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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사유 5 보편화된 폐제? 고맙지만 사양할게!
대타자가 해체된다고 해서 그것이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알랭 밀러가 말한 '보편화된 폐제'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p. 343).
| 대타자: - 상징적 질서의 주인 - 언어, 법, 사회적, 규칙, 문화적 질서가 자리잡고 있는 추상적이고 구조적인 위치 - 라캉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폐제: - 부성의 질서가 폐기됨 혹은 거세가 제거됨. - 아이가 언어와 사회적 질서(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름(The Name of the Father)'이라는 부권적 은유를 받아 들여야 함. 폐제는 이 과정을 거부하거나 실패하여, 상징적 질서 자체가 무너지고 환각이나 망상이 실재(The Real)에서 되돌아오는 상태 보편화된 폐제: 과거에는 사회를 지탱하던 절대적 권위(전통, 종교, 이데올로기 등 '대타자')가 존재했으나, 현대에는 이러한 중심 권위가 힘을 잃으면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일종의 '정신병적 구조(기준점이 없는 상태)'에 노출됨. 난민, 불법 체류자, 혹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잉여로 취급받는 존재들처럼,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적 시선 밖으로 밀려난 상태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구조가 됨. 캔슬컬쳐: 자신의 신념이나 사회적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유명인, 공인, 혹은 기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집단적 항의 문화 |
밀러에 따르면, 아이러니는 정신분석가와 혁명가에게 매우 어울리는 개념이다. ... 아이러니가 발생할 때는 정신분석에서 '대타자'가 붕괴할 때이고, 혁명에서도 '대타자'가 붕괴할 때다. 그리고 정신병리학에서 '대타자'가 폐제될 때다(p. 344).
정신분석과 혁명, 사랑, 정신병에 나타나는 '대타자의 붕괴'가 등가로 연결될 수 있을가? 그리고 아이러니는 정말 대타자의 붕괴를 전제로한 주체의 입장에 적절한 이름일까? 혁명의 정치야말로 허구가 '아닌' 사회적 연결고리(혁명적 주체라는 설정된 연결고리)를 구성하려는 노력은 아닐까?
라캉에게 바보 같지 않은 것이란 없다. 바보 같음에서 예외는 없으며, 그를 완전한 바보가 아니게 하는 유일한 것은 바보 같음 자체에 내포된 모순이다(p. 346).
라캉이 말한 것처럼 "속지 않는 사람은 방황한다." 이는 냉소주의자들을 향한 최고의 비판적 언사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환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보 같지 않은 자'는 냉소주의자다. 그리고 여기서 오로지 '확실한 사실'만 믿는 냉소주의자의 결핍이 드러난다.
자신의 눈만을 믿는 냉소주의자가 놓치는 것은 상징적 허구의 효력이다(p. 347).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속지 않는 냉소적 아이러니와 모차르트적인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아이러니를 구분하는 일이다.
냉소주의자는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는 위장한다. ... 반면에 아이러니에서는 겉으로 비웃는 것을 예의주시한다.
모차르트적 아이러니는 진리가 '음악으로 발언하는' 독특한 순간에 드러나고, 라캉의 유명한 "나라는 진실은 내가 하는 말이다"라는 발언의 무의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오늘날 아이러니가 가득하고 믿음은 부족한 포스트모던 시대가 되자 비로소 모차르트적 아이러니는 완전한 현실성을 얻게 되엇다. 우리는 내면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으며, 사회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믿는다는 당혹스러운 사실에 직면한다(p. 348).
우리가 얻은 것은 대타자의 보편화된 폐제가 아니라 냉소적인 왜곡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속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주체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예외가 되는 무한한 축제로서의 '보편화된 폐제'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왜곡된다.
어쩌면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우는 아버지의 금기보다 훨씬 강력한 형태의 제한이 '정치적 올바름'이나 '캔슬 컬처' 같은 문화를 통해 더욱 극심한 압박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p. 349)
- 워크(woke) 혹은 '중심 없는 다양한 시대의 인종 주의'
워크가 제시하는 입장은 허용주의가 보편적인 금지로 변하는 극단적인 사례를 연상시킨다. 정치적 올바름의 체제에서는 언제든 누구라도 특정 언행으로 인해 '캔슬'될지 알 수 없다(p. 350).
이때의 불명확성은 모든 현실 국가의 권력 구조에서 핵심을 구성한다. 어떤 정부가 아무리 민주적이고 친절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 내부에서는 암묵적이지만 분명한 신호가 발산된다.
우리는 권력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범위에서만 행사되도록 하려는 부질없는 게임을 멈추고, 권력의 과잉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p. 351).
더 깊은 사유 6 뻔번한 부끄러움
오늘날 만연한 캔슬 컬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치심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며, 그 개념이 최근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자세히 살펴야 한다(p. 352).
로버트 팔러 <수치심에 대한 두 가지 계시>
| 죄책감 | 수치심 |
| 단계적 발현 이성적 논쟁과 포용의 가능성 포함 |
갑작스럽게 나타남 - 회피로 이어짐 이성적 해결책에 이르지 못함. |
수치심은 실패나 부족함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성공 그자체가 될 수 있었던 외설적 과잉(obscene too-muchness)이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이나 불충분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외설적 과잉을 부끄러워한다.
수치심은 고통스러운 문제를 모두가 알고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인 듯한' 상황이 붕괴할 때 폭발한다. (...) 공공연한 비밀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할 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수치심이 생긴다(p. 354).
'순수한 관찰자'(대타자의 한 모습)가 과잉을 인지할 때, 이 순수한 관찰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도 조용히 무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 함게 수치심을 느낀다.
- 스탈린주의의 사례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고 해도 겉모습의 주체인 대타자는 그것을 알아채서는 안 된다(p. 355).
그런데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정치 지도자들은 이와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는 외설적인 소문을 숨기는 존엄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외설을 존엄한 가면으로 보이게 하는 공공연히 외설적인 인물이다(p. 356).
라캉이 '상징적 거세'라고 부르는 것의 기본 전제는 나 자신의(궁극적으로 비참한)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과 나의 상징적 의무(정체성) 사이에 놓인 간극이다.
오늘날 외설적인 주인공들은 '거세'를 자신의 공적 이미지로 활용한다. 트럼프는 스스로를 조롱하고 거의 마지막 존엄의 흔적까지 비워버리는 충격적인 저열함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는 일종의 '대리적 수치'로 대중이 그를 부끄러워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좌파'는 이 게임에 주저 없이 나선다(p. 357).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비밀스럽게 즐기기도 한다. ... 오늘날 부족한 것은 수치심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수치심 문화에서는 팔러가 이야기한 '부끄러움 없는 수치심'을 경험한다. 수치심이 만연하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p. 358).
트럼프는 어떤 행동에서 수치심이 없이 행동한다. 그때마다 자유주의 좌파들은 그를 대신해 수치심을 느끼고, 이 타자에게 돌려진 수치심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지만, 더욱 깊은 단계를 들여다보고 우리 자신의 수치심을 포함한 상황 전체를 분석해야 한다(p. 359).
오늘날에는 수치심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도착적인 형태가 작동하고 있다. 대타자가 규제하는 현실에서 자신을 배제하고 안전한 거리 밖에서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 사라예보 사파리
- 액트오브 킬링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미국의 국제정치 전문가 할란 울먼은 한국의 평화가 한국을 우회한 채 미국과 반대측의 협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우크라이나를 우회한 채 서방 국가들이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햇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일부 좌파들은 메드베데프의 발언을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며 나의 주장에 분연히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는 러시아를 너무 궁지로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고 일갈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입장이다(p. 365).
나는 우크라이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당면한 문제인 석유와 가스의 위기를 친환경 에너지 전환의 기회로 활용하자는 독일 녹색당의 입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 전반을 재정비하기 위한 긍정적인 계기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 공론의 장에서 가장 비겁한 인물을 들자면 촘스키와 바루파키스, 피터슨 등의 평화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우크라이나가 우세를 보이자 우크라이나가 승리해서는 안 된다고(혹은 너무 많은 것을 얻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푸틴의 분노를 자극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핵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p. 366).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말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인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정확히 보여준다. 두 자아가 삶과 죽음을 건 투쟁을 하지만, 양쪽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 끝까지 나아간다면 승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쪽은 죽고 한쪽이 살아남지만 그것을 알아줄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를 쟁취하고 그 사실을 인식한 역사, 즉 역사와 인류 문화의 총체는 오직 원초적인 타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p. 367).
진정한 광기는 우리가 기후 변화를 무시하면서 집단적 자살을 감행하고 있는 와중에 핵 파멸의 공포마저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핵전쟁의 공포에 몰두함으로써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자기 파멸의 공포를 외면하는 것과도 같다.
더 깊은 사유 7 영화 대신 혼돈
영화 <매트릭스: 리저렉션>에 나타나는 영화적 문제점은,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선 시대에 포스트모더니즘적 해결책을 제안한다는 점이다(p. 370).
이 영화가 찬사를 받은 요소 가운데 하나는 '복잡성'이었다. 명확한 스토리 전개를 흐릿하게 만들면 심리적으로 더 '현실적'인 영화가 되는 것은 타당하다. 포스트모던 방식의 이러한 복잡한 이야기 구조에는 자아 성찰적인 순간들이 스며들기 쉽다(p. 371).
급진적 좌파 비관론자들의 경우, 이 영화를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매트릭스 밖에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자유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p. 372).
기계들이 활동하는 메트릭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인간이다.
일부 사람이 매트릭스가 통제하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나는' 순간, 외부 현실의 넓은 공간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치 태아의 상태로 양수 속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완전한 수동성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자아를 확립하는 주체로서의 의식적 경험을 배태하는 폐제된 환상이다. 이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타자(매트릭스)의 주이상스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이를 위해 우리의 생명력이 배터리처럼 흡출되어 나가는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 매트릭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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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는 왜 인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할까?(p. 373)
매트릭스는 인간의 주이상스를 먹고 산다. ... 대타자 그 자체는 익명의 기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주이상스를 필요로 한다.
그는(애널리스트)는 매트릭스가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조작하면 인간은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기계가 그것을 흡출해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그는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사람들이 더 많은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경험 자체를 조작하기로 한 것이다(p. 374).
매트릭스 기계가 우리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기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면, 매트릭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p. 376) ... 우리를 통제하는 두 개의 소외된 실체는 자본과 상징적 질서, 즉 우리의 현실을 구조화하는 허구의 상징적 질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자본이나 상징적 우주와 같이) 편집증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p.376). ... 모든 것을 통제하고 비밀리에 조종하는 숨은 에이전트(설계자나 애널리스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 378)
<매트릭스>에서 파란 약과 빨간 약 사이의 선택은 거짓 선택이다(p. 377). ... 우리는 현실에서 상호작용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상징적 우주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환상을 통해 소통할 분이다.
영화의 결말은 네오의 의심을 반대로 해석할 때만 희망의 의미가 된다. ...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실로서의 환상이자 환상으로서의 현실이며, 변덕과 욕망의 혼란스러운 덩어리'라는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거짓된 현실의 층위를 벗어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시실이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허용한다(p. 378)
영화는 궁극적인 '진짜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디지털 가상세계의 다양한 상호작용만 존재한다는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의 다소 지루한 결말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지점에서 끝을 맽는다. '재정의의 위대한 힘'을 강조한 영화는, 모든 실재를 일시적인 장애물로 간주한 뒤 재정의를 통해 그것을 무효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매트릭스에 완전히 굴복하여 스스로 에너지원으로 전락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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