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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신화의 구조 20230705 용용이
약 20년이래 약간의 산발적 시도는 있었다 하더라도 인류학은 종교적 제 사실로부터 점점 떨어져간 것으로 생각된다.(196) 우리의 논리학 틀을 넓혀, 우리의 것과는 다른 듯이 보이면서 실은 전적으로 지적인 심적 작업을 동등하게 포섭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197) 종교 민족학의 영역에 속하는 모든 분야 가운데서도 신화학이 유달리 이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신화를 어떻게 간주하든 그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유희나 아니면 조잡한 형태의 철학적 사변으로 환원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갖가지 사회는 가령 그들이 잘못된 해석을 채용한다 하더라도 실증주의적 해석의 가능성을 안 가지는 것은 아니다. (197)
-> 인류학에서 종교민족학은 따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생각되고 심리적인 영역으로 여겨져 지적인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특히나 신화학이 유달리 그렇다. 신화학 역시 실증주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오히려 신화 연구는 우리를 모순된 인식으로 유도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신화 속에서는 일체의 것이 일어날 수 있다. 겉보기에는 거기서는 여러 사건의 계기는 어떠한 논리 또는 연속성의 규칙도 따르지 않는다.(197) 그렇기는 하나 일견 자의적인 이러한 신화는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 있어 같은 여러 특징을 가지며 흔히 세부까지가 같은 채로 재생된다. 거기에서 문제가 나온다. 만약 신화의 내용이 전적으로 우연적이라면 지구의 끝에서 끝까지 어떻게 하였기에 신화는 이토록 서로 닮은 것일까. 신화의 본성에 속하고 있는 이 근본적 이율배반을 의식한다는 조건에서만 그 해결을 바랄 수 있다. (198)
-> 신화를 전적으로 우연적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러 지역에서 신화의 세부 내용까지 같은 채로 재생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신화의 이 근본적 이율배반을 의식한다는 조건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
이 모순은 언어에 관심을 가진 최초의 철학자들이 찾아낸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 기능은 직접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소리가 서로 결합되고 있는 방식에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날까지 이 모순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신화에 관한 최근 이론의 많은 것은 이와 마찬가지의 혼동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198)
-> 신화의 모순 역시 언어학에서 찾아낸 모순에서 출발할 수 있다. 신화는 이야기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결합되고 있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신화를 언어와 비교하는 것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신화는 언어 체계의 불가결한 구성 부분을 이루고 있다. 신화가 인식되는 것은 언어 행위를 통해서이다. 그것은 언설에 속하고 있다. 신화적 사고의 특수한 성격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신화가 언어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 (199)
-> 신화는 언어에 속해 있으면서 언어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신화적 사고의 특수성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방금 언어 체계와 언어 행위를, 양자가 각각 준거하는 시간 체계에 따라 구별하였다. 그런데 신화도 또한 이 두 시간 체계의 여러 특성을 아울러 갖는 하나의 시간 체계에 따라 정의된다. 신화는 “천지 창조 이전” 이라든가, “태초”에라든가, 어쨌든 “옛날, 옛적에” 하는 식으로 언제나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관련된다. 그러나 신화에게 돌려지는 고유의 가치는 어떤 시점에 있어서 전개하는 것과 전개되는 그러한 일이 항상적인 구조도 이룬다는 데에서 온다. 이 구조는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와 관련되는 것이다. (199)
-> 신화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신화를 통해 돌려지는 가치는 과거, 현재, 미래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도달한 잠정적인 모든 귀결을 요약해보자. (1) 신화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 의미는 신화의 구성에 들어오는 개개의 요소가 아니라 신화의 의미가 결부되어 있는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신화는 언어 종류에 속하며 그 구성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는 하나 신화 속에서 쓰이는 언어는 특수한 제 성격을 나타낸다. 이러한 제 성격은 언어 표현의 일반적 수준 위에서밖에는 구할 수 없다. 환언하면 그것들은 다른 무엇인가의 언어 표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 복잡한 성질의 것이다.
-> (1) 신화의 의미는 개개의 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화의 의미가 결부되어 있는 방식에 바탕을 둔다. (2) 신화는 언어에 속하나 언어 외 다른 복잡한 무엇인가이기도 하다.
만일 이 세가지 점을 작업 가설로서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면 매우 중요한 두 귀결이 따른다. (a) 모든 언어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화는 구성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b) 이러한 구성 단위는 언어 구조에 통상 들어 있는 구성 제 단위, 즉 음소, 형태소, 의의소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 고유의 제 요소(그것은 또 전체 중에서 가장 복잡하다)를 대구성 단위라 부를 것이다. (200)
-> 신화는 구성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성단위는 신화 고유의 제 요소이고 우리는 이것을 대구성 단위라 부를 것이다.
어떠한 절차를 밟아 이 대구성 요소 또는 신화소를 분별하고 분리하면 되는 것일까. 위에서 말한 정의는 아직 충분하지 못한 바 그 까닭은 두 가지 있다. 첫째로 구조주의적 언어학자는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모든 구성 단위는 어떠한 수준에서 분리되더라도 관계로 성립되는 것이다. 둘째로서, 방금 제시된 방법은 카드가 줄거리 순으로 번호를 매겨져 있는 이상 여전히 불가역적 시간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주의 사항은 문제의 핵심에 우리를 돌입케 하는 새로운 주의에로 이끈다. 이제 우리는 신화의 참된 구성 단위가 개개의 흐트러진 관계가 아니라 여러 관계의 묶음이라는 것 또 구성의 여러 단위가 의미 기능을 획득하는 것은 이러한 묶음의 결합이라는 모양에 있어서만임을 가정하는 것이다. (201)
-> 신화의 참된 구성단위가 여러 관계의 묶음이라는 것, 이러한 구성단위가 의미 기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묶음의 결합이라는 모양에 의해서 만이라는 것을 주의하자.
신화는 바야흐로, 장난끼어린 호사가가 보표 순으로 일련의 선율로써 모사된 관현악의 총보처럼 다루어지고 그 처음의 배열을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이 행하여질 것이다.(203)
이리하여 우리는 같은 “묶음”에 속하는 몇몇 관계를 각각 마무리하고 있는 네 개의 세로 난을 앞에 하고 있다. (203-204) 같은 난으로 마무리된 관계는 모두 가설에 따라 공통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것을 끄집어 내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204)
-> 오이디푸스 신화의 묶음은 네 개의 세로 난을 앞으로 하고 있다. 각각의 난은 공통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제 4란에 공통되는 특징은 인간의 흙으로부터의 출생의 지속에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제 4란은 제 1란과 제 2란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관계를 제 3란과의 사이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되리라. 이 경우, 관계군을 서로 결부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은 두 모순적 관계가 어느 쪽도 다른 쪽과 마찬가지로 자기 모순적인 한에 있어서는 상호 동질적이라고 하는 긍정에 의하여 극복된다(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대체당한다).(205) 이에 따라 하나의 상관이 뚜렷이 나타난다. 즉 혈연의 과대 평가와 그의 과소 평가와의 관계는 흙으로부터의 출생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려 하는 노력과 그의 성공 불가능성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206)
-> 제 1란과 2란, 제 3란과 제 4란은 서로 모순적 관계에 있으며 어느 쪽도 다른 쪽과 마찬가지로 자기 모순적인 한에 있어서는 상호 동질적이다. 즉 혈연의 과대 평가와 과소평가, 흙으로부터 출생을 부정하려는 노력과 그의 성공 불가능성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여태까지 신화 연구의 진보에 있어 주된 장애를 이루고 있던 어려움, 즉 진정한 또는 원시적인 화형의 탐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반대로 우리는 각 신화를 그의 모든 화형의 총체에 의해 정의할 것을 제창한다. 환언하면 신화는 참으로 신화로서 지각되는 한 어디까지나 신화인 것이다. (206)
-> 이러한 방법(신화소를 분리하여 공통의 특징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원시적인 화형의 탐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리는 각 신화를 모든 화형의 총체에 의해 정의할 것을 제창한다.
이상의 것에서 중요한 귀결이 생긴다. 신화란 그것의 다양성의 총체로 이루어지는 것인 이상 구조 분석은 그들의 전부를 같은 자격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테바이 설화의 이미 알려진 다양성의 연구가 끝나면 더욱 다른 다양성도 또한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질 것이다.(207) 이리하여 각각 하나의 다양성에 할당된 2차원의 표를 많이 얻을 수 있고, 이것들은 각각 병행되는 면으로써 3차원의 전체를 이루도록 늘어 놓여지리라. 이들 표는 결코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들 다양성 사이에서 반드시 관찰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시차적 상위가 서로 유의미한 상관을 나타내고, 그 덕분에 그들 총체는 순차적 단순화에 따른 논리적 조작에 맡겨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신화의 구조 법칙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208)
-> 신화란 다양성의 총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조 분석은 그들의 전부를 같은 자격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다양성의 표를 통해 시차적 상위가 서로 유의미한 상관을 나타내고 이들 총체가 논리적으로 조작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신화의 구조 법칙에 도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째서 많은 일반 신화학의 연구 성과가 낙담을 자아내는 것이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먼저 비교 연구자들은 전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하는 대신에 특권적인 설화를 선택하려 하였다. 다음에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하나의 부족 가운데서 수집된 하나의 신화의 하나의 다양성의 구조 분석은 2차원의 도표가 된다. 그러나 같은 부락 또는 같은 부족에 대하여 같은 신화의 복수의 다양성을 쓰자마자 도표는 3차원이 되고, 비교를 넓히려고 하면 필요한 차원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므로 직관적 수단으로 그것들을 파악하기란 이미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일반 신화학이 너무나도 자주 빠지는 혼란이나 무미건조함은 2차원 내지 3차원의 체계로 끝낼 수 있다고 소박하게 믿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경험적 방법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복잡한 다차원 체계에 적용 가능한 수학적 발상에 따른 기호의 도움 없이는 비교 신화학이 발전할 희망은 거의 없다. (209)
-> 그동안 신화학의 연구 성과가 낙담을 자아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모든 다양성 전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특권적인 설화를 선택하고 이 도표를 바탕으로 비교를 넓히려했기 때문이다.
출현에 관한 즈니 족 신화의 표는 물론 과도하게 단순화된 면은 있으나 후술하는 바와 같은 일반적 양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표를 간단하게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성질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생과 사의 매개를 이루는 데 쓰이는 일종의 논리적 도구인 것이다. (209)
서부 푸에블로 족의 모든 신화에 있어, 문제인 논리적 정형화는 같은 방식이며, 추리의 출발점과 도달점에 애매한 점은 없으며, 양의성은 중간 단계에서 나타난다. (212) 중부와 동부의 푸에블로 족 신화의 어떤 것은 다른 식으로 진행된다. 그것들은 우선 수렵과 농경의 근본적 동일성을 인정한다. (212)
-> 즈니 족 신화, 서부 푸에블로 족 신화, 중부와 동부 푸에블로 족 신화를 분석하고 논리적 정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트릭스타라 불리우고 있는 역할은 오랫동안 수수께끼가 되어 있었다. 이 역할이 코요테나 큰 까마귀에게 돌려지고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약 신화적 사고가 어떤 대립의식에서 출발되어 그의 점차적 매개에로 진행됨을 인정하면 이 선택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그런데 이행 불가능으로 보이는 두 개의 항이 먼저 매개로서 또 다른 하나의 항을 허용하는 그것들과 등가인 두 항에 의하여 대체된다고 가정하자.(214)
이 구조가 암암리에 추리를 대신한다. 죽은 고기를 먹는 동물은 다른 것을 잡아먹는 동물과 같은듯하나(동물을 먹이로 하는 점에서) 또한 식물성 식량의 생산자인 것 같기도 하다(자신이 먹는 것을 안 죽인다). (214)
매개자의 이러한 연쇄는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일련의 논리적 분절을 나타내는 것이며 아메리카 신화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트릭스타에서 볼 수 있는 애매한 양의적 성격은 거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릭스타는 매개를 위한 가능한 유일의 방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215) 트릭스타의 양의적 성격을 거쳐 실제로 신화적 여러 존재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이 설명 가능해진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같은 하나의 신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속해 있는 성질의 이원성, 즉 경우에 따라 때로는 자비롭고 때로는 사악한 신의 그것이다.(216)
-> 아메리카 신화에서 트릭스타는 두 개 항의 매개 역할을 한다. 트릭스타의 양의적 성격을 거쳐 실제로 신화적 여러 존재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이 설명 가능해진다. 신의 이원성이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제 3의 영역, 신화적 사고의 영역에서 끌어 냄으로써 사회 현상에 있어서의 그 참된 역할을 가려내고, 보다 일반적인 사정을 갖는 이론적 해석을 부여하기 위해 더욱 유리한 위치를 얻는다고 기대할 수 있으리라. 최후로 다양성의 완전한 계열을 치환군의 모양으로 배열하는 것에 성공하면 군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기술하는 식이 장차 어떠한 정확화와 수정을 요한다 하더라도 온갖 신화(그 모든 다양성의 총체로 간주되는)가 다음과 같은 형의 표준적 관계로 환원 된다고 하는 것은 이제 기득 성과인 것처럼 생각된다. (217)
이 식에서는 두 개의 항 a와 b 및 이들 항의 두 관수 x와 y가 동시에 부여되고, 항 및 관수의 역전에 의해 각각 정의되는 두 상황이 등가 관계에 있다고 간주된다. 이 경우의 두 가지 조건은, (1) 항의 하나가 그의 반대 (여기서의 표현은 a와 a-1)에 의해 치환 된다는 것, (2) 두 개의 요소 (여기서는 y와 a)에 관하여 관수의 값과 항의 값 사이에는 상관적인 역전이 생기는 것이다.
위의 식의 의미는 프로이트의 경우 노이로제를 구성하는 개인적 신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충격(매우 흔히 믿어지기가 쉬운 것처럼 하나만은 아니다)을 필요로 한다고 함을 상기하는 것으로 완전히 이해되리라. 이들 충격의 분석에 이 식의 적용을 시도함으로서(그것들은 각각 앞서 기술한 조건 1과 2를 만족시킨다고 가정될 것이다) 아마도 신화의 발생 법칙에 의해 보다 정확하고 엄밀한 표현이 성공적으로 부여될 것이다. 더나아가 신화적 사고의 사회학적 및 심리학적 연구를 병행 발전시킨다는 것, 나아가서는 모름지기 신화적 사고를 이른바 실험실에서 다루고 작업 가설을 실험에 의한 검증에 맡길 수조차도 있을 것이다. (218)
-> 신화 발생을 위한 두가지 충격에 이 식의 적용을 시도함으로써 신화의 발생 법칙에 의해 엄밀한 표현이 성공적으로 부여될 것이다. 나아가 신화적 사고를 실험실에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분석적인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본론의 결론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세 가지 주의 사항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첫째로, 신화보다 일반적으로는 구성 문학이 어째서 같은 경과를 두 번, 세 번, 네 번하는 식으로 그토록 자주 되풀이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이 흔히 의문시되었다. 우리의 가설이 받아들여진다면 대답은 용이하다. 되풀이는 신화의 구조를 명료하게 한다는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신화의 성격을 이루는 공시적-통시적 구조는 그의 여러 요소가 공시적으로 읽혀야 할 (우리의 표를 세로 난) 통시적 경과(가로의 행)로 배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신화는 따라서 되풀이 절차 속에서 또한 이에 의하여 표면으로 박편과 같은 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그리고 그것이 둘째 점이지만) 각 박편은 결코 엄밀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만약 신화의 목적이 모순을 풀기 위한 논리적 모델의 제공에 있다(모순이 현실적인 경우에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하나가 앞서의 것과는 조금 다른 박편이 이론상 무한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신화는 그 탄생을 촉진한 지적 충격이 끝날 때까지 나선상으로 발전하리라. 따라서 신화의 성장은 어디까지나 비연속적인 그것의 구조와는 반대로 연속적이다.
마지막 점으로 이른바 “원시적” 심성과 과학적 사고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학자는 양쪽 경우의 인간 정신의 작용 방식의 질적 상위를 논거로 하여 일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정신은 같은 대상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의심을 품지 않았었다.
이제까지 보아 온 것은 이것과는 다른 생각으로 이끄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의 논리는 실증적 사고의 기초를 이루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과히 다르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됐다. 쇠도끼는 돌도끼보다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나 다 “잘 되어 있으나” 쇠는 돌과 같은 것은 아닌 것이다. (219)
-> 3가지 결론에 이른다. 첫째, 신화는 되풀이를 통해 신화의 구조를 명료화 한다. 되풀이 절차 속에서 신화의 성격을 이루는 공시적-통시적 구조의 배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각각의 신화는 엄밀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신화가 모순을 풀기 위한 논리적 모델의 제공에 있다면 신화는 나선상으로 연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셋째, 신화적 사고의 논리는 실증적 사고의 기초를 이루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것이다.
아마 언제인가 우리는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에 있어 작용되는 논리가 기실 동일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잘 생각해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보는 아마-가령 이런 말이 그런 경우에도 아직 적용될 수 있다면-의식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고, 항상적 능력을 부여받은 인류는, 그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씨름해 왔을 것이다. (21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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