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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안의 언어




우리는 광인을 ‘이미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광인이 내뱉는 모호한 ‘말’들을 두고서 광기, 즉 원래는 말이 없는 그 심연에서 솟아오른다고 여긴다. 그러나 광기와 언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광기와 언어는 궁극적으로는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 

말할 수 있는 가능성과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마치 쌍둥이처럼 동시대적인 것이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이성적이라 해도 거기에는 어떤 가능성이 놓여 있다. 우리의 기호 세계, 말, 언어 세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가능성, 친근한 의미를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 서로서로 충돌하는 어떤 말들의 단 한 번의 기적 같은 분출로 세계를 비스듬히 놓을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말을 하는 모든 인간은, 미칠 수 있다는 절대적 자유를 사용한다. 그리고 반대로 이미 미쳐 버린 인간 또한, 언어라는 닫힌 우주의 죄수다. 그러므로 우리가 광인과 소통하기 어렵다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은 언어로, 너무 많이 말하기 때문이다.

왜 광기의 언어는 오늘날 갑자기 중요해졌을까? 왜 우리 문화에서 지금 이 말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이런 답이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치적 자유를 믿지 않는다. 사물도, 인간도, 역사도 제도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신’이 결정적으로 죽어버린 세계, 좌와 우를 막론한 그 모든 약속에도 불구하고,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세계에 산다. 여기서 ‘언어’는 유일한 원천이자 근원이 된다. 우리는 오직 기호에 우리의 가능성을 건다. 머릿속을 질주하는 말들 아래서 언어는 우리가 ‘미칠 수 있다’는 위대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광기의 경험’이 ‘문학의 경계’를 형성하는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경계에 위치한 문학의 언어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서 언어는 사물을 번역하기 위해 사물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이 언어 안에 포함되고 감싸 안겨 존재한다. 미셸 레리스의 ≪지우개≫가 그 예다. 이 글에서 말, 말의 자의적 만남, 말의 혼동, 말의 모든 원형질적 변형은 환상적인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고 있다.

레리스는 르네상스 이래로 계속 이어져 왔던 어떤 계보에 속한다. 언어 신비주의자의 계보가 그것이다. 이들은 단어, 음절, 문자, 소리 등 물질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언어의 창조적이고 시원적인 절대적인 힘을 믿었다. 이들은 의미 작용의 살아 있는 심장,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의 자연적이고 신적인 퇴적물을 말에서 발견했다(예: 알파벳을 이용한 피에르 피스의 ‘말놀이’ 글).

언어 신비주의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장피에르 브리세였다. 브리세는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시작해, 현재 우리 언어의 가장 불편하고 불안하여 어떤 의미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울림에 이르는, 경탄할 만한 어원학적 장광설을 전개했다. 그는 단어를 뒤흔들고 반복하며, 기괴한 확장을 통해 단어들로부터 우화를, 인간과 신들의 모든 역사가 요약되어 있는 우화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어떤 역설을 마주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단어는 절대적으로 자의적이다. 태양을 태양으로, 풀을 풀로 불러야 할 본성상의 필연성은 없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 안에서 어떤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사물의 비밀에 가까운 무엇인가에 의해 우리가 그 단어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시의 모든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현대 문학을 사로잡는 두 가지 신화가 이로써 비롯한다. 한편으로, 진부한 기존 단어들이 다른 단어로 대치되지만, 그럼에도 그 의미는 동일하게 또는 명징하고 분명하게 통용되리라는 (이제는 부인된) ‘계약’의 신화가 있다(예: 장 타르디외의 희곡). 

다른 한편으로 말의 내부에, 이 공동(空洞) 깊숙한 곳에서 창조의 공간이 있다는 신화가 있다. 여기서 언어는 자기 자신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땅에 천착하지만, 그럼에도 관습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시와 본성의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예: 레리스의 ≪식물의 정사≫).

이러한 문학적 경험과, 히스테리 환자의 마비, 강박증 환자의 의식, 조현병 환자의 입말의 미로는 그 구조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광기의 언어가 문학적 의미작용을 갖는다거나, 오늘날 문학이 광기에 홀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 시대는 문학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언어적 사실이라는 것과, 강기가 하나의 의미작용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 결과, 광기와 문학은 기호들을 가지고, 그러니까 우리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이 기호들을 가지고 놀이하게 된다. 문학과 광기는 하나의 공통적 지평, 기호의 지평에 다름없는 하나의 접합선을 갖는다.

광기와 문학은 아마도 우리 주위를 완전히 감싸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거대한 열림에 의해 서로서로 연결된 것일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앞을 나아가고,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이 거대한 열림 안에서다. 우리들이 영원히 길을 잃는 이 길을, 아르토는 다음과 같이 일컬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언어가 봉사해야 하는 유일한 사용법이 있습니다. 사유를 제거하는, 광기의, 단절의 수단으로서의, 비이성의 미로가 그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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