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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유의지는 있는가?
- 인간의 자유는 사물의 일반적 질서에 어떻게 부합하는가?
- 자연의 질서에 자유의 자리가 없다면 자유란 더 높은 존재가 인간에게 안긴 선물인가?
- ‘자유 의지’는 단지 환상적인 자아 체험일 뿐인가, 아니면 진화론으로 설명 가능한 것인가?
결정론과 변주
과학적 논증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에는 자유 의지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p. 67).
결정론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자유는 ‘사용자의 착각’이다(p. 68).
자유를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 과정의 더 낮은 수준에 진정한 의미의 우연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이 그 우연성의 공간에서 선택 행위를 실행해야 한다(p. 69).
생물 유전학의 경우에는 인간의 정신 자체를 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축소시켰다(p. 70).
한 개인이 잉태되기 전에 개체의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특성을 조작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격이라는 범주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런 경우 개인은 제품이 되고 스스로를 책임있는 주체로 경험하지 못한다(p. 72)..
하버마스: “과학의 결과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의 지배 담론에 위협이 되므로 과학을 제한해야 한다(p. 71).”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는 자유와 자율성 그리고 윤리적 책임 등을 어떻게 재고할 것인가?
자유는 단지 사용자의 착각도 아니고 허울뿐인 외양도 아니다. 자유는 자연이라는 기초, 혹은 토대와 관련된 외양 자체로서의 자유’(최소한의 자율성)다.(p. 72-73).
게오르그 루카치, 니콜라스 하르트만의 딜레마:
상위 차원의 상대적 자율성은 자연에 존재하는 실제 사실일까, 아니면 현실을 충분히 규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단순화된 개념화일 뿐일까(p. 74)?
대니얼 데닛은 물리적 존재론과 설계론의 이중 구조를 통해 이 교착 상태를 돌파하고자 한다.
물리적 층위: 세상을 물리 법칙으로 보는 관점
설계적 층위: 세상은 이미 설계되어 있다는 관점
Game of Life(John Horton Conway)

우리는 물리적 측면을 탐구하는 데 신경쓰기보다 설계적인 측면에서 거시적 형태를 예측하는 연구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p. 76).
“우리는 픽셀들이 더 높은 수준인 추상적 사유의 단계로 진입한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도 있다. … 우리는 어느 경우에든 그들이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고 가정하기만 하면 된다(p. 77).
다윈의 진화론은 반목적론적(anti-teleological)사유의 대표격인 이론이다(P. 79).
대닛이 제기한 이중 존재론의 문제:
기계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생명이나 정신처럼 ‘고등’ 형태의 자연적 상호작용을 최소 단위까지 추적한다면 무한한 빈 공간에서 움직이는 원자적 개체의 다양성을 마주할 것이라고 보았다(p. 80). … 하지만 20세기 물리학은 이 최소 수준(zero-level)을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닌, 환원이 불가능한 우연성으로, 혹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훨씬 혼란스러운 양자 파동의 원형적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자연에 부정성이 존재하는가?
의식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자연은 의도적인 부정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자연에는 기계적 단계에서 유기적 단계로, 나아가 영적인 단계로 점진적인 계층화를 이루기에 앞서 이 모든 것을 보완하는 더 근본적인 단계가 있어야 한다(P. 81).
과거를 재구성하기
관점1: 보편적인 자연법칙의 영역이 직접적으로 제한되면서 자유의 여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자연법칙의 예외 - 예시: 빅뱅
관점2: 자연자체가 완전하지 않다.
불완전한 인과적 연쇄가 중첩되는 다 중성 속에서, 주체는 완전한 자유의 공간을 얻는다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인과적 연결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p. 82).
T. S. 엘리엇: “과거는 현재에 의해 변화되며, 현재는 과거에 의해 이끌려 간다.”
셰익스피어: 하느님이 지구의 역사보다 오래된 화석 제작
칸트 이후의 초월주의: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이 화석 제작
정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인식 조정, 소련 붕괴 후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성 제거
루이 알튀세르는 … ‘선택의 자유’를 ‘호명’이라는 단어로 명명하고 그 의미를, 체제 안에서 상징적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행위로 제한했다(p. 86).
하지만 주체의 자유가 단지 다중적(심지어 상충하는) 호명에서만 비롯된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상징적 정체성을 부여받는 호명되는 주체 앞에는 반드시 호명받지 않은 체로 상태의 주체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p. 87).
경찰의 호명 “이봐요, 거기!”(p. 88)
알튀세르는 ‘죄책감’으로 인한 인과적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해석 과정에 개입되는 시간성을 부정하고 있다(p. 89).
라캉적 구조 속에 놓이는 주체: 무죄와 추상적이고 불확정적 죄책감 사이에서 분열된 주체는 타자가 외치는 불투명한 호명(“이봐요, 거기!”)에 직면한다(p. 90). … ‘시간을 초월한’ 교착 상태의 순간. 내가 상징 세계의 의무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권력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 이데올리기적 동일화는 오직 이 교착 상태에 대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월론을 넘어서
우리는 상징 세계의 소급 작용과 그 속에 틈입한 불만스러운 모습들을 쉽게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라캉처럼 “c’est comme ça(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말을 ‘sekomsa’로 축약해 부르며 기꺼이 현실을 인정해야 할까(p. 92)?
자비네 호젠펠러: 자유의지의 부정은 과학의 파괴라고 주장한 이들을 비판. 자유의지를 비과학적 허구로 치부.
이에 대한 마이클 에그너의 비판: 자유 의지는 모든 과학과 이성은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연구의 전제 조건이다. … 만일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자유 의지가 없다고 믿을 이유조차 존재할 수 없다(p. 93).
“좋아, 나는 설득됐어. 나한테 자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자유롭게 인정하겠어(p. 94).”
이미 칸트를 통해 알게 된 것처럼, ‘초월적’이라는 말은 세계에 접근하는 인간의 방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우리는 세계속의 수많은 객체 중 하나이기 때문에 현실을(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p. 94-95). … ‘초월성’이라는 것은 주체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한계를 보여준다.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적 지평이 현실로 환원되거나 현실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지평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의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실제 현실에 대한 독립성)는 운명과 일치 한다(p. 97).
현실을 인식하는 전통적 관점이 현대의 과학적 관점으로 전환된 것은 하이데거가 ‘사건’이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말한 사건은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건’을 자유의 궁극으로 설정하며 자유와 의지를 분리했다.
하이데거는 … 중요한 논점을 완전히 놓친다. 프로이트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무의식은 객관적인 인과 구조가 아니지만, 주체는 그것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p. 98).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는 이러한 재앙에 근거하고 있을 때에만 ‘사용자의 착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p. 99).
파스칼의 내기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 축소될 수 없다. 자유는 신학의 용어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심연의 균열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출처: 국민일보 2025-08-11 안광복 목사
라캉은 분명히 밝혔다. “인간의 욕망이 지옥이며, 욕망의 작용이야 말로 어떤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지옥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을 욕망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다(p. 101).
우리가 지지해야 할 것은 종료가는 체계의 내적인 장기 붕괴라는 유물론적 이행이다. 신이 악하거나 어리석다는 주장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훨씬 크 불안을 초래한다.
영화 <이브의 선택>의 사례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신을 거부해야 한다(p. 104).
하나의 주체인 나는 기표로서의 주체이며 기표의 사슬에 갇힌 주체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혹은 주장)는 타자의 결핍이다(p. 105).
자유의지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논지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스스로 맞서는 일은 여전히 합리적이다(p. 106).
어쩌면 결정된 운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일에 개입하지 않고 갈등을 피한 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 돌고 돌아서 종교적 세계관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외형적으로’ 같은 결과인 것이 흥미롭다.
과거는 소급해서 재해석할 수 있는 반면에, 미래는 결정론적 우주론에 의거한다면 닫혀 잇다.
우리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이해’의 단계를 넘어서서) 우리의 과거를 바꿔야 한다. 즉 과거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이 추동하는 방향과 다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과거를 재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결정된 조건하에서만 급진적인 자유 행위가 가능한 이유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이미 결정된 것임을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이 공포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혹은 자유로운 선택에 수반되는 견딜 수 없는 무게일 것이다.
대타자이자 과학적 결정론에 대한 정신분석적 주체의 대답은, 나의 자유가 단순히 ‘사용자의 착각’이 아니라 그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라는 것이다(p. 107).
우리는 자유로워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순간적으로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위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로울 때는 논리를 다질 때가 아닌 자기 배반적인 행위를 실천할 때뿐일까?
라캉: 소외에서 분리로의 전환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잠재력을 되찾는 순간 신은 사라진다.
칸트의 자율성 개념
“내가 자유롭게 행위하고 원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나의 병리적 동기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할 때 나는 정말로 자율적이다(p. 113).
과학적 담론이 암시하는 주체는 무엇일까(p. 114)?
우리가 다루는 주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다.
주체는 오직 다른 주체를 향해 존재하며, 타자가 드러내는 욕망의 심연과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타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그토록 큰 불안감을 주는 이유가 이것이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다른 ‘주체’의 표현으로 믿을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p. 115).
주체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정이며, 우리가 그 주체를 완전히 객관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3. 지양될 수 없는 잔여, 그리고 죽음의 죽음
절대자의 관점
우리의 논의가 영지주의와 헤겔주의의 혼종으로 퇴행한 것일까? 그래서 포스트 헤겔적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절대자의 권위를 다시 소환한 것일까? … 그런데 헤겔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절대자를 이야기 한 것일까(p. 116).
테리 핀카드는 헤겔에 대한 칸트적 해석이 갖는 한계점을 인간이 절대자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을 통해 정확히 설명했다(p. 119).
“하버마스 등의 철학자들은 헤겔이 절대자와 역사를 강조한 사실이야 말로 헤겔 철학의 약점이며, 이 때문에 그의 철학 체계가 후대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할 만큼 멀어져버렸다고 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의 개념을 우리의 인식 너머 존재가 아닌 합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경험적 과학과 세속적 사회가 발전한 현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자신의 존재 이전 영역인 절대자의 개념이 ‘입증 가능한 수준의 명백한 거짓’으로 자신에게 들씌워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p. 120).
헤겔에게 ‘절대자’가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속성은 ‘자기 관계성’이다. 절대자는 … 상호작용 방식과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 모두를 스스로 결정한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조건은 자유가 갖는 최소한의 여건과 일치한다. 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조건을 최소한이나마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p. 121).
헤겔도 여러 번 강조했듯, 절대자는 객관과 주관의 통일체다. … 자유는 주관적 경험이지만, ‘객관적’ 현실에 대해 갖는 자유(혹은 자율성)가 과학의 본질이다(p. 122).
객관과 주관을 통일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개념이 초월의 지평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인식론적 모순과 장벽을 존재론적 해석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해소될까(p. 123)?
인간에게는 의식적 생각(손가락을 움직이는 뒤늦은 의사 결정)과 ‘맹목적’ 신경 작용(손가락을 움직이는 신경 활동)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의식적 ‘정신’의 과정도 존재하는 것일까?
결정: 셸링 - 주체는 자신의 의식적이고 시간적인 삶 속에서 그 선택을 피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 경험
수동적 결단의 역설: 우리 존재의 토대가 되는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가장 자유로운 선택(p. 124).
결정: 자크 데리다 -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의 결정”
나는 이미 그 속에 던져져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스스로 구성한 것으로 추정해야 한다.
칸트: 우리는 단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병적 본성의 노예가 되는 자발적 충동에 ‘반하여’ 도덕 법칙을 선택하고 따를 때 자유롭다(p. 125).
칸트는 … 모순에 빠진다. 크롬웰 시대에 벌어진 찰스 1세의 처형과, 1793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왕의 처형 사건에 대해 칸트는 군중이 왕에게 가한 단순한 복수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p. 127). … 만일 그가 ‘사악한 악이 존재할 가능성을 주장한다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 그렇게 된다면 정의의 왜곡을 정의 자체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신의 죽음
(헤겔은) 칸트가 보여준 분류법상의 혼란을 해소하기는커녕, 이를 오히려 철학 원리로 발전시킨다.
헤겔이 상정한 ‘절대 앎’은 모든 현실을 지식의 자기 매개로 매끄럽게 통합하는 완전한 지양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움켜쥐려는 폭력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단념하는 급진적인 ‘포기 행위’에 가깝다(p. 128).
헤겔의 논리 체계가 종착역에 이르고 논리의 과정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를 자연으로 ‘해방’시킨다. 헤겔에게 자연은 ‘논리상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성에 내재한 논리(혹은 이데아)’다(p. 129).
발리바르가 주목한 헤겔의 자기 관계적 부정성의 공식들: 죽음의 죽음
죽음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존재(유한성으로 썩어가는 신체적 현실)는 부정된다(p. 130).
신은 그 자체로 부정성을 통해 섭리하는 절대적인 힘이며, 모든 긍정적인 존재를 ‘떨쳐버리는’ 절대적인 부정성의 힘 자체다.
부활 가운데서 살아남은 영은 성령, 곧 신을 믿는 자들의 공동체다(p. 131). … 부활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기적이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 그들의 내면에서 벌어진 일이다(p. 132).
‘죽음의 죽음’이 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p. 134)?
만일 신이 스스로를 의심한다면, 신은 인간처럼 유한해지며, 스스로의 신성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둘째는, … 직접적인 무신론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무신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의 자기 파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p. 135-136).
정치 행위로서의 자살
이 혼돈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발리바르가 제시한 ‘부정의 부정’의 모호성을 넘어서야 한다. 가장 급진적인 자기 부정, … 자살을 정치적 행위로 상정할 수 있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터블란시 델포트: 백인들에게 “윤리적 행위인 자살을 감행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모든 백인이 어떤 식으로든 모조리 사라진다면 어떨까? … 가난한 흑인 다수는 빈곤의 원인으로 지목할 대상을 잃어버린 뒤 더 큰 혼란 속에서 허우적댈 것이다.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일부 대상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p. 140).
흑인 스스로가 핵심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p. 141).
말콤 X는 흑인들이 상징적 자살의 제스처, 즉 비존재의 영역을 떨쳐내는 제스처를 통해 뿌리 없는 상태를 끝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위한 영역을 해방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제스처는 백인 지배를 단순히 무의미하게 만든다.
말콤이 살해된 것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흐렸기 때문이다. 흑인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 해방의 길을 열어줄 상징적 자살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p. 142).
라캉의 잉여향유
억압 속에 살아남아 있는 어떤 것이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은 부정에 저항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된 (자기 관계적) 부정을 통해 기이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을 형성한다(p. 146).
이데올로기의 체계는 주체들에게 ‘잉여 향유’를 제공하며 ‘억압’(그리고 포기)을 받아들이도록 ‘유혹’한다. 이때의 잉여 향유는 바로 ‘과도한’ 향유를 포기하며 생성된 향유다. 잉여 향유는 본질적으로 고통 속의 향유, 즉’ 고통 속의 쾌락’이다(p. 148).
‘기본’ 억압만 있고 잉여 억압이 없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잉여 억압이 만들어낸 향유의 주체들에게 ‘기본’ 억압은 매우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 억압이 ‘강해질수록’ 충격은 줄어들고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억압이 줄어들면 약한 정도의 억압에도 갈등은 더해지고 사람들은 반발한다 (혁명이 억압의 정점에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수준으로 후퇴했을 때 벌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억압이 줄어들면 억압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아우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은 불멸의 주이상스-불멸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거세’되지 않는다(p. 150). … ‘순수한’ 거세는 존재하지 않으며, 거세는 그것을 넘어서는 불멸의 과잉으로 인해 지속된다. 거세와 과잉은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쪽 면에 같은 실체가 새겨져 있는 것과 같다(p. 151).
어떤 독립체에게 … 내재적이고도 구조적인 장애가 발생하면 ‘대상’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속된다.
- <햄릿>의 살해된 왕
실패로 돌아간 부정의 부정
(근대성에서) 나타나는 부정의 부정은 새로운 긍정성으로 전환되기보다 그 부정(바닥, 제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실패로 귀결된다. …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실패할 뿐 아니라 불행을 추구하는 데에도 실패한다(p. 152).
- 유고슬라비아의 무능하고 부패한 경찰과 관련된 농담
- 이디스 워튼의 <에단 프롬>에서 자살 시도
타나 트렌치의 소설 <브로큰 하버>. (등장 인물 중) 누구도 타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려 한다. 그러나 소설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게 오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 개인이 윤리적 판단을 내릴 때조차 사회 시스템은 교모하고도 엉뚱한 결과를 주인공들에게 떠안긴다(p. 159-160).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점차 프롤레타리아의 삶으로 미끄러진다. 심지어 우리는 사회적 계층의 하층으로 향하는 행보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 이러한 현실 앞에 오늘날 서구 급진 좌파들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p. 165).
헤겔이 영혼의 발전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 바로 이토록 이상한 ‘부정에 대한 하향 부정’인 것일까? … 헤겔은 단순히 절대적 인식이 역사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닫힌 범주의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체계가 닫힌 후’에도 ‘시간은 지속되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서운 관성의 공허’라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p. 166).
그런데 만일 유한성과 불멸성을 나누는 이분법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떨까? …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국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부정의 부정’이라는 개념이 실패로 귀결된다는 것은 헤겔에서 벗어나는 개념이 아니다(p. 167).
양쪽 모두 목숨을 걸고 끝까지 나아가려하지만 그럴 경우 승자가 존재할 수 없다. 한쪽이 죽고 다른 쪽이 남는다고 해도 살아남은 쪽을 인식해줄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식의 전체 역사, 즉 인간과 인간 문화 전체는 원초적 타협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는 만남에서 한쪽(미래의 하인)이 잠시 눈을 감고 시선을 돌리면 극한의 상황은 모면된다.
헤겔에게 변증법적 과정의 ‘지양될 수 없는 잔여’는 불쾌한 ‘언데드’, 즉 부정의 부정이 실패한 결과이며, 급진적인 자기 부정 이후에 살아남는 존재다. 이 불쾌한 불사의 존재로서의 과잉은 스스로의 내부에서 모든 이분법적 대립을 무너뜨린다(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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