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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구성

매우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유복한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의 하녀를 범하고 그 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키르케고르에게 어린 시절부터 큰 고뇌를 안겨주었다. (21)

키르케고르의 사유는 점진적으로 하나의 단계에서 하나의 단계로 옮겨 갔다기보다는 그 출발점에서 이미 모두 한꺼번에 주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일반적인 분위기로는 시인(미학자)에서 철학자(사변가)로, 철학자에서 '믿음의 기사(그리스도인)'로 이동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27) 그는 윤리적인 삶으로 대체되어 버린 속화된 믿음에서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즉 믿음을 넘어서 이성으로서의 종교를 가지고자 했던 헤겔주의에 비해, 이성을 넘어서 진정한 믿음으로서의 종교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31)  

 

p33

이 책의 서문에서 키르케고르는 '외면성'과 '내면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책에 제시될 내용의 원고들이 사실은 우연히 입수하게 된 것(고물상에서 산 골동품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5)

2장. 멜랑콜리의 의미

실존이란 문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 혹은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을 뜻한다.(45) 실존에 대해서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참된 존재 또는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46) 나의 영혼은 충만한가? 나의 삶은 진정 행복한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자가 실존주의자이다. 또한 절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피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한다는 것이 실존주의자의 문제제기 방식이다.(49) 우리는 삶의 총체적인 의욕상실을 하나의 일반적인 실존의 형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52)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 권태라고 한다면, 이러한 권태에 뒤따르는 무기력함이 곧 '멜랑콜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수' 혹은 '우울증'은 본질적으로 실존의 문제이며, 정신적인 문제이다.(53)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것에서 더 이상 의미 있는 무엇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세상적인 것보다 더 큰 것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즉 세상에 대해서 권태를 느끼고 우수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세상을 넘어서는 인간성이 지닌 '위대함'의 징표인 것이다. (54)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문제는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이러한 권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문제 삼지 않거나 이러한 실존의 권태로부터 '도약'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55) 인간실존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고 질적인 가치의 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수평적이고 양적인 이동이나 변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심미적인 실존은 윤리적으로 도약하고 윤리적인 실존은 종교적인 실존으로 도약을 감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도약은 결국 시간성과 유한성을 넘어서 영원성과 무한성으로 나아가야 한다.(56) 

3장. 실미적 실존과 실존주의 예술관 

모든 '최초의 사건'은 그로 하여금 '존재함의 가치', '산다는 것의 고귀함'을 일깨워준다. 처음으로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고 살 만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사건'이라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삶의 새로운 지평으로 진입하는 것이다.(61) 사도 바울은 단 한 번 신을 만남으로써 박해자에서 순교자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실존적이 된다는 것은 관계된 내용의 주제 혹은 범주와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의 관계성의 질적인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즉 실존적으로 산다는 것은 기질적으로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산다는 것이며, '정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2) 하여간 "군중은 비-진리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군중이란 본질적으로 자기 스스로의 양심과 결단에 의해 행위하기보다는 전체 혹은 집단의 경향성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즉 항상 참과 거짓, 옮음과 그름에 대해서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주체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다. (63) 

'실존의 라틴어 말은 '이그지스텐시아'인테, 이 용어는 이미 스콜라철학에서 사용된 것이지만, 철학적인 중요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키르케고르 이후이다. existentia는 '솟아나다, 발생하다, 생겨나다'는 동사 '이그지스토'의 명사형이다. 하나는 스콜라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의 개념에서 파생한 것이며, 그런 한 내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 '존재하는 힘'의 궁극적인 원인과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다. 

곧 존재하는 원인으로서의 근원적인 힘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과 신의 관계성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65)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신성한 것'은 모두 '신적 특성'이며, 바로 이러한 시간적이고 상대적인 지평을 넘어서는 곳에서 종교적인 실존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스퍼스 역시도 "종교적 사람이란 항상 근원적인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67) 

 그래서 주체적이 되는 사건이 진정 실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는 것은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나서는 것'이거나 혹은 '내가 작은 신이 되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는 키르케고르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사르트르나 니체가 주장하는 것이다. (68) 키르케고르는 믿음의 문제를 '개념'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헤겔철학을 비판한 것이다. 즉 믿음은 삶에서 사변을 넘어서는 최후의 삶의 문제인 것이다. (69)

심미적 실존의 비극적인 측면은 이러한 그의 삶의 충만이 영속적일 수가 없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의 충만은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 "생의 투명한 기쁨"을 계속 증가시켜거나 혹은 욕망을 억제하면서 "불투명한 기쁨의 침울" 속으로 가라앉든가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현실 안에서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우리가 '우수(멜랑콜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이러한 심미적인 실존만으로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 그가 심미적인 체험에서 주어지는 '투명한 기쁨'을 지속적으로 가지기 위해서 아무리 그 대상을 바꾸어 간다고 해도 결국 그는 권태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에 있다. 정신은 결코 충분히 정신적으로 정립되지 않는 한 욕구 불만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73) 

인간이 인간적으로 되고자 하는 한 순수하게 심미적인 체험에서 머물 수만은 없으며 정신적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이러한 노력 중 대표적인 것이 곧 예술행위이다. 즉 예술이란 심미적인 실존에서 정신으로 규정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74) 즉 예술에 있어서 첫 번째 중요성은 외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감성적이고 심미적인 체험을 가정하며, 이러한 체험이 배제된 것은 아무리 그럴사해도 그것은 진정한 예술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75) 감성적인 요소는 도구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이며 감성이 배제된 예술이란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서사성(이야기)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심미적인 요소를 대신할 수가 없다. (75)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그리스적 영웅의 이야기를 찬미하는 미학자들을 "고전적인 싸구려 잡동사니"를 찬미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에서 고전 예술이란 그리스 예술에서부터 르네상스 미술에 이르기까지 단정한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고전'이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어떤 불멸성을 가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76) '영원한 것'이 내포되어 있는 예술을 고전예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모든 진정한 예술에는 "특정종류의 영원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술이 있어서 이 불멸성이 가지는 특징은 '이념'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진정한 고전예술은 바로 이 형식과 이념이 완전히 상호집중되어 있는 것, 즉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77) 이념이란 정신의 차원에서 공유될 수 있는 것, 시간과 문화의 다름에 따라서 소멸될 수 없는 불멸의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78) 사전적으로 정의가 가능한 개념적인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형식(외관)을 통해서 전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아!'라고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79) 키르케고르는 감성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중세의 그리스도교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성에서 감성은 배제하고자 한 그리스도교의 노력의 오히려 역설적으로 감성이 이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영역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82) 

실존주의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소원 혹은 올바른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자아실현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실존적인 문제란 곧 나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그 무엇, 나의 삶에서 진정한 가치와 행복한 감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그 무엇은 나에게 진실한 것, 참된 것, 내적인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내면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나의 자아'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창조적 행위란 곧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에 있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불멸하는 것, 영원한 것에 대한 실존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83) 

어떤 관점에서 '신의 이미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말은 '정신적으로 규정된 인간'이라는 말과 거의 유사한 표현이다. 사실 정신을 의미하는 불어의 'esprit'가 대문자로 시작하는 'Esprit'가 되면 이는 신의 정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행위는 어떤 관점에서 이미 종교에서의 '예배 행위'난 '성사 행위'와 유사한 것이다. 인간은 성사를 통하여 신성한 것과의 교감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해서 역시 신성한 것과의 교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84) 

정신적으로 된다는 것이 일반화되거나 보편화되면서 개별성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으로 되면서 인간은 보다 보편적이 되는 것과 동시에 보다 개별적인 것이 됨을 의미한다. 보다 개별적으로 된다는 것은 곧 실존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정신적인 존재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곧 정신의 고유한 본질, 즉 영원한 것과의 실존적인 관계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85) 그래서 진정한 예술은 곧 예술가의 자아가 그의 작품이라는 외형(형식)을 빌려 그의 자아(내용, 이념)가 구체적으로 현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실현된 자아 혹은 실현되는 자아가 '외관화'되는 그 형식이 음이 될 때 음악이 되고, 그림이 될 때 회화가 되며, 이야기가 될 때 소설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실존주의자에게 정신적으로 규정되며, 그의 작품에 그가 정신성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시간 속에 현존하는 영원성을 증언하는 표징이 되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가장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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