다. 즉 이 환원은 동시에 하나의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의 복잡한 모델을 단순하고 보다 훌륭한 논리적 효율을 가지는 다른 모델로 바꿔 놓음으로써 인류학자는 그의 사회에 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위해, 적어도 그것들을 위장하여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각의 사회가 도움을 받는 재주나 술책의 덮개를 벗겨내는 것이다(318).

(1) 상대주의적 논의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의 관계로분류하려는 시도에 있다. 우리의 사회학적 세계에서 벗어난 곳에 있고 상호 관계에 있는 여러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참조 체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2) 반대로, 떨어져 있는 여러 사회와 우리 자신의 사회의 발전의 두 가지 상태와 관련된다. 참조 체계가 내면화된 때에는 모든 것이 일변한다. 이 둘째 단계는 다른 사회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의 변혁에 적용할만한 사회 생활의 원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모든 사회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첫째 경우와 반대로 우리가 사회를 파괴해 버릴 우려 없이 변형할 입장에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뿐이다. 거기에 도입하는 변화도 또한 그 사회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319).

나는 민족학자가 언제든 빠져들 우려가 있는 심연상대주의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의 해결은 건설적인 것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두 태도 혹은 우리 사회와 멀리 떨어진 사회에 대한 존중과 우리 자신의 사회를 변형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320).

사회는 사는 것도 활동하는 것도 스스로 변형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사회만이 이익을 위해 주장되는 인간 중심주의는 오늘날 혐오되어야 한다. 실제로 미개 사회 혹은 그렇게 간주된 사회가 생산관계에서가 아니라 혈연의 유대에 관리되고 있다는 것은 맑스에서도 엥겔스에서도 빈번하게 표현되고 있다. 만일 이들 사회가 밖에서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무한하게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사회의 시간의 범주는 우리 자신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쓰는 시간의 범주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321).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며 이차적인 의미에서밖에 우리의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우선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민족학자가 대상으로 하는 미개라 불리는 사회이다(322). 내가 남프랑스의 포도주 교환을 사회 급부의 용어로 해석할 때 목적은 현대 사회의 성원이 유지하거나 미발달 상태의 관행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경험 속, 불가해하게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를 여러 제도를 재발견하는 일을 돕는 데 있다. 포도주의 교환이 포트리치의 한 잔존인지 아닌지를 아는데 있지 않다. 급부의 순환에 결부되어 있는 현지인의 감정, 의도, 태도를 보다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비판하는 루벨은 우리 사회의 범주를 미개 사회 연구에 적용하도록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회의 부가 결국 흘러들어 가는 곳의 급부가 어떤 생산 양식이나 사회 구조의 일정한 조건에 응한다는 것은 절대로 확실한 것이다. 급부는 사회의 성원 중 일부분에 의한 다른 부분의 경제적 착취를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확신한다(323).

엥겔스는 생산 양식이 혈연의 오랜 유대나 부족 내의 양성(兩性)이 오랜 상호적 공동체의 해체 정도보다 더 결정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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