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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주술사와 그의 주술
158) 주술의 효과는 주술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한 이 신앙은 상호 보완되는 세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주술사의 술(術)의 효험에 대한 신앙이 있고, 둘째 그가 손을 보아 주는 환자나 그가 못살게 구는 희생자가 주술사. 자신의 능력에 관하여 품는 신앙이 있고, 마지막으로 집단적 세론의 신뢰와 요구가 있다. 이것은 종의 인력이 작용하는 마당을 구성하는 것이며 주술사와 그가 주술을 걸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 마당의 내부에 있어 정의되고 위치지워진다. 주술적 상황은 집단의 합의에 의하여 발생되는 현상인 이상, 만일 비난이 만장일치의 것이라고 하면 주술사는 어떻게 변명에 성공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집단이 예외적인 능력을 인정하고 그것에 걸맞는 특권을 허용하지만 또 집단에 대하여 주어진 특권에 걸맞는 만족을 주기를 또한 요구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집단의 태도 속에는 믿음과 비판과가 각각 어떠한 비률로 개재(介在-사이에 끼어 있음)하고 있는 것이겠는가, 이 마지막 점부터 검토를 시작하기로 한다.
161) 난비고라 족의 주술사의 실종사건은 주술사에게 어떻든 부재의 구실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며, 번개 사건이나 이에 뒤따르는 연출은 이러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른 해석은 개인의 의식에 따라 객관적 분석 끝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있어 경험적 성격을 지니는 설익은 태도가 요구하는 보완적 자료로서 구하여 진다. 이러한 경험은 집단의 문화속에 부동하는 특정한 도식과 동화에 의해서 주관적 상태를 대상화하는 것,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을 말로 나타내는 것, 분절(分節)될 수 없는 경험을 체계로 통합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162) 뉴멕시코의 즈리 족 관찰에서 분명해진다. 163) 주술을 추궁받고 그 때문에 사형당할 뻔하였던 피고가 해명으로 석방되지 못했고, 무고한 죄를 떠맡음으로써 방면되었다는 점에서, 논의는 우리의 재판처럼 고발과 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술과 상세의 명시에 의하여 진행된다. 재판관은 피고가 논고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사실의 반증을 들거나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단편밖에 갖고 있는 않는 체계를 강화하도록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나머지 부분을 적절한 방식으로 그가 재구성하기를 바라고 있다. 재판관들은 범죄를 처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체계의 실재성의 증시(證示-증명으로 내보임)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164) 자백은 재판관들의 참가뿐만 아니라 가담에 의해서조차 힘을 얻어 피고를 죄인에서 고발의 협력자로까지 변모시킨다. 그의 덕분으로 주술과 그에 결부된 여러 관념은 뚜렷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감정과 표상의 막막한 집합체로서 의식 속에서 무거운 멍에가 되어가며,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경험의 존재로서의 구체적인 모양을 획득한다.
164) 항변이란 교묘함 뿐일 것인가. 모든 것은 극적인 연출에 지나친 것이 아니라 정열을 다하여 참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그를 주술사라고 선언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는 그에게 주술사여야 할 사명을 계시하는 증거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일까. 증거는 계집애의 경련속에 현존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도 체계의 긴밀성과 그것의 확립을 위해 그에게 할당된 역할은 그가 이 모험 속에서 걸고 있는 자기 생명의 안전에 뒤지지 않는 본질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책략과 선의를 섞어가며 그에게 부과된 역할을 차차 스스로 쌓아 올려가고 있음이 인지된다. 대부분 그의 지식과 기억이 원천이며, 즉흥도 있으나 그 중에서도 그 역할을 하고 스스로 줄거리를 쓴 조작과 닥치는 대로 재료를 주워 모아 만들어 낸 의식(儀式-예식) 속에서, 적어도 가능성으로는 누구의 것이든 될 수 있는 사명을 자기의 것으로서 경험하는 일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얘기해 감에 따라 더욱 깊이 그의 주제에 빠져 들어갔다. 때로 그의 얼굴은 청중을 정복한 데서 오는 만족감에 빛나고 있었다.”
165) 주술사가 되기 위한 비전을 받은 그(케사리드)의 이야기로는 무언극과 기술과 경험적 지식의 해괴한 혼합이었다. 실신(失神)을 가장하는 술, 히스테리 발작의 흉내, 주술가의 습득, 스스로 게우는 기술, 청진이나 조산술에 관한 꾀나 적확한 개념, 꿈꾸는 사람이라 불리는 스파이의 이용법 등등이다. 그의 임무는 사적인 대화를 훔쳐 듣고 누군가가 걸려 있는 병의 원인이나 증후에 관하여 얼마만큼이라도 몰래 정보를 샤면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샤만의 혐의가 확인했지만, 케사리드는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샤만에게 솜털의 작운 뭉치를 입속에 숨겨두고 제때에 이것에 피를 묻혀 뱉어낸 다음 환자의 몸에서 쫓겨난 병원체라고 하는 사용법인 술(術)을 구현해 대샤만으로 유명해진다. 인근 부족 코스키모 족의 샤만은 자기 손에 약간의 침을 뱉고 “이것이 병이다”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성과를 올리는 데 다른 쪽은 허탕이다. (167)그것은 어느 것이나 불완전하지만, 비교하면 상이한 가치를 제공한다. 그것들은 어떠한 기준 체계에 의하여 판정되는 것인가.
(169) 그(케사리드)는 두 가지의 자료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병상에는 원인이 있어서 그 원인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단에서 치유에 이르는 병의 여러 가지 양상을 질서 지우는 해석 체계가 있고 그 속에서는 개인의 창의가 커다란 역할을 연출한다. 그것 자체에 있어서는 알 수 없는 현실을 일련의 수순(手順)과 표상을 써서 얘기로써 나타낸 이 줄거리의 맞고 그름은 삼중의 경험에 달려 있다. 하나는 샤먼 자신의 경험이고, 다음은 환자의 그것으로 환자는 낫는 쪽을 향하고 있음을 느끼든가 또는 느끼지 않든가 한다. 마지막에는 공중의 그것이 있다. 공중도 치료에 참여한다. 그들이 얼마만큼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며 얼마만큼이나 그 일에서 지적 및 정서적 만족을 얻느냐에 의하여 새만에 대한 집단적 귀의(歸依)의 정도가 결정된다. 샤마니즘을 구성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한쪽의 극은 샤만의 내적 경험에서, 다른 쪽은 집단의 합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술사 또한 그들의 사명을 믿고 있으며, 특수한 여러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170) 간접적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풍부하다는 언어학적 논거도 있다. 캘리포니아의 윈토 족의 방언에는 다섯 가지 동사의법이 있어 각각 시각, 신체적 지각, 추리, 논증 및 소문에 의한 지식에 대응한다. 이들은 다섯 가지가 다 지식의 범주를 구성하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억측과 대립하고 있다. 매우 기묘한 것은 초자연계와의 관계는 지식의 법, 그 중에 신체적 지각의 법, 추리 및 논증의 법에 의하여 표현된다. 따라서 정신적 위기를 거쳐 샤만이 되는 원주민은 문법적으로는 그의 상태를 사실에서 추리하여야 할 결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직접경험으로 표현되는 사실이란, 그가 정령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고, 이 사실에서 그가 피안에로 여행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연역적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그가 여행 끝에 다시 동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사실에서 분명한 것이다.
171) 케사리드의 대항자들이 괴멸한 이유는 집단의 태도 속에서 구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의 소멸이며 이것은 그들을 희생으로 하여 다른 전문가와 다른 체계의 주위에 재건된 것이다. 따라서 근본 문제는 개인과 집단, 보다 정확하게는 어떤 형의 개인과 집단의 어떤 종류의 요구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171) 샤만은 몇 가지 일의 재생이나 모방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말을 빌려 한다면, 그를 소산(消散-흩어져 사라짐)시켰다고 할 수 있다. 샤만은 직업적 소산자인 것이다. 대체로 모든 비과학적인 시야에서 보면 172) 병적인 사고와 정상적인 사고는 대립하는 일없이 서로 보충하고 있다. 언어학자의 말을 빌자면 정상적인 사고는 언제나 의미지어지는 것의 결여를 고민하는데 대해 병적인 사고는 의미한는 것의 과다를 이용한다. 샤만에 의한 치료에의 집단의 협동은 이 상보적인 두 상황 사이의 조정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집단의 전통과 개인적 창의의 협동에 의하여 하나의 구조 즉 대립과 상관의 체계가 이루어져, 끊임없이 자기 수정하는 일이 필요하고, 이 체계는 주술사도 환자도, 공중도, 치료에 쓰이는 표상이나 수법도, 모두 그 속에 장소를 찾는, 전체적인 상황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172) 정서나 표상처럼 혼란된 미조직의 여러 상태를 객관적 원인에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 또는 체계의 모양으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고, 체계는 이것들이 확산된 상태의 침전과 응집을 가능하게 하는 한에서 유효하다. 이 최후의 현상은 밖으로 파악할 수 없는 본원적 경험에 의하여 의식에 증시된다. 주술사-환자라고 하는 쌍은 그 상보적 무질서 덕분에 모든 사고에 고유하기는 하나, 그 표현은 막연하게 불명확한 대립을 집단에 대하여 구체적인 산 모양으로 구현하고 있다. 환자는 수동성, 자기소외이고, 정감성은 상징의 양모이므로 주술사는 능동성, 자기의 횡일(橫溢)이다. 치료는 대립하는 이 양극을 관계지우고 하나에서 타(他)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고, 그 자체가 사회적 우주의 투사인 심리적 우주의 수미 일관성을 한 개의 전체적 경험 속에 표시한다.
173) 소산(消散흩어져 사라짐)이라는 개념을, 재발견한 정신분석과는 다른 심리 요법 속에서, 확장할 필요를 느끼는데, 정신 분석에서 소산은 하나밖에 없으며, 정신분석에서는 환자가 말하고 듣고 있는 의사를 향하여 소산을 행하지만, 샤만의 치료에서는 주술사가 말하고 잠자코 있는 환자를 위하여 소산을 행한다. 두 기술이 집단에게 주는 역할은, 주술은 환자를 통해 미리 정의된 문제에 집단을 재적응시키는 데 대해, 정신분석은 도입되는 해결을 통해 환자를 집단에게 재적응시킨다.
174) 우리는 주술적 행위 속에 감정적 발현을 통하여 의식에 제시되지만, 그 깊은 본성은 지적인 것의 상황에의 반응을 보아야 한다. 이 상징 기능의 역사만이 인간이 이 지적조건의 설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적조건이란 우주는 결코 충분하게 의미하는 바가 없으며 사고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의 수에 대하여 언제나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다. 의미하는 것과 의미 되는 것과의 이 두 가지 준거체계 사이로 나누어진 인간은 주술적 사고에 대하여 그때까지 모순돼 있던 자료가 그 내부에 통합될 수 있을만한 새로운 준거 체계를 부여해주도록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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