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슬라보예 지젝, 『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더 깊은 사유1, pp171-217.hwp
3.30MB

 

더 깊은 사유 1: 포레스타스와 초결정론

지젝은 헤겔의 주장에 따라 개념적 매개 과정’(171)으로서 현실 합리적 구조 결론에 도달로서 직접적인 현실로 회귀하는 필연성이 이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합니다. 또한 라캉의 표현에 따라 모든 합리적인 (상징적) 체계는 실재의 작은 것으로 유지되며, ’실재에 대한 대답으로 작동한다.’(172)고 말하며 직접성으로의 회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이를 도넛 모양에 비유하고, 점진적 발전 모델을 레이어 케이크로 비유하는 작은 웃음거리에서 사유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 관한 셸링의 논문에 대한 헤겔의 반응에 대한 의견에서는 아드리안 존스턴(찾아보니 뉴멕시코대학 철학과 교수라 하네요.)과 입장을 달리한다 말합니다. 어떤 부분을 논쟁하고자 하는지 아래 도표로 정리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드리안 존스턴 지젝
셸링 자유론 원인(Grund)과 존재(Existenz)
스피노자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
해석적 차이 셸링과 스피노자의 설명이 다르지 않다는 해석 존스턴의 해석이 단순하다는 지적
해석 셸링의 원인’’에서 시작되어 고착된 존재의 안정적 독립체가 만들어 지는 것은, 스피노자의 산출하는 자연이 재표면화되어 산출되는 자연을 생성하는 것과 같음(173 인용) 셸링과 양자물리학에서 보듯이, 기본 존재론적 짝을 형성하지만, 이는 단순히 생성 과정에서의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는, 원인과 파동 내부에 이미 긴장과 간극이 존재하고 있음(174 참고)
설명 인간 주관성(주체성)은 가장 높은 층위에 도달하는 층층이 쌓인 레이어 도넛 구조로 설명 가능 존스턴의 레이어 모델은 단순한 점진적 진화 과정과 유사할 뿐,
순수한생성의 흐름이란 존재하지 않음
비판점 따라서 주체성이 생성되는 과정은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비판,
이는 물리적 환원주의나 범신론에 연결되고 만다고 한계를 지적
이는 적절한 변증법적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단절과 소급성을 무시하는 것

지젝이 셸링과 헤겔의 관점의 차이를 서로 포용하는 언어는 없으며, 한쪽이 다른 쪽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175) 표현하면서, 양자 물리학을 통해 자기 동일성과 상호작용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서로 다른 파동이 교차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결과일 뿐 시차의 간극은 근본적인 것이고 환원될 수도 없다.’(175)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양자의 파동과 그것이 하나의 고착된 실체로 ‘붕괴’되는 현상 사이의 관계를, 다양한 생성의 흐름과 그것이 ‘물화된’ 결과로 고착된 현실 사이의 관계로 축소하려는 시도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175)

 

그러면서 리카르도 사닌 레스트레포라는 학자의 양자 물리학에 대한 다중세계 해석(가능한 모든 결과가 각각의 새로운 우주를 구성)을 제시하면서 단일한 관찰 이론의 결함을 지적하고, ‘포테스타스(Potestas)’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포테스타스는 무엇을 지배하는 권력을 뜻한다. 그것은 삶을 규정하고 실행하는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모습을 구축하여 견고한 동일성의 체계를 배열한다.”(176)는 설명으로부터, 이 개념에 있는 동일성, 필연성, 현실성, 고착된 고정성, 비물질적 비현실성의 개념들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77 인용 참고)

무언가를 규정하고 강제되어 현실화하는 개념으로서 포레스타스는 완벽하고 단일한 개념처럼 보입니다. 반면 이에 대립되는 차이라는 것을 개념화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서양철학은 부정을 부정하여 존재-현실()에 대립되는 비존재-무라는 설명을 통해 불편함을 해소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연성의 불편함을 외면해왔던 것으로, 지젝은 이런 우연적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실화되고 있는 개념들이 붕괴되면서도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조명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지젝은 양자 물리학을 통해 하나의 세계(현실)의 존재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무한히 펼쳐지는 세계 가운데 다른 모든 세계의 토대가 되는 세계간 마련되는 것’(179)이라 인용을 통해서도 단일한 현실로 고착화하려는 것이 가지는 문제점을 조명하는 한편, 그럼에도 현실로 자리잡는 것은 상호 주관적이고 사회적으로 매개된 과정에서의 측정에 의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개념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179)

반면 초결정론 모델은 양자역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조차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181)는 한계점을 넘어서기 위해 양자 물리학이 무시하고 있는 변수의 특성을 조명하기 위해 설명된 개념으로 이처럼 일상적인 개념화 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는 상황들을 살펴봅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특정 법칙이 입자의 특정 배열을 금지하기 때문이다.”(182)는 인용처럼 보편적 상호 연관성의 관계 속에서 본질적으로 발견되는 상호 의존적인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일 뿐(교조화한 변증법적 유물론, 182)이라며 현실을 설명하려 합니다.

양자가 가진 교차와 붕괴의 우연과는 대립적으로 동일성과 현실에 초점이 맞춰진 포레스타스, 또는 상호연관성에 의한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는 초결정론이라는 두가지 개념을 통해서 지젝은 자유에 대한 논의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지젝은 측정측정된 현실로 이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결코 직접적으로 관찰되지 않는’(183) 것으로 도식화되지 않고 우리의 시공간적 현실로 상상할 수 없는’(183)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결정론적 현실로 회귀하고자’(184)하는 개념들로부터 우리의 인식적인 특성들을 확인하게 될 때에, 양자역학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유합니다.

이를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논하고 있는 자유라는 주제에 접목해본다면, 일반적으로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우리의 개념과 현실들이란 실제로는 우리가 현실로 이해하기 위해 회귀시킨, 필연화시키고 상호관계성 안에서의 이해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설명해 온 왜곡적인 방식에서의 자유의 이해가 아닐지를 고민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지젝의 사유의 흔적이어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어렵고, 이를 하필이면 설명이 복잡한 양자역학을 통해서 빗대어 설명하고 있어서 더욱 설명하기 어려운 글입니다.

 

더 깊은 사유 2: 탈구로서의 지양

지젝은 헤겔의 아우프헤벤(Aufhebung, 혹은 지양)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몇 가지 오해를 해소할 중요한 변증법적 개념’(187)으로서 탈구’(脫臼, 관절을 구성하는 뼈마디 따위의 조직이 정상적인 운동 범위를 벗어나 위치가 바뀌는 것)라는 개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우프헤벤은 부정의 개념이면서 동시에 그 부정을 통해 새롭고 높은 단계의 발전이 나타난다는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예시를 들고 있는 프랑스 혁명과 아이티 혁명의 관계를 아우프헤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프랑스 혁명의 잠재력을 한껏 실현하고 더 높은 수준에서 반복’(188)되었다 말할 수 있지만, 이는 지배 이념과 종속 관계라는 한계점을 보입니다.

반면 탈구의 경우, 구성 요소들은 완전히 새로운 맥락에서 재배치되고, 새로운 상징적·사회적 공간에 통합되어 원래의 의미와 상관없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새로운 의미는 결코 원래의 의미로부터 유추될 수 없다.’(188)고 말하며 탈구의 개념은 하나의 개념이나 이론이 재배치 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변화되는 양상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 탈구의 과정은 급진적으로 혁명적인 힘이자 진보적인 이념과 개념들이 확산되는 현상처럼 보여지지만, 이는 심각한 오류임을 지젝은 지적합니다. ‘자본주의는 한 문화에서 탈구되어 다른 문화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문화 공간에서 보편적 탈구로 존재한다.’(190)

지젝은 헤겔의 지양과 탈구 사이의 관계를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접근 방식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며 1) 헤겔에 있어 관념의 완전한 실현은 그 내부의 자기 부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2) 변증법적 과정에서 서술어가 주어로 전환되는, ‘급진적인 반전을 통해 서술어가 새로운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의 총체’(191)를 말하는 것처럼, ‘모든 변증법적 과정은 탈구의 한 형태’(191)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모든 변증법적 과정은 탈구의 한 형태다. 이전의 실체는 새로운 포괄적 보편성으로 탈구한다. 그 보편성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전환의 순간마다 보편성 자체가 탈구하여 새로운 보편성의 종속 요소로 축소된다.(191)

 

이 부분 아래로 이어지는 비자본주의 시장과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돈의 매개적인 특성에서 재생산의 특성으로의 탈구의 현상을 표현한 문장도 참고하시면 이해에 조금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를 아이티 혁명의 상황에 접목하여, 노예제를 폐지한 혁명임에도 의무 노동제라는 제도로 인해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생산된 부는 흑인 지배 엘리트 계층으로 전이되고, 일부 남부 공화국에서 낮은 생산성의 경제 생태계를 향한 도전은 성공하지 못하고, 반백인 체제가 권위주의적 계급 구조를 불러 일으키는 역설적인 상황들이 도래하고만 결과를 보아서는 이는 지양을 목표로한 혁명이 탈구적인 성격의 역설적 상황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탈구로서의 지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변증법적 과정과 결과로서 더 나은 것을 생각하고 마는 아우프헤벤이 아닌, 변증법적 상황에서의 새로운 요소로 축소 또는 역설적으로 변화하고 마는 현상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또 하나의 관점을 지젝의 사유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었습니다.

 

더 깊은 사유 3: 애나를 창조하고 매들린을 연기하라

<애나만들기> <데이트 앱 사기: 당신을 노린다>
출처: netflix.com/kr/title

지젝의 여러 가지 사례 언급에서 대중문화 장르에서 현실 세계와 관련 있는 작품들(여기서는 허구 드라마 장르와 다큐멘터리)2작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 사이의 유사성 외에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주인공 애나가 윤리적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 모습을 인상깊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지만 윤리적 태도를 통해 영웅으로 남으며 일부는 여전히 그녀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충격적인 장면이라면서 말입니다.

지젝이 애나라는 실존 기반 창조 캐릭터에서 보고자 하는 모습은, 그녀의 목표와 대의 속에서 그녀 자신의 자유를 향유한다.’(199)라는 부분에서 다른 사기꾼 하유트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유트에게서 보여지는 자유는 타인의 손이 닿지 않는 나의 숨겨진 자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타자를 위해 선택한 역할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 하는 데 있다.’(200)며 차이점을 설명합니다.


히치콕,<현기증> <주디스 바튼의 유언>
출처: 위키피디아, 아마존

또 다른 예시인 히치콕 영화 <현기증>의 여주인공의 소설 <주디스 바튼의 유언>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으로’(200) 들려주고 있음에도, 영화 관객들은 그녀를 객체화 하는데 만족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소설에서는 그녀의 이야기가 객관적인배경에 관한 정보들이고 사실의 나열을 통해 보여지고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주인공 주디에 대해 이전에 보이지 않던 매들린의 어두운 반쪽(주디의 괴로워하는 녹색 얼굴)과 매들린의 눈부신 옆모습으로 채워지는 어두운 반쪽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주디는 객체보다 덜한 존재, 존재 이전의 형체 없는 얼룩으로 축소되고, 비로소 주체화된다.(203)고 설명합니다.

주체라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일인칭 주관적 관점을 피력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203)이며, ’매들린은 주디가 해방되어야 할 소외된 가면으로, 정체성을 창조하거나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런것들로 축소되지 않은 반쪽의 어두운 얼굴이 자유의 공간임을 역설합니다.

지젝은 자유에 역설과 불화‘(205)가 있는 것처럼, 칸트에게 자유가 고통스러운 것‘(205)이었던 것처럼, ’의무를 위해 자신의 자발적 본능을 고통스럽게 포기해야‘(205)하고, 동시에 가장 깊은 자유는 내면의 필연성으로 경험‘(205)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셸링은 이처럼 상반된 것들의 일치를 자신의 예술 철학을 통해 한층 발전시켰다. 창작 과정에 있는 예술가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자유롭지만, 동시에 오로지 자신의 내면 충동에 의해서만 나아갈 바를 알게 된다.(205)

 

더 깊은 사유 4: 비재현적 예술의 정치적 함의

지젝은 예술적인 전위가 만개한 기적의 해‘(207)였던 1913년과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의 참사의 사이의 배경에서 공포의 20세기 역사와 현대 예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208)고 말합니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인용에서 관람객이 외부 환경이 작품에의 몰입과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출 수 있다는 것에서, ’만일 예술 작품의 어떤 형상이 불안과 불만과 혼란의 심상을 창출한다면, 그것이 스스로 지닌 해방적인 지향을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209)라고 질문하면서, 수감된 파시스트들에게 혼란과 우울, 깊은 슬픔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전위예술 설치물처럼 디자인했다는 예시는 흥미롭습니다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작품은 파시스트들에게는 고통을 생성하는 고문도구처럼 사용된 것인데, 효과가 있었는지 포로들은 그러한 시각적인 환경 속에서 극도의 절망과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210)고 합니다.

하지만 이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 안에서도 루카치, 릴리야 에렌부르크 등의 소설가, 그리고 예술 비평가인 미하일 리브시츠 등은 비이성과 반인간주의를 찬양하는 모더니즘은 그에게 문화적 파시즘일 뿐‘(211)으로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어두운 현상들이 권력 숭배, 파괴의 쾌감, 잔인함에 대한 기쁨, 충동에 대한 애착, 맹목적인 복종 등‘(211) 새로운 야만성이라며 공공의 위험을 초래한다고 주장합니다.

소련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모더니즘은 파시스트적인 것이지만, 파시스트에게 모더니즘은 공산주의적인 것‘(212)이 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반모더니즘적인 논리로 추하고 난해하고, 모욕적인 예술‘(212)은 잘난 척 하는 예술이자,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예술의 원천이 아닌,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욕망을 가진 모더니스트적인 예술을 엘리트 글로벌리스트들의 이데올로기적 분출이라고 비난‘(213)받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유의미한 측면도 있는데, ’현대 예술이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공포와 불안과 갈등을 재현한다는 주장‘(213)으로 이런 재현은 예술 자체가 가진 표출로서의 해방 행위적 특성에서 전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설명합니다.

헤겔은 재현 예술 외의 추상 예술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재현 이외의 추상 예술로서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불안, 비자유, 탈구 등은 현대사회에 뿌리 내린 불안은 물론, 형식적 자유일 뿐인 비자유, 자율이라는 이름의 예속, 더 근본적으로는 그 자율성 자체에 내재된 불안과 혼돈마저도 우리 존재론적 토대의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214)라며 질문하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효과에는 근원적인 모호함이 자리잡고 있다.‘(215)는 표현으로부터도 현대인의 소외공동체적인 인식과 공감이라는 영역을 박탈당한 개인‘(215)들에게 해방적인 효과를 만들어 그것을 발산‘(215)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술에서 헤겔적인 차원의 문제는, ’헤겔이 추상성이 지배하는 진보한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 없었는데‘(216), ’그는 경제 영역에서 생산, 분배, 소비, 교환이라는 경제적 현실을 구조화하는 자기 중재적 개념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림의 영역에서도 색상과 모양 등의 형태를 매개하고 규정하는, 외형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의 개념을 분별하지 못했다.‘(217)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