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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역, 1961 (역 2019)
Les damnés de la Terre, 2002
The wretched of the Earth, 2004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의 서문 (1961) 에 관하여
전체적 조망 :
- 프랑스인들, 유럽인들, 백인들에게 고하는 텍스트
- 파농 책의 유명세에 기여
-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

번역어
이주민 (Fr) Colon, (En) Settler
식민주의자 (Fr) Colonisateur, (En) Colonizer
식민주의자 : 식민화 하는 나라나 그 구성원으로서 식민지화를 실천하는자
이주민 : 본인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자. (그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나 자국을 위해 행동함.
식민화된자 (Fr) colonisé (En) colonized
토착민 혹은 원주민 (Fr) indigène, (En) native
조국 혹은 국가 nation (p.23)
모국 (Fr) métropole (En) mother country
원문에 더해 참고한 기본 자료
https://shs.cairn.info/revue-vie-sociale-et-traitements-2006-1-page-148?lang=fr
역사적 배경 :
드골은 1958년부터 권력을 잡고 비밀리에 알제리 임시정부와 협상 시작.
알제리 측은 급진적 행동 시작. OAS 육군 비밀 조직 극우단체 활동. 하르키(알제리계 친프랑스인들)는 프랑스 비밀경찰에게 알제리 혁명가들의 신변을 제공받고 그들을 고문하기도 함.
1960년 9월 4일
121명의 선언 발표. 프랑스 좌파의 알제리 독립 지지 선언 (사르트르 참여). 공산당 측은 이 선언에 반대.
1960년 9월 6일
장송 Jeanson 네트워크 대원 (알제리 FLN 협력 혐의로 수감) 재판 : 사르트르는 이에 편지를 보내 알제리 독립을 위한 프랑스인과 알제리인의 연대를 지지.
드골 측은 이것이 국익에 반하는 태도라고 평가하나, 동시에 “사르트르가 FLN만세를 콩코드 광장에서 외치는게 그를 체포해서 잡음이 생기는 것보다 낫다”고.
1960년 10월 3일
샹젤리제에서 7000명이 데모하며 “사르트르를 쏴라”고 외치다.
파농은 사르트르의 독자였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인용하듯, 사르트르가 쓴 니그로와 마다가스카르 흑인 시인 선집(상고르가 수집한 )의 서문 “흑인 오르페”을 읽었다. (“당신들은 그 검은 입들이 드디어 닫힌 입을 열었을 때 무엇이 나오기를 기대했는가? 그들이 당신을 칭찬할 거라고? 우리의 아버지들이 억지로 숙이게 해서 땅에 처박았던 얼굴이 드디어 드러날 때, 그들의 눈빛에 경배가 비칠 거라고 생각했는가?”) 유대인 차별에 대한 문제 역시 인용한다.
1961년 여름, 파농은 투병 중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쓴다. 그는 그의 편집인이었던 마스페로에게 연락해 사르트르가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한다. 이후 파농과 사르트르는 로마에서 만나 3일간 이야기한다. 6개월 후 파농은 백혈병으로 죽는다.
사르트르의 서문은 유럽 식민주의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 그는 이주민 settlers / colons 과 원주민 indigène / native 사이의 변증법을 말한다. “유럽인들이여, 나는 이제 적의 책을 훔치고 그것으로 유럽을 고칠 것이다. 즐겨라.”
파농에 관해 그는 말한다. : “우리는 바람의 씨앗이고, 폭풍은 그였다. … 우리는 그의 사람들이었고, 그는 우리 사이에 있었다. 새로운, 보다 나은 인간으로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탈식민주의의 고전으로서 자리잡는다.
사르트르는 이 서문에서도 그의 책 존재와 무의 기본 원칙을 견지한다. “존재는 본질보다 앞선다.”
사르트르와 그의 친구 폴 니장 (전쟁 중 1940년 36세에 사망) : 제2차대전동안 사르트르는 전쟁 전 개인주의와 개인에서 사회와 사회주의로 이동했다. 그는 포로로 잡혔고 그 곳에서 “우애”를 발견한다. 포로였을 때 연극을 상연하며, 석방된 후 “사회주의와 자유” 운동을 메를로퐁티 등과 함께 만든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때로는 동지로 행동하다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 결별한다.
자유와 집단
사르트르에 있어 두 가지 주제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다. 그의 입장은 “우리는 독일 점령하에서보다 더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라는 역설로 표현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위치를 선택할 수 있기에 자유롭다. 식민지의 역사가 그 예시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어떻게 혁명으로부터 집단이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 사르트르는 파농이 보여주는 것처럼 식민지적이거나 제도적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사회를 변혁시키는지, 변증법적 비판을 도구로 말하고 있다.
식민지화
첫번째 식민지 폭력은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룬다. 이것은 일단 그들을 사람 이하의 존재라고 말한다. 언어, 문화, 전통을 파괴한다. 그들을 피로하게 하고 먹을 것도 적게 주지만 동시에 그들이 생산적일 수 있도록,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현재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상황과 다른 점?) “그런 이유로 이주민들은 길들이기를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원주민이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 물론 어느 정도까지만-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화의 약점이다. “...가차 없는 논리에 이끌려 탈식민화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학살할 수 없으나 동시에 폭력을 완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탈식민화는 궁극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후 식민지는 그리스-라틴 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든다. 지배자들은 진화하는 그들에 맞서 인간화를 허용한다. 한편 그 새로운 종족은 “놀라운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관과 그들이 살아가는 참된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으며, 그들로서는 그 가치관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ㅡ 그렇다고 그것에 동화될 수도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명하려 했다.” 유럽은 귀머거리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맹목이 원주민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원주민들의 투쟁
이 책을 통해 파농은 식민지 전략을 분석하여 “그의 형제들”에게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식민지화는 감정적 유대를 만든다. 이주민은 식민지화된 이에게 자신들을 어머니처럼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인도적인 호의가 그를 조금 도와줄 때마다 감사하라고.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난다. 원주민이 해방될수록, 그 해방은 이주민을 방해한다. 독립을 원하는 원주민에게는 폭력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 “원주민은 예속 servitude과 주권 souveraineté / supremacy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주민이 그에게 가한 폭력만을 그에게 줄 수 있다. 그는 “공포에 떨거나 공포를 주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책 번역 :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남에게 두려움을 주게 된다. P29)
그 반란의 폭력성은 그의 집단식 무의식의 표현이자,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이것은 야만적인 본성의 폭력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획득으로서의 폭력이다. 그의 분노로부터, 식민지화된 이는 그의 인간성을 찾고, 그것이 그의 무기다. « 폭력의 아이, 그는 매 순간 자신의 인간성에서 폭력을 끌어낸다. … 그것은 … 그와 내부와 주변에 드리워진 식민지적 암영을 조금씩 걷어낸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이 투쟁에서 그는 이미 잃어버린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는 그가 송장이나 다름없다고 여긴다. … 죽어가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서 생존보다는 승리를 원한다. … 우리는 인간성이 죽음과 절망 가까이에 (아래에) 있다고 여긴다. «
이 반란은 그가 국가를 구성할 수 있도록 만든다. “유럽인을 쏘아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의 행위다. 억압자를 없애는 동시에 피억압자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죽은 자와 해방된 자가 남게 된다.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 아래 조국 nation의 흙을 느낀다.” 식민지화의 무기 중 하나는 분단 division이다. 이주민은 영토를 분할하고 계급과 인종의 경쟁을 점화한다. 그는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원주민들의 폭력을 우회시킬 수 있다.
모든 해방 투쟁은 그러므로 스스로의 소외에 대한 투장이다. 내면 투쟁의 위험과 스스로의 문화로 회귀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원주민은 거기에서 스스로의 독립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파농은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주민은 그런 회귀가 식민지화를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원주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과거로의 귀환이 아닌) 혁명이다. 파농은 혁명에서 새로운 국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역동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혁명의 통합을 위협할 수 있는 부족간의 전쟁 같은 위험 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파농의 글은 여기에서 끝난다. “그는 앞길을 보여주었다. 그는 싸우는 사람들의 대변인으로서 단결을 외친다. 아프리카 대륙이 일체의 알력과 지역주의를 버리고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원주민, 유럽인을 위한 거울
파농의 책은 유럽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그 책에서 중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주민이 식민지인 colonisé을 만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주민은 식민지인들이 이주민을 대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식민지인은 이제 이주민이 이름붙인 소위 원주민의 “해악적인 본능”을 파괴하고자, 이주민이 그들에게 내보인 비인간성을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이 본능이란 사실 “(이주민) 자신의 잔인함”에서 돌아온 이미지일 뿐이다.
이주민은 그가 하위 존재라고 간주한 이들에게 끼친 트라우마를 잊는다. 그는 그들이 스스로의 인간성과 이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을 기억한다는 것을 잊고,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뜨리게 된다”는 것도 잊는다.
반란이란, 그들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서구 좌파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해하고, 그들의 반란을 이해한다. 하지만 식민지적 친절함으로 그들은 원주민들이 “더 기사도적이고” 더 인간적이 될 것을 원한다. “너무 심하네요, 우리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유럽 좌파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마찬가지다. “그 아름다운 영혼들은 인종차별 주의자다.”
사르트르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는 자신의 서문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 서문 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한편으로, 이 독립을 위한 투쟁은 우리 자신 역시 탈식민화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성의 스트립쇼”다.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이주민은 현재 난폭하게 뿌리를 뽑히고 있다. … 유럽인은 노예와 괴물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치유될 것인가? 사르트르는 묻는다. 1961년 당시 즉각적인 대답은 알제리 전투원들과 연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할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확신한다.”
- 현재 정세 (글이 쓰여진 2005년) : 미국 제국주의와 폭력의 양상.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에서 파농을 1957년에 추방. 사르트르는 테러 위협을 받고 아파트가 폭파됨. 그러나 에메 세제르는 파농에 대해 “살아야 한다는 호소를 이루는 삶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글은, 인간의 역사란 마무리된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중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 모두가 그것의 주인이다.
불어판 알리스 셰르키 Alice Cherki (알제리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의 서문 (2002) 중 사르트르의 서문에 대한 평가
그는 사르트르의 서문이 파농의 본문보다 더 많이 읽혀진 것 같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그 텍스트가 파농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우회하고, 서문과 본문 사이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텍스트는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파농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그것을 간과한다.
사르트르는 폭력에 대한 파농의 분석을 급진적으로 받아들인다. 사르트르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파농은 폭력을 단순히 하나의 의무적인 통로로 본다. 이런 부분에서 사르트르의 글은 범죄를 부추기는 것 같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파농을 읽어라. 궁지에 몰린 그들에게 광적인 살인의 충동이 왜 집단무의식의 표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유럽인을 쏘아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의 행위다. 억압자를 없애는 동시에 피억압자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죽은 자와 해방된 자가 남게 된다.”와 같은 문장들이 파농의 제안을 좁히는 위협이 된다. 사르트르는 파농이 말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범죄들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그리고 그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폭력)이 아니라, 범죄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판 호미 바바 Homi K. Bhabha의 서문 (2004)
그는 한나 아렌트의 폭력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며 사르트르의 주장과 겹쳐 다시 읽는다. (한나 아렌트, 폭력에 관하여 On violence, 1970) 그는 “아렌트에게 있어 파농의 폭력은 정치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그것은 강렬한 인간 자유의 첫 숨이다.”
개인적 평가와 숙제 :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비관론적인 텍스트? Or 전략으로서의 선동적 “트롤” 글쓰기?
한편으로는 무엇이 되었던 행동으로 옮기기를 요구하는 강력한 텍스트
(“당신의 수동성은 당신을 억압자의 편에 서도록” 할 뿐.)
사르트르의 화제성으로 파농의 텍스트를 놓치지 않도록 읽고, 본문을 읽은 후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오늘 우크라이나-러시아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이에서, 한국내/외에서 일어나는 많은 분쟁 사이에서 어떤 원칙으로, 태도로, 행동으로 살 것인가? 한국에서는 80년대 운동권에서 자주 인용되었던 것 같다. 현재 하마스의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파농의 텍스트를 가져오는 경향이 보인다. 그외 블랙 팬더 당이 어떻게 파농의 이론을 받아들였는지, 말콤 엑스나 넬슨 만델라의 활동이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팔레스타인 관련 활동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보너스 1 :
1967년 6일 전쟁(이스라엘)에서 사르트르가 이스라엘의 권리를 위해 서명 운동을 벌이자 파농의 부인이었던 조시는 팔레스타인 인 편을 들며 출판인 프랑수와 마스페로에게 파농의 책에서 사르트르의 서문을 제하기를 요구했다.
https://www.versobooks.com/blogs/news/josie-fanon-and-her-fidelity-to-palestinian-liberation
“이제 사르트르와 우리, 사르트르와 파농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1961년에 인간의 역사를 만드는 쪽에 서기를 원했던 사르트르는 이제 다른 편에 서 있다. 살인자의 편이다. 베트남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살인을 하던 그들의 편이다.”
보너스 2 :
에드워드 사이드의 사르트르 평가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https://www.lrb.co.uk/the-paper/v22/n11/edward-said/diary
https://www.monde-diplomatique.fr/2000/09/SAID/2409
보너스 3 :
사르트르는 시오니스트였는가?
https://www.middleeasteye.net/fr/decryptages/jean-paul-sartre-palestine-israel-sionisme-guerre-six-jours-monde-arabe
보너스 4 :
보너스 / 수능 준비 바깔로레아 사이트에서 번역
https://www.bacdefrancais.net/preface-damnes-de-la-terre-sartre.php
- 수능 수준 요점. 요점만 너무 갖추다보니 임팩트가 적은..
I. 시사성 글
1. 현대 팜플렛으로서
- 여러 수신자들
- 우리에서 당신들에게로
- 반란/혁명에의 연대
2. 역사적 사실
- 식민지 시대
- 반란의 시작
- 그 결과
3. 현재성
- 식민지성의 정의
- 알제리 전쟁 중의 메시지들
- 문화화 acculturation
II. 은유적이고 역설적인 글
1. 편견적 용례
- 흑색, 황색 등의 용어
- 진실의 의인화
- 식민지와 개의 비교
2. 역설
- 황금 시대
- 어머니로서의 유럽 엘리트들 (이후 원주민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 연결)
- 소설적 방식으로 우리의 피상적인 식민지 이해 → 파농의 분석과 달리
3. 예시로서의 파농
- 권위적 호소
- 인용문으로 제시된 연설
- 수사적 질문
- 미래의 예시로서 제시되는 파농
III. 도발적이고 폭력적인 텍스트
1. 폭력적 텍스트
- 노예제 폐지
- “달군 쇠”로 표시된 동물처럼 다루어지는 식민지
- R로 수사되는 문학적 수사 (?)
- “달군 쇠”, “재갈을 물리다”, “이를 접착시키다”, “표백하다”, ..
2. 강경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비일관적인 표현
- 모순 형용 oxymore 과 의인화
- 거짓말 같은 연설
- 절망적인 운명
3. 결론을 내지 않는 끝
- 미래와 진실을 발견하자는 초대
- 과거에 대한 비판과 돌이킬 수 없는 사실들을 나란히 배치
- 일을 저지른 자들은 그에 책임을 져야 한다
- 상황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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