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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 : 푸코는 지리적 불연속성을 환기함으로써 맑스주의를 계속 비판한다. ‘지리적(지정학적) 불연속성의 실제 표지는 국제 노동 분업이다. 그러나 푸코는 착취(맑스주의적 분석의 장인 잉여가치의 추출과 전유)와 지배(‘권력연구)를 구분하는 용어를 쓰면서 지배 쪽이 제휴 정치에 기초한 저항 가능성을 더 많이 갖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권력개념에 대한 그런 일원론적, 통합적 접근(방법론적으로 권력--주체를 가정하는)이 착취의 특정 단계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리적 불연속성(92)에 대한 푸코의 비전은 지정학적으로 제1세계에 특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94) 이와 대조적으로 초기 데리다는 지식 생산에서 작동하는 에스노 중심주의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95) 데리다는 17세기 유럽에서 유럽적 의식의 위기를 가리키는 징후를 구성하는 글쓰기의 역사적 과정에는 세 종류의 편견이 작동하며, 그것들이 신학적 편견’, ‘한자적 편견’, ‘상형문자적 편견이라고 쓰고 있다. 첫 번째 편견은 신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시원적 혹은 자연적 문자(인쇄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쓴 글)를 썼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편견은 한자는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완벽한 청사진이지만 단지 청사진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철학적 글쓰기는 역사와 상관없는 독립적인것이라고 하면서 한자를 손쉽게 배우는 문자로 지양시켜 현실의 한자를 폐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편견은 이집트 문자는 너무도 숭고해서 해독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97)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타자를 인정하는 여정은 식민 주체의 제국주의적 구성 및 토착 정보원형상의 폐제 속에서 더욱 더 흥미롭게 추적될 수 있다. (98) 그것은 또한 민족주의자민족을 등치시키면서(이는 페미니스트여성을 등치시키는 것만큼이나 반생산적인데) 전략적인 배제를 통해 작동하는 남성주의적 급진주의와 협력한다. (...) 여기서 컬러는 서구 페미니즘의 주류 기획의 일부를 이룬다. 이 기획은 계급 상승과 관련해 여성과 남성이 개인주의적 권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을 지속시키면서 전위한다. (99) 나는 이 문제를 하나의 문장[“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으로 다시 써서 단순한 기호 작용의 대상으로 바(100)꾸었다. 이 문장은 무엇을 뜻할까?

이러한 변형의 제스처는 다른 주체에 대한 지식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사라 코프만은 프로이트가 여성을 속죄양으로 써먹는 것이 지닌 깊은 애매함을 시초의 욕망이자 지속되는 욕망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읽을 수 있다고 시사해 왔다. 여기서 시초의 욕망이란 히스테리에 걸린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어 그녀를 히스테리의 주체로 변형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시초의 그런 욕망을 딸의 유혹으로 바꾸는 남성주의-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적 형성은, 단일체적 3세계 여성을 구축하는 것과 똑같은 형성의 일부이다.

 

P109 : 상업에서 영토로의 이행과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내 문장에 최초의 역사적 기원을 하나 제공한다면, 그러한 기원은 노동으로서 인간성의 좀더 일반적인 역사 속에서 명백하게 상실된다. 맑스는 그 기원을 인간 존재와 자연 사이의 물질적 교환 혹은 신진대사’, 자본주의적 팽창의 이야기,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느린 자유화, 생산양식 서사, 봉건주의에서 중상주의를 경유해 자본주의로 가는 이행 속에 두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서사의 불안정한 규범성조차도 변화가 없다고 추정되는 아시아적생산양식이라는 임시변통에 의해 지탱된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불안정한 그 규범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입한다. 자본 논리의 이야기가 서구의 이야기이며, 제국주의만이 생산양식 서사의 보편성을 공격적으로 주장할 수 있고, 오늘날 서발턴에 대한 무시와 침해가 좋든 싫든 전 지구화의 이해관계 속에서 근대화의 이름으로 제국주의 기획을 지속시키는 일임이 분명해질 때마다 말이다.

 

P110 : 좋은 사회를 확립하는 자로서 제국주의(혹은 지구화)의 이미지는 여성을 같은 종족에게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 권한을 겉으로만 여성에게 부여하는 가부장적 전략의 이 위장을 어떤 식으로 검토해야 하는가? (111) 여성은 자본의 이해관계가 깔여 있는 규범화와 피식민 남성의 퇴행적 선망사이에 붙들려 있다.

 

P130 : 푸코는 억압의 속성은 단순한 형법이 유지하는 금지들과 구별되는 그런 것이다. 억압이란 사라지라는 선고의 기능뿐만 아니라 침묵하라는 명령, 비실존을 긍정하라는 명령의 기능을 잘 수행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할 것도, 볼 것도, 알 것도 없다고 진술하게 한다고 쓴다. 제국주의-속의-여성의 범례로서 수티의 사례는 주체()와 지식의 대상(억압)사이의 이런 대립에 도전하고 그 대립을 해체할 것이다. 또한 그 사례는 침묵이나 비실존과는 다른 무엇으로써, 주체와 대상 지위 사이의 폭력적인 아포리아로써 사라짐의 자리를 가리킬 것이다. (132) 포스트모던 자본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올바른저항에 매개된 접근밖에 할 수 없다면, 주변부의 역사에서 나온 사티 이데올로기가 어떤 개입주의적 실천 모델 속으로 지양될 수 있을까? 상실된 기원에 대한 그런 모든 명백한 향수는 특히 대항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기적 생산을 위한 기반으로 삼기에는 의심스럽다.

 

P138 : 1. 우리가 단순히 포스트식민 사람이거나 에스닉 소수 집단의 구성원이라고 해서 서발턴인 것은 아니다. ‘서발턴이라는 단어는 탈식민화된 공간의 순전한 이질성을 위해 남겨진다.

2. 서발턴 집단의 구성원과 시민권 혹은 제도성의 회로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선이 확립될 때, 그 서발턴은 헤게모니로 가는 장구한 도정에 투입된다. 우리가 좀 모순된 표현인 서발터니티를 보존하기에 대해 낭만적 순수주의자 혹은 원시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 점이 전적으로 욕망되어야 한다(에스닉 기원에 대한 박제화된 혹은 교과과정화된 접근은 서발터니티를 보전하기와 동일하지 않다.). 우리가 이 점을 기억하면 사명 운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작업에 자긍심을 갖게 된다.

3. 이 흔적-구조(드러냄 속의 지움)는 피상적인 유토피아주의에서가 아니라, 비말 크리슈나 마틸란이 도덕적 사랑이라 브른 것의 심층에서 우러나오는 정치적 액티비스트의 비극적 감정으로 표면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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