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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허물기 6장 발제문(2017.01.08).hwp


6장 인정을 향한 갈망

화니짱

벤저민의 이론이 이뤄낸 성과 중 하나는 상호주관성이 대상관계와 같지 않으며, 상호주관성은 대상관계에다가 외부의 대타자라는 개념을 더한 것이라는 주장인데, 여기서 외부의 대타자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 심리적 대상의 구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계가 대타자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타자에 대한 관계는 대상에 대한 관계를 이해할 틀을 제공한다. 주체는 대상에 대한 특정한 심리 관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심리 관계에 의해 또 그런 심리 관계를 통한 주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게다가 이런 여러 형성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향한 투쟁의 구조로 되어 있고, 그 구조 안에서 대타자는 자신이 심리적으로 재현하는 대상과 분리되기도 하고 분리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인정을 향한 투쟁은 대타자와 의사소통 행위를 시작하려는 욕망의 특징을 보이는데, 그 안에서 인정은 진행중인 어떤 과정, 심리적 파괴의 위험이 있는 과정으로서 발생한다. 헤겔은 인정이 항상 무릅쓴 위험을 ‘부정’이라고 지칭한 반면, 벤저민은 부정이라는 용어를 관계성의 변별적 양상을 기술하는 데 사용한다. 즉 나는 대타자가 아니며, 이런 구분에서 특정한 심리적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213)

 벤저민의 기획은 전능성과 접촉 사이의 긴장이 정신생활에 필수적이기는 해도, ‘분열’을 포함하지 않으면서 긴장을 생생하고도 생산적이게 유지하는 것으로 경험하고 또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벤자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대상을 비방하는 곳, 혹은 그러한 공격성이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정될 때 닥쳐올 심리적으로 버틸 수 없는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우리의 공격성을 대상에게 투사하는 곳에서, 부인을 수반하는 분열의 양상을 극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공격성은 인정의 과정을 단절시키고, 벤저민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런 ‘파괴’는 우리가 예측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런 파괴에 대항해서 공격성을 누르고 인정의 승리를 추구하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타자에 대한 관계가 대상에 대한 관계로 되돌아가는 때가 있더라도 대타자에 대한 관계는 회복할 수 있고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15)

 벤저민은 하나의 젠더와의 동일시가 다른 젠더의 거부를 수반하지 않는, 오이디푸스기 이전 시기의 특징인 ‘과포괄적 동일시’를 오이디푸스기 이후에도 회복할 수 있고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19) 그러나 과포괄성 모델은 그녀가 주장하는 차이를 인정할 만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탈아적으로 대타자와 연관된 자아, 문제의 대타자를 배제하지도 포함하지도 않는 동일시를 통해 탈중심화된 자아의 개념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220) 라캉은 다의성을 만들기 위해 소육격을 이용한다. 즉 “욕망은 대타자 욕망”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계속 욕망하는 게 분명하다. 사실 욕망하는 욕망이 욕망되는 욕망과 다른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은 최소한 동어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욕망이 스스로를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욕망은 단일한 욕망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형상을 취하면서 자신에게 타자가 된다. 게다가 욕망은 대타자를 원하고, 거기서 대타자는 욕망이 일반화된 대상으로 이해된다. 욕망이 또한 원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여기서 대타자는 욕망의 주체로 생각된다. (221) 이 마지막 공식에는 소유격 문법이 포함되며, 그것은 대타자의 욕망이 주체의 욕망의 모델이 됨을 시사한다. 물론 이것은 아마 만화경처럼 변화무쌍한 여러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 다른 오이디푸스적 해석도 있다. 나는 대타자가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허가된 대상보다는 나를 원하기를 바라며, 나는 금지된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도식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내게 금지된 사람을 자유롭게 욕망하고 싶다. 그리하여 대타자를 대타자로부터 몰아내고, 그런 의미에서 대타자의 욕망을 가지고 싶다. (222)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젠더의 문제들을 질문해야 한다. 규범적 젠더는 어떤 심리적 대가를 치르고 확립되는가? 상보성을 전제하는 것이 어떻게 분명히 동성애적 목적 때문에 경계를 넘은 것은 아닌, 자기 지칭적 이성애를 전제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 기꺼이 인정을 해주는 것이고, 그 인정이라는 게 우리와의 차이가 윤리적으로 표시되어야만 하는 다른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 합체기질과 파괴기질을 초월해서 자아들을 움직이는 상호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들을 제기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인정의 기준하에서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벤자민의 설명 안에 합당치 않은 희망이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간다. (232) 게다가 그녀가 서술한 과포괄성이 거부되지도 합체되지도 않은 채로 분리된 대타자를 인정할 조건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233)

 관계의 문제가 단순히 상보성의 작용, 자아에 속한 것을 다른 곳에 투사하는 작용, 마땅히 별개로 간주해야 할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는 작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구조상 결국 이원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인정 모델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타자에 대한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따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나온 수많은 모호한 공식들도 받아들인다면, 대타자를 인정하는 데는 양자 관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외관상 드러나는 모습으로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전제가 필요할 듯하다. (234) 관계가 원래 양자 간의 것이라 한다면, 나는 대타자의 욕망 한가운데 있으므로, 따라서 당연히 나르시시즘이 충족된다. 그러나 욕망이 그 경로를 찾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닌 릴레이 경주를 통해 작용한다면, 대타자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당연히 변형될 수도 있다는 위험에 놓일 것이다. 우리는 심리적 응축과 전치의 모든 역사에서, 아니 정말로 에고를 형성하는 포기된 대상관계의 침전물에서 대타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대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필연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삼지 않는 역사와 함께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인정에 꼭 필요한 겸양의 면모이자, 사랑에 관여하는 인정의 면모가 아닌가? (235)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에 관한 장에서 인정개념을 소개할 때, 자기-상실이라는 관점에서 대타자와의 최초 만남에 대해 말한다. 헤겔은 의식이 어떤 것이건, 자아가 어떤 것이건, 다른 것에 자신을 반영해야만 자신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36)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상실을 거쳐야 하며, 한번 지나가면 과거의 자기 모습으로는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의식은 그 반영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회복할 테니, 다른 것 안에, 어쩌면 다른 것으로서 반영된다는 것은 의식에 있어 이중적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반영의 외적 위상 때문에 의식은 자신을 스스로에게 외적인 것으로 회복할 것이고, 그에 따라 계속해서 길을 잃게 된다. 따라서 대타자와의 관계는 변함없이 양가적일 것이다. 자기-지식의 대가는 자기-상실이 될 것이고, 대타자는 자기-지식을 안정시킬 가능성과 손상시킬 가능성을 둘 다 제기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아가 대타자가 없는 자신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점이며, 자아의 ‘관계성’이 자아가 누구인지를 구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와 밴저민은 모두 이 마지막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가 다른 부분은 이 관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정신현상학’ 중에 어떤 자아가 등장하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이전 모습과는 시간적으로 동떨어져 있다. 자아는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하는데 이는 자신으로 되돌아가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번도 그 모습이었던 적이 없던 자아가 되기 위해서다. 차이는 돌이킬 수 없는 미래로 자아를 내던진다. (237) 이런 관점에서 어떤 자아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 모습과 거리를 유지하는데, 이는 자기-동일성(헤겔이 자기-확실성이라고 부른 것)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외부, 즉 자아에 대한 대타자로 던져지기 위해서다. 나는 이런 자아 개념이 벤저민의 저작에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헤겔의 면모를 갖오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확실히 ‘포괄적 자아’에서만큼 ‘포함’의 은유가 잘 작동되지 않을 법한 것이다. (238)

 레비나스와 드루실라 코넬에게 중요한 지점은 소유와 소유 부정의 논리를 넘어서는 운동으로 대타자를 주체의 나르시시즘 회로 바깥으로 끌어내는 운동이다. 사실 라플랑슈에게 타자성은 소유의 문제 너머에서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헤겔에게 자아는 대타자에 대한 일차적 매혹이라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런 일차적 매혹 안에서 자아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에 따라 두 개의 자의식이 서로를 인정하는 ‘주인과 노예’의 순간은 ‘생사를 건 투쟁’속에 있으며, 이 순간 이 둘은 대타자를 소멸시킬 공통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자기 반영성의 조건을 파괴한다. 따라서 이는 인정이 가능해지고 욕구가 자의식인 것이 되는 근본적 취약성의 순간에 있다. (239) 이 순간 인정이 하는 일은 확신하건대 파괴를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말은 자아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며, 모든 심화된 관계에 앞서 대타자에 양도된다는 뜻이지만, 대타자 역시 자아를 소유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타자에 양도된다는 의미다. ‘양도된다’는 용어는, 헤겔에게 자아가 대타자를 ‘포함’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라는 것을 뜻한다. (벤저민은 여기서 ‘포함’과 ‘합체’를 구분하려 하며, 실은 둘을 대립적인 것처럼 제시한다.) 자아는 언제나 그 자신에게 타자이고, 따라서 자신의 범위 안에 대타자들을 ‘포함’할 만한 ‘그릇’이나 통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아는 스스로에게 대타자가 되면서 자신이 항상 대타자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은 ‘합체’의 반대를 표시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자아는 대타자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즉 자아는 자신이 타자성과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안에서 자기의 외부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아는 타자성과 맺는 이런 관계‘인’ 것이다. (240)

 주체는 분열된다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주체가 단일한 전체이거나 자율적인 것이었다는 공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241) 주체가 분열되었고 지금도 분열 중이라면 어떤 종류의 분열이 최초의 것이었고, 어떤 종류를 우연한 심리적 사건으로 겪었는지, 만일 그런 층위가 있다면 이런 다른 층위의 분열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규정되는 관계가 양자적인 것이 아니라, 대타자로 제한되지는 않지만 대타자의 대타자 같은 것을 구성하는 역사적 유산과 미래의 지평을 언제나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누구‘인지’는 이따금씩 임시적으로 양자 관계의 형식을 취할 뿐인 욕망의 시간적 연쇄 안에 이는 주체라는 게 합당해 보인다. 나는 관계성에 관해 사유하는 이원적 모델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욕망 속에 있는 삼각관계의 반향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며,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복합적인 것으로 만들게 도와줄 것이라고 반복해 말해두고 싶다.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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