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학의 고고학/ 미셸푸코 / 옮긴이의 앞글 / 2017.4.09.() / 닥홍

 

문학의 고고학; 끊임없이 제 자신 위로 겹쳐지며 스스로를 벗어나는 말들

0. 나는 문학 자체가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그런 생각이 문학 자체에 대한 보편적 정의가 아닌 무수히 많은 관념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안다.

 

1. 임상의학의 탄생과 레몽루셀 두 권의 쌍둥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이중-분신의 사유이다. 언어가 언어로서 기능 할 수 있는 조건이란 언어의 메타적 기능, 곧 논리적 현실적으로 스스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지칭 지시하는 기능으로서, 이때 언어는 내제적인 동시에 메타적인 것이고, 내적인 동시에 외적인 것이자, 돌아옴인 동시에 떠남이며, 안인 동시에 밖이 된다. 그리하여, 가장 먼 것과 가장 가까운 것은 만나게 된다. 이는 언어를 어떤 본성 혹은 본질을 갖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닌 늘 작용하며 작동하는 하나의 기능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언어의 기능은 스스로에 대해 이중화되면서 스스로부터 달라지는 것, 곧 자기와의 자기로부터의 차이화 작용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놀이는 동일자가 아닌 타자성, 동일성이 아닌 차이에 기반한 것이다.

 

2.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의 이중적 존재론은 고대 그리스 파르메니데스 이래의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서양의 주도적 언어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언어의 이중적 차이론, 결여론이다. 말과 사물은 랑그/파롤, 시니피앙/시니피에 등 이행 대립적 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 정통적 의미의 구조주의와 달리, 복수의 요소들이 이루어내는 배치, 또는 주어진 사회와 시대에 있어서의 인식론적 장, 곧 에피스테메가 주어진 특정 시대, 공간의 구체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고 보는 면에서 구조주의와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18세기 말 19세기 초 이래 서양 근대의 에피스테메로 제시된 초월적-경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관념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중/분신의 사유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의 고고학은 언어학적 구조주의적 용어인 언표의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이를 향후 전면에 등장하게 될 니체주의적 힘-관계의 개념에 입각하여 정의하고자 노력하는 작품으로, 실상 망설임과 반복, 중단과 재개라는 이행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 언표 가능성/가시성 혹은 테스트/이미지 사이의 이중적 관계라는 구분은 쌍둥이, 거울, 시뮬라크르 등 수많은 비유와 용어를 낳으며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 정점에 달했다가, 1969년 지식의 고고학 이래 비판적 조명을 받게 되면서 푸코의 사유에서 점차로 사라지게 된다. 대략 1970년 이후 푸코의 사유는 정치적인 것에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 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와 동시에 문학과 미술에 대한 푸코의 관심 역시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5. 문학의 고고학의 가치는 그것이 푸코 사유의 잃어버린 고리를 드러내주는 귀중한 자료란 점이다.

 

6. 첫 방송 광인들의 침묵1961년 저작 광기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정신분석은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라는 근본적 관점을 따른다. 광기가 비정상적 병리상태로 인식된 것은 광기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자연과학 의학적 이상 현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18세기 말 이후 이루어진 광기에 대한 대상화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상화 과정, 곧 관기를 비정상적 병리현상으로 설정하는 과정은 동시에 이성이 스스로를 정상적인 것으로서 정립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기와 이성은 서로서로에 대한 여집합으로서 규정되는데, 이러한 광기와 이성의 배타적인 상호 실체화 과정이 오늘날 서구 근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인 광기와 이성의 분할을 낳았다. 오늘날 광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자이며,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하는 자, 누군가가 그의 말을 해독해주어야 하는 자, 결코 스스로는 온전히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도 자신의 뜻을 펴지도 못하는 자로서 이해된다. 물론 이는 단적으로 이성에 의한 광기의 식민지화이며, 이를 식민주의자에 의한 원주민의 지배,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어른에 의한 아이의 지배, 곧 지배자에 의한 피지배자의 지배로 읽으면, 오늘날 광기의 모습이 결코 자연적인 의학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의학이라는 역사적 학문적 장치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현상, 권력 현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 광인의 광인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의학에 의한 광기의 도덕화, 광기와 죄책감의 상호 결부 작용과 더불어 이루어진 사회적 정치적 절차가 만들어낸 하나의 효과이며, 이는 18세기 말 이래 정신의학의 학문으로서의 설립과정과 다른 것이 아니다.

 

7. 두 번째 방송은 모든 언어 문화권에는 문학적 내용에 집중하는 작가들과 문학적 언어 곧 형식 자체에 집중하는 작가들이 있으며, 나는 늘 후자 쪽으로 관심이 기울어졌다는 푸코 자신의 말을 입증해주는 좋은 사례이다. 언어의 형식적 구조 자체가 문학의 실내용을 구성한다는 이른바 넓은 의미의 형식주의적 문학관에 가깝다.

당시 푸코의 문학관은 푸코의 두 주요한 참조 대상들로서, 바깥의 사유를 말하는 블랑쇼와, 위반의 글쓰기를 말하는 바타유의 사유에 강력히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계경험으로 대표되는 위반과 바깥의 사유는 안에 대한 바깥, 타부의 위반으로 이해되면서 사유하는 주체의 탈 주체화라는 전복적 아방가르드의 윤리를 이끌어낸다. 문학이란 바로 이러한 기존의 언어놀이에 대한 위반과 바깥의 한계경험, 그리고 탈주체화, 탈이성화된 주체, 곧 광기와의 협업이 발생시키는 효과이다. 작가는 게임의 규칙을 어김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이다. 이 시기 푸코의 문학관은 기존의 지배적 언어 놀이에 대한 형식주의적 혹은 훗날 포스트구조주의적이라 불리게 될 하나의 실험 곧 일탈을 통해 펼쳐지는 전복적 아방가르드 문학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8. II부를 이루는 두 편의 강연은 1960년대 푸코의 문학관, 곧 결코 상대에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되풀이와 되풂의 방식으로 서로의 위로 겹쳐지는 동시에 어긋나면서, 서로를 벗어나는 동시에 서로에게로 되돌아 오고야마는 이중/분신의 사유 또는 작용에 입각한 푸코의 문학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유일한 텍스트들이다.

첫 번째 강연에서 언어-작품-문학이 빚어내는 기묘한 삼각형을 그린다. 푸코에 의해 18세기 말 이래 탄생한 것으로 그려지는 근대 문학의 탄생이라는 경험은 언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자신의 위에서의 진동 운동으로 규정되고 작품은 바로 이러한 자기 진동 운동에 대한 위반이자 결정화로서 제시 된다. 우선 언어(lang)이야기 속에 축정된 파롤의 모든 사실인 동시에 랑그의 체계 자체이다. 다음으로 작품은 언어의 내부에 존재하는 언어의 특정한 배치이다. 마지막으로 문학(litt)언어에서 작품으로, 작품에서 언어로의 관계가 통과하는 삼각형의 정상이다.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18세기 말 혹은 19세기 초 곧 근대 이후에 발생한 것이다. 이 시기 이후의 문학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행위를 그 자체 안에 포함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제 스스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근대 문학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메타적 행위, 곧 기존의 문학을 부정하는 행위, 기존의 문학에 대한 위반, 문학의 죽임이다. 문학은 문학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자 바깥의 사유이다. 문학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 위반하면서, 스스로의 위로 겹쳐지는, 스스로의 결여이자, 스스로에 대한 거리, 간극 틈으로 존재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뒤풀이/되풂 작용, 이중의 사유이다. 이는 인식이 이미 ()인식이라는 플라톤 이래 상기설의 근대 문학적 변양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7. 푸코의 작업은 시공을 넘어선 초월적인 보편적 필연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긴 여정이었다. 보편타당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어떤 시대의 어떤 사람들이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특수한 문학관을 문학 자체에 대한 관념이라고 여기게 되었는가?” 이는 문학에 관련된 기존의 지배 관념에 대한 이의제기로서의 문제화이며, 이러한 문제화의 두 방법론의 고고학과 계보학이다. 두 방법론의 경계선은 대략 1970년경을 기점으로 나뉘는데, 이것이 지식 권력 윤리라는 세 가지 영역과 만나면, 1960년대의 지식의 고고학, 1970~1975년에 이르는 권력의 계보학, 1976년 이래 푸코가 사망하는 1984년에 이르는 윤리의 계보학이 설정된다.

 

6. 인간이 극히 최근의 발명품인 것과 동일한 이유로, 보편성과 문학 역시 그러하다. 지식의 고고학에 의해 분석된 세계는 오직 고유명사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이며, 이러한 고유명사의 지배는 완전하며 전적이다. 문학, 인간, 진리, 아름다움, 본질, 역사, 광기, 섹슈얼리티, 보편성, 근대 등의 관념처럼 우리에게 역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밝히는 것이 고고학이자 계보학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문학의 관념이 형성된 근대라는 지식고고학적 지층을 섬세히 분석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이라는 지식의 고고학, 곧 문학의 고고학이다.

 

5. 근대 문학은 스스로의 위로 겹쳐지고 되풀이되며 되풀려나감으로써 그 자신에로 되돌아가는 언어의 한 형상, 배치로 제시된다. 근데 문학은 위반의 언어이자 죽을 수밖에 없는 되풀이하는 다시금 이중화되는 하나의 언어 곧 책 자체의 언어이다. 문학적 분석이란 주어진 사회 안에서 순환하는 기호들, 단시 언어학적 기호들이 아닌, 경제학적, 재정적, 종교적, 사회적 등등일 수 있는 기호들에 대한 분석이 된다. 문학은 문학이 아닌 것과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는 하나의 복합적인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인 현상이다. 스스로를 벗어남으로써만 스스로도 되돌아가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빔으로서 작용하는 공간, 그것이 책이라는 공간이다.

 

4. 사드에게 있어서 진실을 말하기란 욕망, 환상, 상상력을 진실과의 어떤 관계 안에서 확립하는 것임을 밝힌다. 푸코는 사드를 프로이트적으로, 곧 욕망의 관점에 입각해 읽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프로이트를 사드적으로, 곧 늘 자신의 위로 겹쳐지면서, 스스로로부터 벗어나며 또 바로 그러한 방식에 의해서만 스스로가 되는, 무한히 되풀이되는 글쓰기의 실천으로서 다시금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라캉적 욕망에 대립되는 니체-푸코적 쾌락 관념의 설정으로 구체화된다.

 

3. 철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푸코는 실체(substance)로부터 관계(relations), 동일성(identity)으로부터 차이(difference)로 이행하는 현대 사유의 기본적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 푸코의 평생에 걸친 작업이 자신이 사회 곧 서구문명이 그것에 입각해 작동하고 있는 문화인류학적 코드의 분석 작업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학과 과학과 철학,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영역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경계선은 무너지게 되고, 이제 관건은 이들이 서로 서로를 형성하고 제어하고 상호작용하며 이루어가고 있는 이 복합적 그물망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작동하고 있는 가를 아는 일이다.

 

0. 문학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문학 또는 문학의 고고학이란 문학을 넘어서는 것, 문학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을 버리는 것이며, 문학을 죽이는 일이다. 이는 마치 미술의 영역에서 뒤샹이 행했던 바와 같이, 문학이 기존의 문학관에 대한 이의제기, 문제화 작업에 다름 아니라는 선언이다. 문학은 문학의 고고학은 결코 문학 자체가 아니라, 이 문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묻는 일이며, 이 문학과는 다른 또 다른 하나의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자신의 글쓰기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 드러내는 일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