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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허물기 / 8장 몸의 고백 / 주디스버틀러 / 2017.1.8.(일) /닥홍
이 글에서는 어떤 특정한 행위, 고백의 행위를 중심으로 언어, 몸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관계에 대해 숙고해보고자 한다. 푸코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보고 보살피는 특정 계급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교화하여 그들의 양심을 알아내고 인도하는 직업을 가진 특정 계급의 사람들의 등장을 사목 권력patroral power이라 명했다. 사목 권력은 영혼의 관리가 발생하는 권력의 형태이다.
푸코는 초기에 고백에 의해 나타난 억압 가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후기에 고백이 어떻게 영원한 언어화로 구성되지를 생각하며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인간을 넘어선 어떤 것, 신에 대한 애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하며 언어화는 자기희생이라고 쓴다.
우리의 욕망을 찾아내어 그 진실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 행위 자체로 자기에 대한 진리를 구성한다. 발화된 말의 수행적 힘을 강조한다. 사목 권력 안에서 고해자의 역할은 이제 무엇보다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욕망이 아닌, 언어화 과정을 통해 전환이나 변화를 이루려는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이런 전환이나 변화는 자아를 해석에 열어두며, 사실상 희생의 결과로 인해 다른 종류의 자기-제작에 열어둔다.
내게 고백은 숙고할 만한 중요한 순간이라고 여겨진다. 고백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던 욕망을 불러오거나 분석가 앞에서 이미 했던 완결된 행동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과 행동이 일단 분석가에게 말해지고 나면 그때 모습과는 다른 것이 되도록 욕망과 행동을 변화시킨다.
고백을 어쩌면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보자. 성에 관해 말하는 즐거움은 성에 대한 즐거움인가? 아니면 말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인가? 고백의 행위에서 고백자는 어떤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말했고, 다른 것들도 말했다. 고백의 말하기는 고백되고 있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몸의 행위가 된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의 한 장면을 활용하여 다른 관점을 제시해보겠다. 이 희곡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이 그의 법을 어기고 오빠 폴뤼네이케스를 땅에 묻었다고 크레온 앞에서 고백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통치권에 저항하는 행위를 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구도 그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분명히 금지하는 명령문으로 전달된 크레온의 칙령의 권위에 저항하면서 말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언어로 공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 행위를 완성하는 일이다. 그것은 그녀가 오만함이라 불리는 남성적인 과도함에 연루되는 순간이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크레온에게 맹렬히 저항한다고 생각되는 이 순간에 최소한 두 개의 문제적 장면이 있다. 첫째, 그녀는 크레온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둘 다 자신들의 행동을 공적으로 표명하고 인정받기 원한다. 둘째, 안티고네는 크레온에게, 또 크레온 앞에서 말하기 때문에 크레온은 그녀의 고백이 향하는 청중이자 고백이 의도된 대상이며, 고백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칙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법에 저항하는 행동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한 행동을 부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행동을 한다. 따라서 그녀는 크레온에게서 행위 주체성의 수사를 빌려오고 있다. 그녀의 행위 주체성은 다름 아닌 크레온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면서 나타나는데도, 이 거부의 언어는 그녀가 거부하는 주권의 관점-결국 크레온이 주권의 모델이다-을 흡수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주권을 주장함으로써 크레온의 주권적 발화 행위에 반대하면서 그를 맞받아친다. 안티고네의 자율성은 그녀가 맞서고 있는 사람의 권위적 목소리를 전유함으로써 얻어지며, 그것은 자기 안에 바로 그 권위의 거부와 흡수의 흔적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전유이다.
내가 이 장을 시작할 때는 고백이 특히 분석의 장면에서 발생할 때 자신이 전달하는 욕망을 변화시키는 행위로서의 고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고백이란 당면한 범죄 행위 때문에 ‘주체를 변화시키기’기도 하지만, 또한 그 사람이 하지 않은 행동에서 비롯될 수 있는 죄의식은 차단하고 합리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안티고네의 고백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벌에 대한 욕망과 죄의식으로부터의 최종적인 해방을 나타낸다는 일련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이 고백이 크레온을 염두에 두거나 끌어들일 것임을 안다는 게 분석가에게는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분석가에게 고백이란 언제나 오로지 어떤 사람의 영혼의 진실을 통제하고 그것에 대해 권위를 갖는 사건이라고 가정한 것은 푸코의 실수였다. 그러나 아마 푸코는 분석의 두려움에 관해 뭔가 말하려 했을 것이고, 그런 분석의 두려움 속에서 분석가는 사제나 재판관으로 투영되고, 피분석가의 행동은 필연적이고 반복적인 처벌로 이어지는 고백으로 투영된다.
발화가 고백의 구조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이 몸이 처벌받을지 아닐지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모호한 죄의식을 안고 있는 고백은 자기 부정을 두려워하면서도 요청하는 발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을 고해 신부, 아니면 정말 크레온이라고 생각하는 분석가는 분석의 특권을 사양하고 그 발화를 어떤 간청으로, 즉 저주의 치명적 결과가 때로 너무 확실해 보이고 그 저주를 무효화해달라고 간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화행과 전이에 관한 후기
분석적 발화는 수사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 말이 뜻하는 것이 분석 중에 말해진 것은 언제나 오직 말하고자 의도한 것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말하고 있는 것, 그 방식이나 발화가 말하는 것, 그 단어 선택 자체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려 한다는 의미이다.
전이의 맥락에 놓은 화행은 어떤 내용을 전하려는 노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말해진 내용과 관계가 있거나 없을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의미를 보여주거나 만들기도 한다. 특별히 중요해지는 화행의 한 양상은 발화가 몸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전이는 언어가 어떻게 교환되는가의 문제가 분명하지만, 말로 이루어진 것이라서 언제나 몸이 이 교환을 어떻게 구성해낼지의 문제가 된다. 말해진 단어는 기이하게도 몸이 제공한 것이다.
전이가 사랑의 한 형식이라면, 최소한 사랑에 대한 관계를 연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언어 속에서 발생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게 꼭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기가 행하기의 한 형식이라면 그리고 행해진 부분이 자기라면 대화는 뭔가를 함께 행하는 양식이고 다른 것이 되어가는 양식이다. 이런 교환 과정 중에 뭔가가 성취되겠지만 그게 다 완성될때까지는 무엇이 혹은 누가 만들어지고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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