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성의 역사 1_ 제5장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_윤명_샘.hwp


오랫동안 군주의 권력을 특징짓는 특권의 하나는 생살여탈권이었다. 이는 군주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경우에만 군주로부터 신민에게로 행사된다고 이해한다. , 그것은 일종의 재항변권이다. 군주를 타도하거나 군주의 권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외부의 적에 의해 군주가 위협받는가? 그렇다면 군주는 정당하게 전쟁을 벌이고 신민에게 국가의 방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신민의 죽음을 꾀하지않으면서 합법적으로 신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권한을 갖는다. , 이런 의미에서 군주는 신민에 대해 간접적생살여탈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만일 군주에게 항거하고 군주의 법을 위반하는 자가 신민의 한 사람이라면, 군주는 그의 생명에 대해 직접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 징벌의 명목으로 군주는 그를 죽이게 된다. 이렇게 이해된 생살여탈권은 더 이상 절대적 특권이 아니다. , 그것은 군주의 보호와 고유한 존속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생살여탈권은 불균형한 권리이다. 군주는 죽일 권리를 작용하게하거나 죽일 권리를 보유함으로써만 생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뿐이고, 그가 요구할 수 있는 죽음에 의해서만 생명에 대한 권력을 나타낸다. “생살여탈권으로 표명되는 권리는 사실 죽게 하거나살게 내버려둘권리이다. 요컨대 그것은 칼로 상징되었다. 거기에서 권력은 무엇보다도 물건, 시간, 육체, 마지막으로 생명에 대한 탈취권이었고, 생명을 탈취하여 없애는 특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서양에서 권력의 이러한 메커니즘은 고전주의 시대부터 크게 변화했다. “징수는 더 이상 권력 메커니즘의 주된 형태가 아니고, 권력에 복종하는 세력들에 대해 선동, 강화, 통제, 감시, 최대의 이용, 조직화의 기능을 하는 다른 부품들 사이에서 단지 하나의 부품일 뿐인 경향이 있다. , 세력들을 가로막거나 굴복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력들을 산출하고 증대시키며 정리하게 되어 있는 권력, 그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그러한 권력의 요구에 기대고 그러한 권력의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게 된다. 군주가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방어를 요구할 권리에 근거를 둔 그러한 죽음은 그저 사회체가 생명을 확보하거나 유지하거나 발전시킬 권리의 이면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19세기부터 전쟁은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도 더 처참했고, 모든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국민에 대해 그와 같은 대학살을 실행한 체제는 19세기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권력은 이제 생명에 대해 실제로 행사되는 권력의 보완물, 말하자면 생명을 관리하고 최대로 이용하며 생명에 관해 정확한 통제와 전체적 조절을 실행하려고 시도하는 권력의 보완물로서 주어지는데, 아마 이러한 사실 때문에 죽음의 권력은 자체의 한계를 그토록 멀리 확장하는 데 소용된 힘과 파렴치의 일부분을 부여받을 것이다. 이제 전쟁은 보호해야 할 군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모든 이의 생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국민 전체는 생존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서로 죽이도록 훈련받는다. 살육은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그토록 많은 체제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게 하면서 그토록 많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명과 생존, 육체와 종족의 관리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이다. 그리고 악순환의 고리를 닫게 해주는 반전에 의해, 전쟁의 기술체계가 전쟁을 철저한 파괴 쪽으로 선회하게 하면 할수록, 전쟁을 개시하거나 끝내는 결정은 실제로 점점 더 생존의 문제에 맞춰진다. 오늘날 원자핵의 상황은 이러한 과정의 귀착점이다. , 어느 한 국민을 전반적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키는 권력은 또 다른 국민에게 생존의 지속을 보장하는 권력의 이면이다. 전투의 기술을 뒷받침하는 원리, 즉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는 국가 간 전략의 원리가 되었지만, 문제되는 실재는 더 이상 통치권의 법적 실제가 아니라 국민의 생체적 실재이다. 민족 말살이 정말로 근대적 권력의 꿈인 것은 낡은 죽일 권리가 오늘날 다시 행사되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생명, , 종족, 대규모적 인구현상의 차원에 자리 잡고 행사되기 때문이다.

죽게 하든가살게 내버려두는낡은 권리가 살게 하거나죽음 속으로 몰아내는권력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음의 회피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사회에 대해 죽음을 견딜 수 없게 만들 새로운 불안보다는 오히려 권력절차가 끊임없이 죽음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죽음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통과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세의 지배력이 유난히 더 강력한 다른 지배력에 의해 대체되는 현상이었고, 죽음을 둘러싸는 호사는 정치적 의례의 영역에 속했다. 권력이 발판을 확립하는 것은 이제 생명에 대해, 생명의 전개를 따라서이고, 죽음은 생명의 한계, 생명에서 벗어나는 계기이며, 죽음은 삶의 가장 비밀스런 지점, 가장 사적인지점이 된다. 예전에는 이승의 지배자이건 저승의 지배자이건 군주만이 행사할 수 있는 죽음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이기에 범죄였던 자살이 19세기에는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 놀랄 이유가 없는데, 생명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의 경계와 틈새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죽을 권리가 출현한 것은 자살 덕분이다.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권력은 17세기부터 두 가지 주요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것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개관계들의 다발 전체에 의해 연결되는 전개의 두 가지 극이다. 먼저 형성된 듯한 극의 중심은 기계로서의 육체였다. , 육체의 조련, 육체적 적성의 최대화, 체력의 강탈, 육체의 유용성과 순응성의 동시적 증대,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통제체제로의 육체 통합, 이 모든 것은 규율을 특징짓는 권력절차, 인체의 해부-정치에 의해 보장되었다. 다소 늦게 18세기 중엽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의 중심은 종으로서의 육체, 생명체의 역학에 의해 검토되고 생물학적 과정에 대체 매체의 구실을 하는 육체이다. , 증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와 더불어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그것들을 떠맡는 것은 일련의 개입과 조절하는 통제전체, , ‘인구의 생체-정치이다.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것이 될 것이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던 죽음의 오랜 지배력은 이제 은밀하게 육체의 경영과 생명의 타산적 관리에 포함되면서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 생체-권력이 전개되는 두 가지 방향은 18세기에도 여전히 명확하게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규율의 측면에서 생체-권력은 군대나 학교 같은 제도이고, 전술에 관한, 수련에 관한, 교육에 관한, 사회의 질서에 관한 성찰이다. 인구 조절의 측면에서 생체-권력은 인구통계학이고, 자원과 주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정, 부와 부의 유통, 생명과 예견할 수 있는 수명의 도표화이다. 사실상 이 두 가지 권력기법의 긴밀한 연결은 사변적 담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19세기에 커다란 권력 기술체계를 구성하게 되는 구체적 배치의 형태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가령 성의 장치는 그러한 배치의 하나, 그것도 가장 중요한 배치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생체-권력은 틀림없이 자본주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육체가 통제되어 생산체제로 편입되는 것을 대가로 치름으로써만, 인구현상이 경제 과정에 맞추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보장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육체와 인구의 증가, 육체와 인구의 활용 가능성 및 순응성과 동시에 육체와 인구의 증강, 또한 체력과 적성과 생명 일반을 최대로 이용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더 예속시키기 어렵게 만들지 않을 권력의 방법을 필요로 했다. 지본의 축적에 의거한 인력 축적의 조절, 생산력의 확대와 이윤의 차별적 배분에 대한 인간 집단의 긴밀한 관련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행사되는 생체-권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능해졌다. 살아 있는 육체의 투입, 살아 있는 육체의 중시, 살아 있는 육체의 힘에 대한 배분적 관리는 그 시기에 불가결한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에 고유한 현상이 앎과 권력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주로 농업의 발전인 18세기의 경제발건, 인구의 증가를 촉진하는 한편, 인구의 증가보다 훨씬 더 급속한 생산성과 자원의 증대는 그 심각한 위협이 약간 완화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죽음은 더 이상 생명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기 시작한다. 생명에 대한 상대적 제어는 절박한 죽음을 어느 정도 제거했다. 이런 식으로 획득된 작용 공간에서 권력과 앎의 방식은 그러한 공간을 조직하고 확대하면서, 생명의 과정을 고려하고 생명의 과정에 대한 통제와 변화를 시도한다.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생물학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앎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어느 정도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게 되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이게 될 것이다. 권력은 살해의 위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떠맡음으로써 육체에까지 미치게 된다. 생명과 생명의 메커니즘을 명확한 계산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권력-앎을 인간 생명의 변화 요인으로 만드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생체-정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인데, 이는 결코 생명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법에 생명이 완벽하게 통합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한 존재, 즉 살아 있고 게다가 정치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었으나, 근대인은 이제 생명체로서 정치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동물이다.

생체-권력의 이러한 발전이 가져다 둔 또 다른 결과는 사법제도가 쇠퇴하면서 규격의 작용이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된 점이다. 법은 무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법의 전형적 무기는 죽음이고, 법을 위반하는 사람에게 법은 이 절대적 위협을 적어도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생명을 떠맡는 것이 임무인 권력은 조절하고 교정하는 계속적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한 권력은 통치권의 영역에서 죽음의 효력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가치와 유용성의 영역에 배치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법이 소멸한다거나 사법제도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아니라, 법이 갈수록 더 규격처럼 작동하고 사법제도가 특히 조절 기능을 갖는 기관(의료, 행정 등)의 연속체에 갈수록 통합된다는 점이다. 규격화하는 사회는 생명에 중심을 둔 권력 기술체계의 역사적 결과이다.

 

정치적 쟁점으로서의 섹스가 띠게 된 중요성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섹스는 생명의 정치 기술체계가 전개된 두 가지 축의 연결점인 것이다. 한편으로 섹스는 육체의 규율, 즉 훈련, 체력의 강화와 배분, 에너지의 조절과 경제적 사용에 종속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섹스는 모든 총괄적 결과를 유도하기 때문에 인구조절의 영역에 속한다. 섹스는 두 가지 층위로 동시에 편입되고, 아주 미세한 감시, 끊임없는 통제, 지극히 세심한 공간적 구획정리, 한없는 의료 또는 심리 검사, 육체에 대한 미시권력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대대적 조치, 통계학적 추정, 사회체 전체 또는 전체적으로 검토되는 여러 집단을 겨냥하는 개입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섹스는 육체의 생명과 동시에 종의 생명으로 접근하는 수단이다. 섹스는 규율의 모태와 조절의 원리로 이용된다. 그래서 19세기에 성은 생활의 가장 사소한 세부에서조차 추적되고 행동에서 탐지되며 꿈속에서 뒤쫓길 뿐만 아니라 아무리 사소한 광기일지라도 그 아래에 가로놓여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유년기의 처음 몇 해로까지 추적 당하며 개성의 암호, 즉 개성을 분석하고 동시에 개성을 우뚝 세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된다. 성은 또한 정치적 조작, (생식의 부추김 또는 억제에 의한) 경제적 개입, 도덕화 또는 챔임감의 고취를 위한 이데올로기 캠페인의 주제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 성은 사회에서 생물학적 활기만큼이나 정치적 에너지 역시 드러내는 힘의 지표로 내세워진다. 섹스의 이러한 기술체계의 한 극에서 다른 극까지 육체의 규율이라는 목적과 인구의 조절이라는 목적을 여러 가지 비율에 따라 조합하는 일련의 다양한 전술 전체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다.

피는 오랫동안 권력의 메커니즘, 권력의 표면화, 권력의 관례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인척관계의 체제, 군주의 정치형태, 등급과 카스트 분화, 가계의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이를테면 기근이나 전염병 또는 폭력으로 인해 죽음이 임박하게 되는 사회에서 피는 본질적 가치의 하나인데, 피의 사회에서 권력은 피를 통해말하고, 피는 상징적 기능을 갖는 실체이다. 우리는 섹스의 사회, 더 정확히 말해서 성으로 특징되는사회에 살고 있다. , 권력의 메커니즘은 육체, 생명, 생명을 급증하게 하는 것, 종이나 종의 활력 또는 종의 지배역량이나 종의 활용 가능성을 강화하는 것을 겨냥한다. 그리고 성의 중요성을 이루는 것은 성의 희소성이나 불안정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의 규칙적 반복성, 성의 은밀한 현존, 성이 도처에서 자극되고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권력은 성을 디자인하고 성을 야기하며 성을 결코 벗어나지 않도록 언제나 통제하에 붙들어두어야 할 증식하는 의미로 이용한다. 나는 성이 현대 사회에서 억압되기는커녕 끊임없이 부추겨지는 이유를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를 피의 상징론에서 성의 분석론으로 넘어가게 한 것은 바로 고전주의 시대에 구상되고 19세기에 사용된 새로운 권력절차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법, 죽음, 위반, 상징체계, 통치권 쪽에 잇는 것은 피이고, 성은 규격, , 생명, 의미, 규율, 조절 쪽에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성의 주제를 법, 상징 영역, 통치권의 체계에 재편입시키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추적할 수 있다. 일상의 성을 통제하고 관리한다고 자처하는 그러한 권력 메커니즘에 있을 수 있는 돌이킬 수 없이 확산적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은 정신분석이나 적어도 정신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가장 일관성 있는 것의 정치적 영광이다. , , 이를테면 인척관계, 금지된 혈족관계, 아버지-군주의 법을 성에 원리로서 부여하려는, 요컨대 욕망을 중심으로 권력의 옛 영역 전체를 소환하려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로부터 유래한다. 정신분석이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파시즘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던 것은 그러한 노력 덕분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이러한 입장은 분명한 역사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 죽음, , 통치권의 심급에 따라 성적인 것의 영역을 사유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 후방-선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의 장치와 동시대적인 권력기법에 입각하여 성의 장치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

 

누구라도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는 별개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것과 여전히 매우 가깝고, 사실상 성의 확산, 정착, 고정 현상을 보여주며, 사회체에서 성감대조직화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을 보게 만들려고 시도할뿐더러, 당신이 행한 일이라고는 정신분석이 개인의 차원에서 명확히 찾아낸 메커니즘을 확산시킨 것일 뿐일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러한 성적 특징의 투여를 이루어지게 할 수 있었고, 정신분석이 무시하지 않는 것, 즉 섹스를 배제한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누구나 성을 가능한 한 좁은 곳에, 즉 섹스에, 섹스의 생식기능에, 해부학적으로 결정되는 섹스의 직접적 부위에 한정하고자 애썼고, 생물학적 최소한도, 이를테면 기관, 본능, 합목적성으로 급선회했다. 당신은 정반대 입장을 견지한다. , 당신에게는 매체 없는 결과, 뿌리 없는 가지, 섹스 없는 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신의 경우에도 여전히 거세는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문제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정치적 장치로서의 성의 분석은 필연적으로 육체, 해부학적 구조, 생물학적인 것, 기능적인 것의 누락을 전제하는 것일까? 누구나 이 첫 번째 의문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 연구의 목적은 분명히 어떻게 권력장치가 육체, 이를테면 기관, 기능, 생리적 과정, 감각, 쾌락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 연구에서는 육체가 지워져야 하기는커녕, 분석을 통해 육체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한 분석에서 생물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엣 사회학자들의 진화론에서처럼 서로 뒤를 잇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표적으로 삼는 근대적 권력 기술체계가 발전함에 따라 복잡성이 증대하는 가운데 서로 연결될 것이다.

첫 번째 문제와 뚜렷이 구분되는 또 다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섹스는 성에 대해서는 성의 효력이 배분되는 중심인 반면에 권력에 대해서는 타자가 아닐까? 그런데 누구나 검토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섹스에 대한그와 같은 관념이다. 현실 속에서 섹스의 발현을 떠받치는 정착 지점일까, 아니면 성과 장치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복잡한 관념일까? 아무튼 섹스에 관한그와 같은 관념이 갖가지 권력 전략을 가로질러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밝힐 수는 있을 것이다.

10세기부터 성의 장치가 확대된 주요한 노선을 따라 우리는 섹스가 존재한다는 그러한 관념의 구상을 목격할 수 있다. 누구나 확인할 수 있듯이, 갖가지 전략을 통해 섹스에 관한이와 같은 관념을 배치하는 것은 바로 성의 장치이고, 이와 같은 관념은 히스테리, 수음, 페티시즘, 질외 사정의 네 가지 중요한 형태 아래에서 섹스를 전체와 부분, 기본 요소와 결여, 부재와 현존, 과잉과 결핍, 기능과 본능, 궁극목적과 의미, 현실과 쾌락의 상호작용에 종속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섹스에 관한 이론의 틀은 이런 식으로 조금씩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성된 그 이론은 성의 장치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했고, 그러한 기능들 때문에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특히 세 가지 기능은 중요한 것이었다. 우선 섹스의 개념은 해부학적 요소, 생물학적 기능, 행동, 감각, 쾌락을 인위적 단위에 따라 통합하게 해주었고, 그 허구적 단위를 인과의 원칙, 편재하는 의미, 도처에서 발견해야 할 비밀로서 구실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섹스는 유일한 기표와 보편적 기의로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섹스는 해부학적 구조와 동시에 결여로, 기능과 동시에 잠재성으로, 본능과 동시에 의미로 단일하게 주어짐으로써, 인간의 성에 관한 앎과 생식에 관한 생명과학 사이의 접촉선을 표시할 수 있었다. 끝으로 섹스의 관념은 매우 중요한 반전을 보장했으며, 성에 대해 권력이 맺는 관계의 표상을 전도시키고 성을 결코 권력과의 확실한 본질적 관계가 아니라 권력이 가능한 한 예속시키려고 애쓰는 요지부동의 특수한 심급에 뿌리박은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섹스의 관념은 권력의 권력을 이루는 것을 회피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권력을 단지 법과 금기로서만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권력과의 접촉면을 따라 부차적으로 성의 다양한 효과를 산출할 섹스의 자율적 심급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섹스는 권력이 육체, 육체의 물질성, 육체의 힘, 육체의 에너지, 육체의 감각, 육체의 쾌락에 대한 지배력으로 조직하는 성의 장치에서도 가장 사변적이고 가장 관념적이며 가장 내밀한 요소이다.

섹스는 최초의 기능들에 스며들고 그것들을 뒷밤침하는 또 다른 기능을 발휘한다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 역할, 각자가 (섹스는 숨겨진 요소이고 동시에 의미를 낳는 원리이므로) 자기 자신의 이해 가능성에, (섹스는 육체의 위협받는 실제적 부분이고 상징적으로 육체의 전체이므로) 자기 육체의 총체성에, (섹스는 이야기의 특이성을 충동의 힘에 연결하므로)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것은 실제로 섹스이다. 즉 성의 장치에 의해 결정된 상징적 지점이다. 섹스가 여러 세기에 걸쳐 우리의 영혼보다 저 중요하고 심지어 우리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미세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밀도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되는 그 비밀에 비해 세계의 모든 수수게끼가 우리에게 그토록 가볍게 보인다는 사실은 이로부터 기인한다. 생명을 섹스 자체, 섹스의 진실과 절대적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섹스는 그야말로 죽음과 비길 만하다. 서양은 매우 오래 전에 사랑을 발견했을 때, 죽음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가치를 사랑에 부여했는데, 오늘날 그러한 등가관계, 모든 등가관계 중에서 가장 값비싼 등가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섹스이다.

성의 장치는 섹스라는 이러한 상상적 요소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체의 가장 중요한 내적 작동 원리들 가운데 하나, 즉 섹스에 대한 욕망, 이를테면 섹스를 소유하려는 욕망, 섹스에 이르고 섹스를 발견하며 섹스를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섹스를 담론으로 조목조목 진술하고 섹스를 확실히 표명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성의 장치는 섹스자체를 바람직한 것으로 설정했다. 섹스의 이러한 바람직함은 섹스를 알고 섹스의 법칙과 영향력을 뚜렷이 밝히라는 명령에 우리 각자를 옭아매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신기루 같은 것을 우리 자신의 심층에서 올라오게 하는 성의 장치에 우리를 사실상 얽어매는데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모든 권력에 저항하여 섹스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수 세기 전부터 우리로 하여금 섹스를 사랑하도록 했고, 우리가 섹스를 인식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섹스에 관해 이야기되는 모든 것을 귀중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수완을 발휘해서 섹스를 간파하도록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섹스의 진실을 끌어내야 할 의무에 우리를 얽어맸고 우리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섹스를 무시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불어넣은 그 모든 술책을 조금이나마 생각해보자. 오늘날 놀라움을 일으킬 만한 것은 바로 그러한 술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성과 성의 장치를 유지하는 권력의 술책 때문에 우리가 섹스의 비밀을 억지로 끌어내고 그 어둠에서 가장 진실한 고백을 강탈하는 무한한 책무에 헌신할 정도로 섹스의 그 근엄한 왕국에 종속되기에 이르렀는가를 아마 언젠가는 육체와 쾌락의 또 다른 구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성의 장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해방성의 장치에 달려 있다고 믿게 하는데, 바로 여기에 이 장치의 아이러니가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