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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 목자/ 나캬야마 겐 / 27/ 2017.4.02.() / 닥홍

 

사막 교부들의 투쟁

 

수도사의 투쟁

성의 문제와 인간 선악의 문제와 정면으로 씨름하는 수도사가 등장한다. 사막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처녀의 신체 대신에 중요한 장치를 제공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모든 재산을 매각하여 도시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사막으로 향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생활이 2중의 세례라는 의미를 갖는다. 유아 때 받는 세례 후에 지금까지의 생활을 회개하고 수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의미이다.

수도사의 동기는 신의 사랑이다. 수도사는 무엇보다 애착, 불안 금전에 대한 배려, 애정, 동포애 등 모든 세속저긴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배려를 포함하여, 그 무엇에도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 과제이다. 자기 것, 소유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포기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타자에게 완전히 복종하도록 요구된다.

자기 의지와 사유까지 버리도록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사유에 몇몇 원천이 있으며 그 사유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도자는 자기 마음에 들어오는 사유의 질을 엘렝코스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엘렝코스와 스토아학파의 자기 엘렝코스는 차이가 있다. 스토아 학파는 주체가 자기를 향유하고 자신의 행동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부적절한 것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유의 질을 검증하려고 한다.

인간의 사유에는 신의 의지에 의한 사유, 악마로부터 오는 사유, 자연스러운 사유가 있다. 영적 존재이고자 하는 자는 육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수도원에서는 자신의 사유를 점검하기 위해 타인에게 자기 사유의 내용을 말하고 판단 받을 필요가 있다. 스토아 학파도 인간에게는 자기애의 성질이 있어 스스로는 진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레시아스테스로서의 타자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수도원에서는 인간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가 본래 선한 것 인지 악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예를들면 수도사가 절식하는 것이 아시케시스로서 바람직한 시도로 생각되지만 실은 악마의 유혹일수도 있다. 과시하기 위해 행해지는 절제는 악마의 속삼임이다. 필요하는 것은 사유가 현실에서 담당하는 기능보다도, 선한 생각의 배면에 악한 생각, 악마로부터 온 생각을 감추고 있지 않은지를 엘렝코스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사는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도록 요구받는다. 4세기경의 수도원에 탄생한 이 고백의 기술은 엑사고레우시스라고 부린다. 푸코는 이 말을 자기에 대한 끊임없는 고백이라고 번역한다. 신체적 금욕을 지키는지는 밖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정신적 금욕을 달성하는지는 행동과 말에서 나타나야 한다.

푸코는 이 자기 마음 내면에 대한 진실 말하기 기술이 문화, 중교, 도덕, 철학 등의 여러 행태로 등장하나고 지적하며 특징을 여섯 가지로 요야한다.

첫 번째 특징은 자신의 죄스러운 행동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유 자체와 그에 동반되는 이미지, 표상, 의지, 욕망 등을 밝힌다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이것이 기억을 통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끊임없이 관리를 통해서 행해진다. 여기서는 자기에 대한 수직적 관계가 성립한다. 위에서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기의 관계이다.

세 번째 특징은 자의 사유를 어떤 진실의 기준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사유가 독사(doxa)에 기초한 것인지, 진실과 일치하는 것인지 여부는 판단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유가 겉보기와 다른 어떤 것을 숨기고 있는지 여부를 엘렝코스하는 것이다.

네 번째 특징은, 자기가 죄인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섯 번째, 이 기술이 끊임없는 언어화의 실천과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자기 포기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2. 일반 신도의 고백

 

엑소몰로게시스

일반 그리스도교 신도 세계에서도 수도원이라는 특수한 장과는 또 다른 형태로 작의 고백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일상적 실천으로서 고백이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엑소몰로게오마이는 완전히 고백하다 모든 것을 일정하다는 의미이다.

 

회개로서의 엑소몰로게시스

이 엑소몰로게시스는 그리스도교 전체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이며, 그 누구도 타자의 죄와 관계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백과 회개 의례를 수행하지 않으면 회중과 더불어 교회에서 기도를 드릴 수가 없다. 엑소몰로게시스는 교회의 성직자를 통해 신의 용서를 내리는 교회의례가 되었다.

 

엑소몰로게시스의 모델

푸코는 이 엑소몰로게시스라는 회개 제도를 상세히 고찰한다.

자기의 진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희생하기 위해 자기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스토아 학파의 자기의 엘렝코스와는 이질적이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에게 사적이었던 것이 그리스도에게는 공적인 것이 된다.

이 모델은 순교의 모델과 관련된다. 순교는 가르침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실제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다. 회개에서도 죄인은 가르침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3. 자기 해석학

 

생각을 언어화하는 것, 스승에게 생각을 말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타자에게 내맡기는 것이며,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고 타자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고대의 지도 관계가 수도원에서의 지도와는 다르다. 고대의 지도 관계에는 크게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목적성의 원칙과 유능성의 원칙이다. 목적성의 원칙이란 지도가 어떤 규칙의 내면화를 목적으로 행해지며, 규칙이 내면화되고 하나의 상태가 달성되면 지도는 종료되고, 이것이 동시에 유능성의 원칙으로 이끈다. 이 규칙을 내면화한 유능한 인물이 지도할 수 있다. 지도하는 것은 스승, 즉 지도받는 인간보다 유능한 현자일 필요가 있다.

수도원에서는 현자가 지도하는 관계는 모습을 감춘다. 그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복종의 모델이다.

 

4. 사목 관계에서의 역설

 

스승의 역설

누구나 자기 생각이나 욕망에 대해 엘렝코스할 뿐만 아니라 타자 앞에서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타자의 엘렝코스를 받을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에 대한 강한 의심이 숨어 있음이 확실하다.

스승이 무리의 사정을 너무 배려한 나머지 자기의 내적 영혼을 건성으로 배려하게 되고,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이를 사목자 지도의 패러독스라고 부르자.

사목자에게는 약함이 있고, 사목자는 자신의 약함을 인식하며, 이것을 위선적으로 신자에게 감추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양들의 신앙이 약하다는 것이 사목자가 그 권력을 행사하는 근거가 되는데, 사목자의 약함도 또한 이 영혼의 배려라는 행위에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이것을 성스러운 사목자의 패러독스라고 부르자.

푸코는 양들의 영혼 구원이라는 행위에서의 사목권력과 사목자에게 따라다니는 이러한 패러독스를 고찰하면서 수도사와 지도자 간에 미묘한 권력 구조가 형성된다는 것, 이 권력 구조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수도사들이 그 근거를 묻게 되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 그래서 구원이 확보되는지의 여부는 수도사의 행동으로부터도, 사목자의 권력이나 능력으로부터도 보증되지 않고 모든 것이 신의 손에 맡겨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목 행위는 완성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들과 새로운 양치기를 보급하면서 서양 사회가 영속적으로 추구해 나아가야 할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제자의 역설

수도원에서의 자기 포기의 첫 번째 특징은, 그것이 자목적적이라는 데 있다. 자기를 포기하고 어떤 해설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타자에게 복종하는 것 자체가 가치를 갖는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완전한 복종 자체가 영혼의 선한 상태를 나타내고 신앙의 깊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보편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복종 자체가 목적이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종속을 보여줘야 한다. 스승이 명령하고 제자가 복종하는 계층적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명령할 수 있고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명령을 따라는 것뿐만 아니라 명령받지 않는 것은 하지 않도록 요구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이상한 실천에서 자기 포기란 타자의 의지에 완전히 관철될 것을 요구한다. 푸코의 지적에 따르면 고대에는 스승이 말하고 제자가 들었지만, 수도원에서는 이 구도가 역전되어 제자가 말하고 스승이 귀를 기울인다. 여기서 복종의 상태에 있는 자는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적인 진실 말하기와는 정반대의 상태이며, 자기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자기를 통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권력에 복종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수도사의 성과의 투쟁

수도사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자신의 상념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자는 동안의 상념의 움직임도 끊임없이 경계하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마침내 무의식적 욕망의 파편조차 없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충분한 고행을 한 금욕자가 도달하는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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