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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레포트는 교원대 석사과정의 김환희가 <한국현대시론> 과제로 작성한 원고이므로, 재인용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1.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 – 정효구
정효구에 따르면 비유는 ‘주인을 나르는 수레바퀴’와 같다. 비유는 ‘a는 b이다’로 구성되는 언어 형식이다. 그리고 시학계에서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a를 원관념 혹은 취의라 칭하고, 후자인 b를 보조관념 또는 매재라고 칭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취의와 매재라는 말은 각각 영어의 tenor와 vehicle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번역도 무방하지만 이 tenor와 vehicle을 주인과 수레바퀴라고 의역하면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정효구는 주장한다. 요컨대 “b는 a를 나르는 바퀴요, a는 b에 의지해 목적지로 가고자 하는 주인”이라는 것이다. 영어사전을 살펴보면 tenor는 테너가수라는 뜻 외에 취지, 대의라는 표현이 있고, vehicle은 탈것, 운송수단 외에 수단, 매개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효구의 이와 같은 의역이 비유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주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노예를 자동적으로 연상하게 돼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비유가 관련이 있는 것인가 하며, 무의식적으로 노예에 해당하는 항을 찾게 된다. 그런 점에서 굳이 주인이라는 의역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냥 tenor의 원뜻 그대로 ‘취지’나, ‘대의’로 번역했으면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정효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비유적인 표현을 만날 때, 새롭지만 불편하다는 이중 감정을 갖게 된다.” 사전적, 상식적 언어 너머를 만나는 데서 오는 새로움과 사전적, 상식적 언어로 해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유는 약이면서 독이다. 사전적, 상식적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a의 진실을 비유는 해결해주면서, 그 대가로 a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a에 대한 사람들의 사유에 혼란을 준다.” 비유가 주는 정동에는 새롭다는 부분도 있지만, 불편하고 혼란스럽다는 지점을 잘 포착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정효구는 상징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그에 따르면 ‘효율적인 관상’이다. “상징은 어떤 존재 안에 들어 있는 상을 읽는 행위이다. 이것을 가리켜 ‘관상’이라고 불러본다면 상징은 ‘상’을 ‘관’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나무에서 지조라는 상을, 태극기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상을 읽어냄으로써 상징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정구에 따르면 “상은 우리가 제 아무리 잘 읽으려 해도 인간적 속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상징은 ‘방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방편을 절대화할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살불살조’를 가르친다.
이것은 모두 상징에 결박되어 존재의 진실을 보지 못하기 쉬운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상징은 그야말로 하나의 방편일 뿐, 상징이 절대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징은 인간들의 삶 전반에서 두루 사용되지만, 그 사용 방식은 언어의 경제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정효구는 상징을 ‘효율적인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는 때로 관습적 상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개인적 상징 혹은 창조적 상징을 사용한다. 관습적 상징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면 대부분 그 함의(원관념)를 아는 경우이다. 그러나 개인적 상징과 창조적 상징은 시인 자신만의 독립된 정부 속에서 기능하고 탄생하는 것이므로 그 함의(원관념)의 공유가 쉽지 않다. 따라서 정효구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서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얼마나 자유롭게 인연의 장을 만들어 ‘무상의 흐름’ 속에 참여하는지를 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열린 상징들 앞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익힌다.”는 것이다. 즉, 시인이 그의 시에서 상징의 함의를 특정한 것으로 고집하거나 그에 대한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시인들이 사용하는 시 속의 독자적 상징 앞에서 사람들은 한없이 자유로워지고 너그러워진다.” 비유가 참신하지만, 불편한 불안정성을 띠고 있다면, 상징은 자유로움의 정동을 만든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효구의 책은 비유와 상징이 어떤 정동적 효과를 가지고 오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유의 구체적 구분들, 예를 들어 직유와 은유의 차이, 환유와 제유의 차이를 알고 싶었는데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준 책이 ‘새로 쓰는 현대시 교육론’이었다.
2. 새로 쓰는 현대시 교육론 – 박수연 외
‘새로 쓰는 현대시 교육론’에 의하면 비유는 시적 동일성이 무엇보다 서로 다른 대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 때문에 성립된다. 그러나 시적 동일성은 유사성의 발견에만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대상들의 이질성과 유사성이 통합되었을 때 탄생하는 새로운 세계 및 의미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즉 시적 동일성이 개인의 정서와 개성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분산된 온갖 만상에 일정한 질서와 체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결속과 통합의 원리로 이해된다. 시적 동일성의 추구가 세계에 대한 감각적 활동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재배치하는 지적 활동으로 간주되는 이유이다.” 이 책에 따르면 비유와 상징, 알레고리는 “서정시 특유의 동일성, 다시 말해 자아와 세계의 통합을 실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들이다.” 비유는 서로 다른 대상과 대상,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그 대상들의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발견하고 통합한다. 그리고 비유의 방법은 대상들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직유와 은유, 유사성을 전제로 한 대상으로 대체하거나 치환하는 환유와 제유로 크게 구분된다.
이제 이 책에서 설명하는 비유의 뜻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비유의 원어 metaphor는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왔으며, 초월 또는 변화를 뜻하는 ‘meta’와 운반 또는 이동을 뜻하는 ‘phora’가 합쳐진 말이다. 정효구가 앞에서 비유를 ‘주인을 나르는 수레바퀴’라고 표현했는데, 원어 metaphor 자체에 운송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의 원리를 “한 명칭이 (일상적으로 지시하는 바에서 다른 대상으로) 전환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비유법은 흔히 ‘A는 B이다’라는 공식으로 표현되는데 원관념(A)는 보조 관념(B)을 통해 그 의미와 정서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 공식은 A와 B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의미 탐색과 그것들의 결합 작용을 모두 포괄한다. 이 책에 따르면, 비유의 핵심은, 그것이 종종 ‘의미의 동작’으로 정의되는 데에서 보듯이, 유사성의 발견이 아니라 그를 통한 새로운 의미의 발굴과 변환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성은, 비유는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한다거나, 비유는 현실의 복잡성을 관조하는 성숙한 마음의 운동이라는 말의 근거로 작용한다.
1) 직유와 은유
직유는 원관념(A)과 보조관념(B)이 ‘~와 같이’, ‘~처럼’,‘~듯이’로 매개되는 장면에서 보듯이, A와 B는 쉽게 비교될 법한 유사성을 공유해야 한다. 어원에 변환을 포함하는 은유와 달리 직유(silile)의 어원이 ‘비슷함(similar)’에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직유는 보조관념의 특질이 원관념의 형상과 의미를 대체로 지시하고 규정한다. 이는 원관념의 표현에 가장 적합한 보조관념을 선택할 때 직유의 효과가 극대화됨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에 대해 폭넓은 관찰과 예리한 포착이 반드시 필요하다.
은유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metaphor를 어원으로 취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유사성 표현에 집중하는 직유와 달리, 은유는 양자의 비교를 통한 새로운 의미의 탐색과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은유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전이의 폭과 정도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친밀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의미론적 이동에 초점을 맞추는 은유이다.(치환은유) 다른 하나는 서로 낯선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병치와 합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은유이다.(병치은유) 정효구가 앞서 비유를 참심함과 불편함의 정동을 초래한다고 이야기 했다면, 이 책은 비유의 여러 종류를 구분하고 그 중에서도 은유를 두 종류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 새로우면서 불편함의 감정이 ‘유사함 속의 낯설음’에서 유발된다면, 여기에서 유사함에 초점을 둔 이동이 치환은유이고, 낯섦음에 중점을 둔 은유가 병치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비유의 방법과 작용으로 은유를 양분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좋은 은유는 새로운 의미를 암시하는 힘(치환)과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는 능력(병치)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다.
2) 환유와 제유
은유와 비교되는 비유 방법으로 대유법이 있는데, 환유와 제유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다. 은유와 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포괄하며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와 의미를 조형하는 방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은유와 대유는 비교의 방법에서 유의미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닮음’, 다시 말해 말 그대로의 유사성의 발견과 선택에 바탕을 둔다. 닮은꼴의 발견을 목적하는 만큼 이질적인 A와 B는 동일 공간 내부에 존재한다.
이에 비해 대유는 ‘대신 비유하다’라는 한자어에서 보듯이, 원관념을 공간적, 논리적으로 인접한 보조 관념으로 대체하여 표현한다. 여기서 대유를 인접성의 원리로 정의하는 어법이 출현한다. 그 원리적 핵심은 공간과 논리의 거리에 맞게끔 대상을 배열, 조합하는 작업이 된다.
대유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환유와 제유의 원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환유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어떤 대상의 속성이나 특질을 이용하여 그 대상을 재현하고 가치화하는 비유법이다. 예컨대 한국 정부의 정견 발표를 “청와대에서 연두 기자 회견을 갖는다”로, 몹시 곤란한 일에 연루되는 사태를 두고 “독배를 들었다”로 비유하는 경우가 그렇다.
환유의 원관념(피대체물)과 보조관념(대체물) 사이에는 공통의 의미소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 대상은 그것들을 감싸는 실용적인 동기와 사회적 문맥에 의해 의미의 관계가 결속된다. 그런 까닭에 특히 보조 관념은 사회적으로 어떤 생략과 비약을 허용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연상과 정확한 의미를 자동적으로 환기시키는 구체성이나 사실성을 필요로 한다.
제유는 부분으로 전체를,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거나 대치하는 비유법이다. 전체와 부분 사이의 포괄/종속 관계는 제유의 두 대상이 등위적인 위치를 갖지 않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제유는 구조적 사고의 결과로 출현하는 것으로 오해된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은 국토를 환기하고, 널리 통용되는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구호에서 ‘빵’은 식량을 뜻한다. 환유와 마찬가지로 제유에도 원관념을 떠올릴 수 있는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실마리나 유추의 맥락이 숨어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169) 은유는 주관적이며 외부 실재와 동떨어진 비세속적이며 신비적인 성격을 내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은유가 주체의 욕망과 이념에 맞게 대상을 폭력적이며 자의적으로 통합한다는 비판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이에 비해 환유는 특정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연상을 기초로 의미를 생산한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실제 상황을 기초로 대상끼리의 연관 관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환유가 외부 실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거나, 모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그 원리를 밝혀내는 사실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의 탈식민주의 이론이나 해체주의 이론은 이를 바탕으로 은유와 환유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유사성의 원리에 기초한 은유는 대상들의 차이성과 개별성을 없애 버리는 반면, 어떤 본질적인 것에 연관된 보편성과 일반성을 내세운다. 이러한 속성은 선진 문명과 힘을 바탕으로 식민지의 전통과 개성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와 꽤나 상통한다. 그에 반해 환유는 대체로 현실의 실재를 지칭하거나 우발적이며 불확실한 것을 포착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실재와 우연은 가상의 보편적 법칙보다 역사 현실에 대한 구체적 성찰에서 발견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유는 세계 인식과 그 표현에서 사실성과 차이성, 타자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내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는, 레비스트로스를 잇는 현대 인류학자인 카스트루는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토테미즘을 은유로, 희생을 환유적이라고 이야기한다. 토테미즘이 자연적 계열과 문화적 계열의 상응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면, 희생은 신성과 인간이 인접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은유는 불연속적이고 환유는 연속적이다. 은유는 방향성이 없기에 두 항이 완전히 등가적이고 서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면, 희생은 연속적인 하나의 계열에 있는 항이 인접한 다른 항을 대체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불가역적이다.
3. <시론> - 박현수
참고도서 중에 마지막으로 읽어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으로 앞선 책들의 설명과 중첩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은유와 환유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해상도 높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박현수에 따르면, 은유에서 비유기표와 비유기의는 각각 어떤 범주 감각으로도 연계시키기 힘든 이질적인 차원에 속하며, 그것은 주로 현실과 현실 너머 차원의 겹침이라는 점에서 다차원적 수사학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환유는 철저하게 현실이라는 단일 차원에서만 작동된다는 점에서 일차원적 수사학이라 부를 만 하다.
1) 초월의 수사학, 은유
은유(metaphor)는 비유의 하위 개념이면서 동시에 모든 비유의 대표 자격을 지닌 무늬로서, 수사학을 넘어서서 “사고의 무소부재한 원리”로까지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비유이다. 하지만 예부터, 은유에 내재하는 유사성은 아무나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에 능한 것을 ‘천재의 표징’으로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은 현실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두 차원의 세계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내적 연관성’ 혹은 ‘필연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은유는 초월의 수사학으로 지칭된다. 예를 들어 서정주의 ‘동천’에서 지상(눈썹)과 천상(초승달)은 화자의 이식 행위(옮겨 심음)을 통해 순식간에 은유적 총체화의 세계에 도달한다. 이식 행위를 통해 단절된 두 세계의 거리는 ‘어두운 밤을 비추는 일순의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극복되어 두 세계는 즉시성의 소통 상태, 즉 은유적 초월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한편 박현수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 중 후자를 다음과 같이 ‘절대은유’라고 지칭한다. 은유의 초월성을 극대화한 특성을 잘 뽑아냈다는 점에서, 이해를 돕는 참신한 명명이라 느껴졌다.
휠라이트는 은유를 치환은유, 병치은유로 나누기도 한다. 치환은유는 전통적인 의미의 은유로,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대체하는 은유이며, 병치은유는 “병치와 합성에 의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은유를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자는 ‘절대은유’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 <시론>, 박현수 p338 중
박현수에 따르면, 이와 같은 병치는 치환은유가 가져다주는 서정적 안정감 대신, 심상의 충돌에 의한 인식론적 당혹감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당혹감은 여러 의미 층의 현격한 거리를 순간적으로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쾌감을 준다. 병치은유의 이런 ‘뛰어넘음’도 초월적 감각의 일면인 것이다.
2) 현실원리의 수사학, 환유
환유(metonymy)는 하나의 대상을 그 대상과 연계된, 즉 인접되어 있는 다른 대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환유는 우리 삶이 펼쳐지는 현실적 차원 내에서 비유기표와 비유기의의 관계를 설정한다. 따라서 환유는 범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지향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활용하는 수사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환유가 은유에 비하여 창조적이지 않다고 과소평가를 받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백악관과 미국대통령, 왕과 왕관, 가죽과 구두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의 다양성만큼 환유적 관계의 다양성도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총칭하는 데 ‘인접성’이란 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어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환유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환유의 우연성 때문이다. 은유가 근원적으로 주어진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은유에서 비유기의와 비유기표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그에 반하여 환유에서 그 관계는 현실적으로 형성된 우연에 크게 빚지고 있다.
앞서 내가 다시 살펴보고 싶다고 한 부분이 다시 나왔다. 즉, 저자는 은유가 논리적 유사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비슷하게 유추할 수 있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면, 환유는 논리적 필연적인 연결고리가 없이 우연적으로 현실에서 관계 맺어졌다면 비유로 이용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은유를 필연성과 환유를 우연성과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은 환유의 우연성을 강조한 라캉까지 이어지는데, 라캉은 내가 관심을 갖고 추적하고 있는 구조주의 사상가이기에 더 몰입하며 다음 구절을 읽게 되었다.
이처럼 환유는 현실원리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비유기표와 비유기의의 관계는 내적 필연성이 아니라 외적 우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철저하게 경험의 세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경험의 우연성, 일시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환유의 우연성을 강조하여 기의의 불확정성, 즉 기표의 미끄러짐을 강조한 사람은 라캉이다. 그는 <에크리>에서 환유 공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시론>, 박현수 p341 중
환유 공식은 기표들(S와 S’사이의 무한한 기표들)이 기의(s)에 가닿지 못하고 영원히 미끄러져 가는 상황을 나타낸다. 말줄임표는 기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기표의 무한한 미끄러짐을 표현한 것이다. 환유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대체, 즉 단어와 단어의 대체가 끝없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욕망의 과정과 유사하다. 라캉이 환유를 욕망이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박현수는 서정주의 시 ‘신발’을 라캉의 환유를 설명하기 위해 소환한다. 즉, ‘진정한’ 신발에 대한 갈망으로 대용품 신발들을 계속 사는 행위가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의 공식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f(새 신발.....새 신발‘)≅새 신발(-)잃어버린 신발
<시론>에 따르면, 유안진의 ‘다보탑을 줍다’도 욕망의 환유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즉, 시인은 진정한 다보탑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대용품을 무수하게 추구하지만, 그때마다 기표들은 미끄러져 갈 것이고 그 욕망은 계속 데리다의 의미에서 ‘차연’되는 것이다. 이처럼 환유의 우연성, 그로부터 파생되는 기의의 불확정성과 기표의 미끄러짐은 언어 표현상으로 심상의 충돌, 의미 단절과 통사적 해체 등으로 나타난다. 주어와 목적어 등이 생략되고 단어들만 나열되는 이런 작품들에서 환유는 비유기표와 비유기의의 구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한 상태로 나타난다. 근래에 이런 수사학이 우리 문학의 대세가 되어 가는 현상은 흔히 탈근대의 징후로 읽힌다고 박현수는 지적한다. 이런 증상적 현상이 환유의 세계관과 현대의 시대정신이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님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상상력의 결핍으로 평가받던 환유가 왜 이제 시대정신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탈근대의 수사학으로 신분 상승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박현수의 <시론>을 읽고 이해하게 되었다.
4. 추가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 질 들뢰즈
이 책은 교수님께서 과제로 내주신 참고도서 목록에는 없었지만, 내가 읽던 중 은유와 환유에 대해서 박현수가 말하고 있는 탈근대적 시대정신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어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주자인 들뢰즈의 관련 대목을 요약하여 인용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사실 철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사가인데, 이 책은 들뢰즈가 철학사가의 면모를 잘 발휘한 22편의 논문들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 중 15번째 챕터로 나열된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에 관한 대목이다.
은유와 환유는 무엇보다 구조적인 요인들이다. 더 나아가 은유와 환유는, 그들 자신이 한 계열에서 다른 한 계열로 나아가는 자리 옮김(은유)과 한 계열에서 계열 자신의 내부로 나아가는 자리 옮김(환유)이라는, 자리 옮김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 두 정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심지어는 구조적인 두 요인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 자체가 이처럼 상상적인 것과 무관하기 때문에, 은유와 환유는 그들 자신이 활기를 주는 계열들로 하여금 그들의 항들을 상상의 방식으로 혼동하거나 둘로 쪼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구조 속의 자리의 일부를 이루는 상대적인 자리 옮김, 바로 이 상대적인 자리 옮김이란 과연 무엇인가?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들뢰즈 p400 중
여기서 들뢰즈는 라캉이 언급하는 재밌는 이야기인 <도둑맞은 편지> 그리고, 프로이트의 <쥐인간>, 마지막으로 구조인류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레비스트로스의 예시를 들고 있다.
무엇이 조직되고 구성되는 두 계열로 하여금 서로를 단순하게 반영하지 못하도록 하며, 또 두 계열의 각 항 하나하나를 서로 간에 동일화하지 못하도록 하는가? 만약 계열들의 상호 반영과 항들의 상호 동일화를 막지 못한다면 구조 집단은 다시 상상의 형상이라는 상태 속으로 떨어지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겉으로만 보면 각 계열의 항들은, 실제, 그들 자체를 놓고 볼 때, 그들이 다른 계열의 항들과 관련하여 겪게 되는 상대적인 변경과 자리 옮김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각 계열의 항들은 차등적인 관계들의 변화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도둑맞은 편지의 경우를 보면 두 번째 계열 속의 장관은 첫 번째 계열 속의 왕비가 취했던 자리를 취하며, <쥐 인간>의 자식 계열 속에서 가난한 여인은 빚과 관련하여서 친구의 자리를 취한다. 또 레비스크로스가 인용한 바 있었던 새들과 쌍둥이들로 구성된 토템의 이중 계열을 보면, “하늘의 인물들”인 쌍둥이들은 땅의 인물들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하늘의 새들의 자리가 아니라 “땅의 새들”의 자리를 취한다. 하지만 두 계열 간에 이루어지는 이 같은 상대적인 자리 옮김은 결코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한 항에 상상적인 꾸밈을 부여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이차적으로 그 항에 영향을 주러 오는 자리 옮김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이 자리 옮김은 고유하게 구조적이거나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이 자리 옮김은 본질적으로 구조라는 공간 속의 자리들에 관계된 옮김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은 자리들을 이차적으로 점유하는 존재들과 대상들의 상상적인 모든 꾸밈을 지배하는 옮김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가 고유하게 구조적인 자리 옮김을 설명하는 은유와 환유에 그토록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은유와 환유는 결코 상상의 형상들이 아니다.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들뢰즈 p398-399 중
이 대목을 보면 마치 우리가 은유와 환유를 설명하기 위해 구분지었던 굳건한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논리적 우연성을 띠고 있는 환유가 외부로부터, 이차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더불어 은유와 환유 모두 본질적인 구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상의 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들뢰즈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앞선 문단(p400)에서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책의 역자 박정태에 따르면, 구조언어학은 음소이론, 기호이론과 더불어 언어 구조의 파악과 관련된 새로운 틀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구조언어학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사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선택과 결합이라는 두 개의 작용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먼저 선택작용이란 가능한 여러 단어 중에서 한 단어를 뽑는 것, 또는 뽑힌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때 대체 가능한 단어들은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선택의 축은 각 단어가 유사성의 정도를 따라 수직으로 배열된 세로축을 형성하게 되며, 선택작용은 바로 이 세로축을 따라 배열된 동의어와 반의어의 영역에서 단어를 뽑거나 대체한다. (예: 위의 표1에서 a의 위치에 오는 비행기, 철로 만든 새, 큰 새) 다음으로 결합 작용이란 보다 크고 복잡한 언어단위가 이루어지도록(단어->문장->진술)하기 위해 선택의 축들에서 선택된 단어들을 일정한 규칙을 따라 배열하고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선택의 축과 반대로 결합의 축에서는 결합된 단어들이 수평적인 공간, 즉 가로축 위에 배열된다. 왜냐하면 결합의 축 위에 배열된 단어들은 (원인과 결과의 인접성, 기능상의 인접성, 부분과 전체의 인접성, 용도상의 인접성, 위치상의 인접성 등) 다양한 의미의 인접성을 통해 결합되기 때문이다. 결합의 축의 단어들은 인접성을 바탕으로 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비행기가 하늘을 난다(abc)”에서 “하늘(b)”을 생략해도 “비행기(a)”와 “난다(c)”간의 인접성으로 인해 “비행기가 난다(ac)”라는 식의 의미 전달이 여전히 가능하다. 물론 이때 결합의 축의 각 단어는 선택의 축에 있는 다른 단어들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가 있다. (예: abc, a’bc, a“bc, ab’c, ab”c,a’b“c” 등) 야콥슨에 따르면 선택 작용은 체계로서의 언어(랑그) 쪽에, 결합 작용은 언어 사용(파롤) 쪽에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결국 이 두 작용은 일반적인 담론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언어 전체를 구조적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구분한다. 특히 야콥슨은 유사성에 따른 선택 작용 또는 새로축을 은유로, 인접성에 따른 결합작용 또는 가로축을 환유로 불렀다.
현대 언어학에 따르면 수사학적 비유법으로서의 은유란 유사성을 바탕으로 연관된 기표들 간의 대체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한 대상이 은유를 통해 유사 관계가 있는 다른 대상의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입”은 “동굴”을 나타낼 수 있으며 “심장”은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다음으로 수사학적 비유법으로서의 환유란 인접성 또는 문맥상의 연관 관계를 따라 기표들이 대체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30개의 돛”처럼 부분(돛)으로 전체(배)를 나타내는 인접성, “보르도, 상파뉴”처럼 물건(포도주, 샴페인)이 만들어진 장소의 이름으로 그 물건 자체를 나타내는 인접성, “나는 그 컵을 마셨다”처럼 그릇으로 내용물을 나타내는 인접성, “그는 노동으로 먹고산다”처럼 원인(노동)으로 결과(노동의 대가)를 나타내는 인접성 등이 환유의 전형적인 경우들에 해당한다.
5. 은유와 환유 - 김욱동
앞서 다양한 책을 통해서, 은유와 환유, 제유 등을 공부하였는데,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 구분이 무 자르듯 명확하지 않고 발화주체의 복합적인 발화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오랫동안 기호학회에서 연구해온 김욱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어떤 비유는 은유로 보아야 할지 환유로 보아야 할지 그 경계선이 모호하고 예매하여 딱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가령 <검은색 모자는 악>이라는 문장은 얼마든지 은유로 볼 수도 있고 환유로 볼 수도 있다.” 즉, 검은색 모자와 범법자가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검은색 모자와 악은 은유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은유의 성격과 함께 환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비유를 두고 이론가 Louis Goossens는 아예 <은환유>(메타프토노미)라는 용어로 부른다. 은유도 아닌 환유도 아닌 말하자면 혼혈아와 같은 비유라는 것이다. 이 이론가에 따르면 혼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은유가 있는가 하면, 은유 속에 들어 있는 환유나 이와는 반대로 환유 속에 들어 있는 은유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환유에서 오는 은유는 많지만 이와는 반대로 은유에서 오는 환유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왜일까?
왜냐하면 서로 다른 의미 영역이나 개념 영역에서 일어나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어디까지나 같은 의미 영역이나 개념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알것 같았던 은유와 환유의 구분이 다시 아리송해졌다. 환유의 개념과 성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갈라져나온 그 어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유를 뜻하는 영어 <미토노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미토노미아>라는 그리스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는 다름아닌 <이름을 바꾼다>는 뜻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환유란 어떤 대상이나 관념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대치하는 수사법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환유라고 할 때의 그 환(換)자도 <교환>이나 <환전>이라고 할 때처럼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교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의 성격을 새롭게 밝혀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은유와 환유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어린아이의 실어증을 연구하면서부터이다. 실어증에 걸린 아이는 선택과 결합 가운데에서 어느 한쪽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떤 아이는 여러 언어 항목 가운데에서 한 말을 다른 말로 바꾸는 능력이 없는가 하면, 다른 아이는 선택한 항목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결합하는 능력이 없다. 야콥슨은 앞의 현상을 두고 <유사성 장애>라고 불렀고, 뒤의 현상을 두고 <인접성 장애>라고 불렀다. 유사성 장애가 일어나는 아이에게서는 환유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반면, 인접성 장애를 겪는 아이에게서는 은유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 점 관하여 “은유는 유사성 장애에서는 낯설고, 환유는 인접성 장애에 낯설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은유:환유=유사성:인접성’도식이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은유와 환유의 관계란 결코 절대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은유로 볼 수 있는 것고 환유가 될 수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환유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은유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은유와 환유는 상호배타적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야콥슨이 이 관계를 수직과 수평의 두 축으로 보려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수직을 이루는 직선이나 수평을 이루는 직선은 각도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45도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넘으면 수직에 가깝고 그것을 넘지 않으면 수평에 가깝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45도 근처에 머물러 있는 직선도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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