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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지젝 / 26.01.28 / 화니짱

 

5. 무정부적 봉건주의에 이르는 길

 

메타버스라는 파란 약

 

p262 : 실재에 상응하는 라캉의 핵심 용어는 주이상스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상징적 구조는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서 주이상스를 취하는 것으로 그 구조의 불일치나 모순을 보완하고, 더 정확히는 그러한 것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에서와 같이] 유기체로 태어나 양수 속에 잠겨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63) 이 온전한 수동성은 우리의 의식적인 경험을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유지하게 하는 폐제된 환상이다. 그리고 이 환상은 도착적 환상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타자(매트릭스)의 주이상스를 위한 도구이며, 우리의 생명 에너지는 배터리처럼 그곳에서 빨려 나간다.

 

p264 : 저커버그는 자신의 회사 이름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변경한다고 발표하며 메타버스에 대한 비전을 발표했다. (265) 야니스 카루파키스가 이를 두고 클라우드 기반 지배 계급의 등장이라고 말한 것은 정확했다. (266) 일론 머스크는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그 합병을 문명의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신봉건주의가 자유를 지키는 수호자로 자신을 내세우는 형국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머스크가 표현의 자유를 정의하는 기준이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 모든 의견이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 인권이나 계몽주의 같은 보편적이거나 이성적 가치를 따지는 것에서 감정정치로의 전환

 

p266 :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무리 자동화된다 해도 기계에게는 여전히 인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리비도 경제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 (270) 라캉은 주이상스가 정치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치에 개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영역의 주이상스 담론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271) 이데올로기와 정치도 단순히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 분석될 수 없고, 헤게모니 담론의 경쟁 구도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정말로 사로잡기 위해서는 주이상스의 차원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경우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여성이 적절히 통제되지 않으면 과도한 쾌락이 그녀들을 앗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의해 유지된다. 인종차별은 타자의 즐거움에 대한 일종의 질투인데, 타자가 우리 삶을 형성하는 즐거움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 대의와 도덕을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감정과 주이상스의 차원에서 작동하다.

 

문화자본주의에서 암호화폐까지

p273 : 주이상스라는 실재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일부가 아니다. 그 상태는 철절히 가상적이다. 주이상스라는 실재는 묵시록에서만 완전한 현실이 된다. 문화자본주의에서는 상품과 그것이 상징하는 이미지의 관계가 뒤바뀐다. (274) 장기적으로는 국가 자체도 경험 상품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경험하게 하는 상품을 구매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국가적인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 감정자본주의, 해피크라시, 감정노동에서 감정정치, 감정관료제로의 이행

p277 : NFT는 실제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소유하는 경험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 (281) 실물 경제가 정체되거나 위축되고 있음에도 주식 시장은 활황이었다. 허구적인 금융 자본이 실물경제와 분리되어 자기 순환에 빠져 든 것이었다. 이때 팬데믹을 등에 업은 금융 조치들이 단행되었다. 전통적인 케인스주의 방식을 뒤엎는 방식으로 말이다. 즉 그들의 목표는 실물경제를 돕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자금을 금융 부분에 투입하는 일이었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그 자금의 대부분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p289 : 디지털의 통제와 조작은 오늘날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세상에서 일탈이나 이상 현상이 아니다. 그 시스템은 디지털이나 기타 통제 방식이 우리의 자유를 규제하는 형식 안에서만 자유의 외관을 유지할 수 있다.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자유가 유지되어야 하고, 사람들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인식해야 한다.

 

야만적인 수직성과 통제 불가의 수평성

p291 : 우리가 암호화폐와 NFT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향하는 모든 이상적이고 가상적인 활동이 현실과 유리되었다는 편견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회적이고 상징적 질서에 수반되는 기본 요소인 소외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3의 요소가 틈입하지 않는 직접적 교환의 투명성을 도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93) 외부 권위의 통제 없이 새로운 자유의 공간으로 시작된 암호화폐의 이념은, 말라부 자신이 묘사하듯, “의미없고 기이하고 전에 없던 모습으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그것은 야만적 수직성과 통제 불가의 수평성이 합해진 상태일 것이다.” 아나키즘적 자본주의는 투명성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투명성 담론의 역설을 실행할 뿐이다. “모든 것을 허용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불투명성과 다크웹과 조작된 정보도 포함된다.” 이러한 혼란과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야만적인 수직성이 필요하다.

야만적 수직성은 오늘날 많은 정부의 정책들에서 진화된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난다. 과도한 안보 강화와 군사력 증강이 그 예다. 이러한 현상들은 아나키즘의 움직임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국가의 소멸 양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국가들은 한때 기능하던 사회적 역할을 팽개치고, 폭력을 통해 자신의 퇴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초국가주의는 국가 권위의 죽음과 고통을 드러낼 뿐이다.”

 

p294 : 암호화폐의 자동화된 신뢰는 사회적 유대의 대체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부상한 야만적 수직성은 그 알고리즘이 사회적 유대의 대체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무정부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지금의 시대를 기술봉건주의로 보는 개념과 결합된다. (295) 마치 중세 암흑기처럼 불투명한 혼란이 세상을 감싸면 지역 영주들이 나타나 활약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점차 형성하고 있는 것은 무정부 봉건주의다. (298) 리프킨에게 협력적 공유사회란 자유로운 소유와 재생산이 가능한 사회를 의미하는 반면, 비트코인과 NFT는 이 영역에 희소성을 첨가했다. 다시 말해 협력적 공유사회는 시장과 대립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반면,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비트코인 속에 시장과 아나키즘을 통합시키고자 한다.

-> 누가 공공성, 커뮤니즘, 커먼웰스를 자유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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