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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인류학 13장 발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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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예술에 있어서의 도상표현의 분할성

 

지금까지의 민속학자의 연구가 문화접촉과 전파현상과 차용을 증명하는 일이었다면,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재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특성 또는 양식과를 구별하는 특정한 상위(相違-서로 틀림)점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아메리카 북서안의 예술과 고대 중국의 예술에 볼 수 있는 유사성-강렬한 양식화, 도식화 내지는 상징화, 분할도상에 의한 신체의 묘사, 때때로 비대칭을 동반하는 정교한 좌우대칭, 새로운 요소에의 세부의 비논리적 변형, 골격 내지 내장 기관이 신체의 도상에 우선한다고 하는 지적인 도상. 레온하르트 아담에 의하면 고대 중국과 북서 아메리카의 양쪽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공작 기술적-예술적 원리는 거의 같은 것이다.” 아무르 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예술이 한편에서는 아이누와 마오리의 장식에서, 다른 편에서는 중국 앙소문화와 일본 승문문화의 신석기 문화와 관련이 있으며 승목 장식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히 상이한 지방과 시대에 속하고, 상호간 뚜렷한 유사정을 나타내는 여러 예술은 각각에 또한 별개의 독립한 이유에서 지리학이나 역사학의 요청과는 양립하지 않는 근접 관계를 보이고 있다.

 

전파주의 유형의 인류학자는 역사 비판을 밀고 나갔다. 원시 예술의 비교연구는 아마도 문화의 접촉이나 차용 연구자의 열의 때문에 위험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실 이 비교연구는 과학이 아직도 적용 가능한 만족할 수 있는 해석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뚜렷한 관련이 있어도 부정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 지적 형식주의에 의해 위협 당해 온 것이다.

아마도 문화접촉의 가설이라는 것은 우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유사성을 가장 손쉽게 설명하는 가설이다. 전파주의자의 노력의 성과는 역사의 여러 가지 가능성의 체계적 탐구에서 생긴다.

 

도상 표현의 분할성은 아메리카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예술에 관하여 프란츠 보아즈에 의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동물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둘로 분할되어 그려져 있다... 두 눈 사이에는 깊은 요부가 있어 코까지 내려가고 있다...즉, 동물이라는 것은 측면상이 한 가운데서 접합하고 있는 두 개의 분할상으로서 그려지든가 또는 머리 부분의 정면상은 동체의 두 인접한 측면상으로 표현되는 셈이다.” 이 분석을 고대 중국 예술의 기법에 관한 크릴의 분석과 비교해 보면, 은나라 장식 예술의 뚜렷한 특징의 하나인 동물이 평면 또는 곡면에 그려지는 독특한 방법은 은나라의 도안을 연구하면서 나는 늘 이 예술은 그 정신에 있어서 또 다분히 그 세부에 있어서도 북서안 인디언의 예술과 닮았다고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매우 특징적인 기법은 고대 중국의 예술에서도 시베리아의 미래 민족에게서도 뉴질랜드에서도 아메리카 남단인 카도베오 족 가운데서도 볼 수 있다. 이 브라질 남부 작은 부족의 여성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여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그리는데, 모델에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복잡한 주제의 범위 내에서 즉흥적으로 그린다. 이 장식은 일견 비대칭적으로 복잡하기는 하나 실제로는 대칭적인 것을 덮어 숨기고 있는 것이다.

 

(238)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예술에 있어 본질적 특징이 공통되어 있다. 자연과는 관계없이 관습적인 규준에 따라 구성된 요소에의 대상체의 전위를 강조하였다. 이 전위는 간접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거기서는 기관이나 사지가 분할되어 있고, 그것에 따라 임의의 개체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카도베오 족의 예술은 이러한 전위(轉位-위치가 바뀜, 정상 위치에서 벗어남)를 그 이상으로 함과 동시에 그 이하로도 행하고 있다. 장식적 가치외에 새디즘의 요소를 섞고 있는데, 이러한 북서안의 예술과 카도베오족의 예술의 유사성을 더욱 추구하게 되면 주목할 가치가 있음을 알게 한다. 조각과 회화는 표현의 두 수단이다. 조각은 사실적 성격을 나타내지만, 회화는 상징적이며 장식적이다. 카도베오족, 캐나다, 알래스카의 조각에는 남성의 예술표현 의도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여성의 예술은 비표출적 예술이다. 이 두 예술은 지형 인쇄 방식으로 장식을 행하고 있으며, 기본적 동기의 변화에 의해 언제나 새롭게 조합을 만들고 있다. 또한 그 예술은 사회 조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기와 주제는 서열의, 즉 귀족 신분의 특권과 위신의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회는 모두 계층 질서화 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의 장식 예술은 이 계층 질서의 위계를 나타냄과 함께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던 것이다.

 

(241) 카도베나 족의 예술과 같이 분할을 행하고 있는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의 예술을 개략적으로 비교해 보면, 그 유사함에 놀란다. 햇칭, 번개무늬, 소용돌이를 쓴 장식의 복잡성, 또는 안면 전체를 가득하게 그린다고 하는 동일향 경향, 입술 언저리를 치장하는 동일 부위의 장식 등이다. 마오리 족의 장식이 문신인 데 대하여 카도베오 족의 장식이 채색화라고 하는 데서 오는 상이점도 있다. 이것은 분할 원리의 논리적 발전에서 생기는 것임을 밝혀 두었다. 카도베오 족의 안면 장식은 마오리 족의 그것과 북서안의 그것과의 중간에 위치함이 분명하다. 이 연속성은 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 내포된 의의가 인지된다. 문신은 단순히 장식일 뿐만은 아니다. 단순한 상징, 즉 귀족 신분의 표지나 사회적 계층 질서화의 위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정신적 궁극 목적이나 도덕적 교훈을 아로새긴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마오리족의 문신은 그저 단순하게 도안을 육체에 새겨 넣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그의 일족의 전통과 철학의 모든 것을 새겨넣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옛날의 카도베오 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며, 예수회의 선교사인 산체스 라브라돌은 원주민이 자기의 신체에 채색화하기 위해 온종일을 바치는 열정적인 진지함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림이 안그려진 자는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서로 떨어져 있던 여러 문화 사이에 이렇게도 유사한 표현 방법이 재현돠는 것을 어찌 설명하면 되는 것일까. 가장 간단힌 가설은 역사적 연관이라는 가설 또는 공통의 문명에서 상호 독립적으로 발전하였다고 하는 가설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설사 전파학자의 가장 야심적인 재구성이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생겨날 역사와는 관계 없는 본질적 문제가 있을 것이다. 즉 기나긴 역사적 시대를 통하여 차용되거나 전파되거나 한 문화적 특성이 어째서 변하지 않고 원래대로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불변성은 변화와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할 표현의 유일한 기원이 발견되었다고 해 두자, 이 표현 수단이 다른 점에서는 지극히 다른 방향으로 진화된 여러 문화에 의해서 보존되어 왔다고 하는 일이 어째서 생겼는가 하는 문제는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

외적인 연관은 전파를 설명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지속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내적 연관뿐이다. 거기에는 전적으로 다른 두 문제의 차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오리 족의 예술과 과이쿨족의 예술 비교에서 하나의 확신이 얻어진다. 두 경우 모두 분할표현은 이 두 문화가 문신을 중요시하는 데서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원주민의 사고 속에는 장식은 얼굴인 것이며 오히려 장식이 얼굴을 만든 것이다. 얼굴에 대해 그의 사회적 존재, 인간적 존엄, 정신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장식인 것이다. 따라서 도안 제작법으로서의 얼굴의 분할 표현은 사실보다 깊고 보다 본질적인 분할을 나타내고 있다. 어리석은 자인 생물학적 개인과 개인이 체현(體現-실현함)하여야 할 사회적 인격의 분할이다. 우리는 분할 표현이 인격 분할의 사회학적 이론과 상관적임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보아즈에 의해 제기된 분할법의 해석에 의하면 채색화 내지 소묘화에 있어서의 분할표현은 삼차원적인 대상물의 경우에 자연스럽게 행하여지는 수법을 평면으로 확장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서안의 예술에서 분할 표현 방법이 쓰여져 온 연속성과 엄밀성을 설명하는 몇 가지의 기본적 요인이 반드시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 기본적 요인을 여기서 고찰되는 네 가지 예술 중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적 요소와 화상(畫像-그림으로 그린 형상)적 요소를 결부시키는, 특수한 관계라고 보고 싶다. 대립적 관계란 장식의 요구가 구조에 부과되어 이를 변화시키며, 거기에 분할과 전위가 생기는 것이며, 상관적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은 대상물이 언제나 소상적이고 화상적인 이중의 국면하에 파악되기 때문이다. 분석과정에서 표현예술과 비표현예술이란 이원론이 다른 이원론에 즉 조각과 묘화, 얼굴과 장식, 개인과 역할, 개별적 존재와 사회적 기능, 공동체와 계층 질서화라고 하는 이원론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아 왔다. 이 이원론은 소상적 표현과 화상적 표현과의 사이에서 상관 관계임과 동시에 분할 표현 원리의 갖가지 표출형태의 참된 공분모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일까? 소상적 요소가 얼굴이나 인체에 의하여 형성되고 또 화상적 요소가 안면 내지 신체에 시술된 장식에 의하여 형성되는 경우 실제로 장식은 얼굴을 위하여 시행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얼굴이란 장식이 시술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얼굴이 그의 사회적 위엄과 그의 상징적 의미를 얻는 것은 장식에 의하여 또 그것을 통해서만 그렇기 때문이다. 이 이원론을 푸는 열쇠는 가면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고찰되고 있는 여러 문화는 실제에 있어 가면 문화이다. 가면의 역할은 상징에서 의미에로, 주술에서 일상으로, 초자연의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라는 이행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갖가지의 중간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가면을 쓰는 일과 가면을 벗는다고 하는 기능을 동시에 다하고 있다. 모든 가면 문화가 분할표현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가면은 나타내고 있는 것과 동시에 가면을 쓰는 것으로 배우는 조상을 체현한다. 가면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계층 질서화를 정당화하는 특권이나 상징이나 위신의 연쇄가 없고 혈통이 우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소상적 요소와 화상적 요소와의 상호 독립성은 사회적 차원과 초자연적 차원과의 보다 유연한 상호 작용에 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분할 표현이 배우의 역할과의 엄밀한 일치나 사회적 서열의 신화나 의례나 혈통과의 엄밀한 합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논문의 결론은 계층 질서화되고, 그 위신 위에 서 있는 여러 사회가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각각 독립하여 나타난 것인지 어떤지, 그들 사회 중 몇 개인가가 무엇인가 공통의 원천을 갖고 있지 않는지 어쩐지를 밝힌다고 하는 문제가 아직도 있다. 개개의 특징이 각각 독립되게 스스로 옮아가 하나의 문화에서 떨어져 다른 문화에 참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양식, 미적 관습, 사회 조직, 정신 생활이 구조적으로 서로 관련되는 유기적 총체의 전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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