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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그리스도교에서 결혼의 역설:  라틴 교부의 전통


1. 정욕의 억압: 테르툴리아누스

순결의 규칙

테르툴리아누스는 서양 라틴 교부의 선구자로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꾸짖는 글을 여러 편 남겼다. “여성의 장신구에 대하여”에서는 여성의 화장이나 장신구 남용을 비난하는데, 그것이 사치스러운 일이라서가 아니라 여성이 이브 이래로 남성에게 유혹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이 육적 욕망의 대상이 되려는 것은 곧 조신함의 결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조신함이란 “실제 간음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 자체를 피하고, 죄를 낳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유혹의 길을 여는” 것 자체를 삼가야 하며, 그러므로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를 피해야 한다. 즉 ‘순결’은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유혹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결혼관

테르툴리아누스는 결혼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긍정적 자세를 보여 준다. 결혼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은 역시 육의 행위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스스로 육욕에 져서 아내와 결혼했다고 인정한다. 결혼하는 순간 이미 타락한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인간의 지위를 성적 교섭의 유무에 다라 다음 네 단계로 분류한다. ① 태어난 이후의  처녀·동정(성관계를 알지 못하는 ‘축복의 상태’), ② 세례를 받고 나서부터의 처녀·동정(성관계와 정욕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경멸하는, ‘용기 있는 태도’), ③ “단 한 번 결혼했고, 그 한 번의 결혼 생활이 끝난 후에 더 이상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경우”, ④ 결혼 상대가 죽고 나서 재혼하는 경우. 여기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두 번째 단계의 사람과 세 번째 단계를 칭찬한다. “처녀는 선한 것을 언제나 유지하지만 과부는 그것을 스스로 찾아낸다. 처녀에게는 은혜의 관이, 과부에게는 용기의 관이 주어진다.” 결혼을 긍정하는 이론의 배우에는 여성을 불신하고 육체적 욕망을 부정하는 이론의 들러붙어 있었다.


2. 처녀의 가치: 노바티우스

“정조의 선물에 대하여”에서 노바티우스는 정조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① ‘처녀와 동정’의 정조, ② 금욕자의 정조, ③ 결혼한 사람들 간의 정조. 여기서 노바티우스는 처녀의 정조를 중요시한다. 처녀의 금욕은 육의 자연성을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바티우스의 정조론에는 그리스의 소년애와 여성애를 비교할 때 사용된 논거들의 변주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에 따라 자손을 늘린다는 목적이 무고한 젊은 처녀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노바티아누스는 생각한다. 성관계는 언제나 쾌락으로, 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 처녀들이 아이를 낳으면 순교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도 든다. 


3. 성모 마리아와 처녀의 신체: 암브로시우스

결혼의 덫

암브로시우스도 결혼을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다. 그러나 “포도주와 여자는 이성 있는 남자를 타락시킨다.” 또 남편과 아내 모두, 침대에서 쾌락을 맛보면 타락한다. 

암브로시우스는 화장이 “신이 그린 자연의 상을 파괴한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 소년의 꾸미지 않은 신체와 여성의 인위적 화장이 대비되었다면, 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화장하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소년이 아니라 처녀의 신체다.


처녀의 신체

처녀의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신체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겸손을 통해, 붉어진 볼에서 빛을 발하며, 달콤한 정절 자체가 아름다움이 된다. 남자들의 시선을 갈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것은 신체가 아닌 바른 덕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다”(암브로시우스, “처녀에 대하여”). 

그러나 이러한 처녀의 길은 험한 길이라 아무나 나아갈 수 없다. 이는 “극히 적은 자에 내린 은혜”, 선택된 자를 위한 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상류층 여성, 즉 거대한 부를 갖고 있으며 남편이 죽고 나면 자신의 부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젊은 처녀가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금욕의 문제는 ‘부의 포기’ 문제, 그리고 교회의 경제적 목적과 연동된다. 여성에게 부를 그리스도교회에 증여하도록 암묵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마리아의 위상

암브로시우스에게 마리아의 처녀 신체는 인간과 신을 잇는 특권적 장이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나온 주님은, 마리아의 정절이 범해지지 않도록 지키고, 처녀의 밀봉을 지켰다.” 처녀 마리아 이론은 삼위일체 이론을 보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마리아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지만 성령에게 은총을 받아 수태하고 인간이면서 신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다. 기적의 힘에 의해 처녀인 채로 예수를 낳았으며, 그 후에도 처녀를 유지했다. 처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예수는 ‘성적인 기원과 성적인 욕동이라는 이중의 더러움’에 범해지지 않은 신체이며, 현재의 인간 신체의 타락한 상태와, 장래 부활의 때의 영광 사이에서 변신의 ‘다리’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었다. 


4. 처녀의 신체: 펠라기우스, 히에로뉘무스

처녀성 찬양은 박해와 순교의 시대 이후로도 이어졌다. 처녀 맹세와 관련된 서신들을 사례로 삼아 그 당시 처녀의 신체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었는지 고찰해 보자.


펠라기우스의 서신

펠라기우스가 처녀의 금욕을 찬양하는 논리는 노바티아누스와 대조된다. 노바티아누스는 인간의 자연성을 거슬러 금욕한다는 이유로 처녀를 찬양하는 반면, 펠라기우스는 금욕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육과 영에서 처녀라 할지라도 손, 눈, 귀, 그리고 혀로 죄를 범한다면, 어떻게 육체에서 성스러운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증오와 질투, 탐욕과 분노로 더렵혀져 있다면, 어떻게 영에서 성스러움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펠라기우스,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러므로 특히 처녀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상념이다. 자신의 사유와 감정의 움직이야말로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처녀는 자신이 선을 의지하고 선을 행한다고 있다고 믿는데, 그 신념은 사실 사악한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녀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 선량한 것인지 사악한 것인지 식별해야 한다. 즉 처녀에게는 ‘자기 해석학’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그러나 이 자기 해석학은 처녀가 혼자 실행하기에 너무 힘든 과제다. 이를 위해 수도원이라는 장치가 필요해지고, 실제로 이미 작동하기 시작한다. 


히에로뉘무스의 서신

히에로뉘무스는 처녀성을 찬양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처녀성을 지키는 것이 순교와 동일한 행위라고 강조한다. 처녀는 무장하고 싸워야 하며, 항상 경계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히에로뉘무스는 처녀에게 일상생활의 세세한 주의사항을 하는 데 그친다. 예컨대 나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 것, 아첨에 흔들리지 말 것, 신체를 타인의 눈에 노출시키지 말 것, 허영의 정열에 사로잡히지 말 것, 교만하지 말 것, 남자를 피할 것, 웅변적으로 말하지 말 것, 탐욕을 피할 것, 기도 시간을 가질 것, 지출을 계산하지 말 것 등 아주 성실한 훈계에 불과하다. 히에로뉘무스에게서는 아직 상념을 둘러싼 자기 해석학의 덫이 그다지 의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지 딸들의 마음과 침대 모두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 있어야 했고, 그 마음이 신의 말씀의 ‘자리’가 되어야 했다.


5. 결혼의 양의성: 아우구스티누스

순결과 정절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처녀의 순결은 양의적 의미를 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결이 결혼에 비해 선하긴 하지만, 순결을 지키는 여성이 때때로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많은 성스러운 처녁들이 말이 많고 호기심이 강하며 술주정꾼에 언쟁을 좋아하고 탁욕스러우며 오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아우구스티누스, “결혼의 선”). 순결이라는 덕이 다른 악덕을 동반할 때 순결 자체의 가치는 상실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순결의 덕은 ‘복종’이라는 덕보다 가치가 낮으며, “덜 순종적인 처녀들보다는 더 순종적인 기혼 여성들이 선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밀라노와 카르타고의 부유한 토지에 살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백성들에게서 성스러운 숫자를 채우는 데 넘칠 정도로 충분한 출생이 있으므로, 저속한 정욕은 충분한 아이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의 선

인간의 정욕을 근절하기 어렵다. 이는 몽정이라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결혼은 이 인간의 악을 선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사람들은 정욕에 사로잡혀 “점점 더 무절제한 성적 결합을 추구하는데, 결혼을 통해 깨끗하게 아이를 낳는 절도를 갖게 된다”. 결혼은 악의 선용이라는 차원에서 용인된다. 결혼의 또 다른 의의는, 그것이 부부라는 신도 간의 ‘신의’를 만들어 내고, 마음의 일치를 낳는 성사의 성질는 갖는다는 데 있다. 

그 자체로 선인 것인 향유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선이 아닌 것은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결혼은 수단적 선이며, 그 목적은 우애에 있다. 결혼은 수단적 선이며 그 목적은 우애에 있다. 결혼 자체를 향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혼은 생식이라는 목적에 맞고, 사람들의 정욕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신도들 간의 화합을 가져온다. 


성과 고백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타락 이전에는 성기를 포함한 신체의 모든 부분이 손처럼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마치 지금도 손으로 땅에다 씨를 뿌리듯이, 성기도 그일을 하라고 만들어진 그릇을 생식하는 토양으로 삼아 씨를 뿌렸으리라.” 그러나 타락의 순간 아담은 자신의 신체를 제어할 힘을 잃어버린다. 아담이 바랐던 것은 자립된 의지였지만, 아담의 신체 일부가 그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게 된다. 이 신체의 반란은 신에게 반란했던 인간의 ‘상징’이 된다. 

아담은 자신의 벗은 몸을 감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악을 안 것이 아니다. 아담은 무구한 자신, 신을 따르는 자신이라는 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기관을 감춰야 하는 악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악하다는 것은 신에게 불복종한다는 것이며, 자신만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고, 성적인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성이라는 문제가 인간의 근본적 죄와 악의 문제권에 들어온다. 결혼은 정욕을 길들이는 장치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느끼는 정욕이야말로 아담의 원죄를 반복하고 그것을 아이에게 전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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