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학의 고고학 / 미셸푸코 / II.문학과 언어 두 번째 강연 / 2017.4.15.() / 닥홍

 

170415_문학의고고학 II.문학과언어 두번째강연 푸코_발제닥홍.hwp

 

우리가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지평, 토대로 갖는 것일까요? 문학에 대한 언어에 의한 문학의 이 영원한 중복어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문학에 다름 아닌 이 언어, 이 주석 이 재이중화를 무한히 허용하는 이 언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문제가 분명치 않은 이유는 첫 째, 비평(critique)이라 부르는 것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평적 언어는 그 어느 때보다 두꺼운 지층을 갖습니다. 비평적 행위의 증식은 비평적 인물의 소멸이라는 모순적인 현상을 동반합니다. 비평은 언어 일반의 일반적 기능이 되었지만, 그것은 이제 어떤 유기체도 어떤 고유한 주체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학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세 번째 현상이 나타납니다. 일차 언어 또는 문학이라 부르는 언어와 이차 언어 또는 비평이라 부르는 언어 사이에 매우 다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오늘날의 비평이 문학 및 일차 언어와 관련되는, 일종의 객관적, 담론적 증명 가능한 그물망의 확립을 목표로 한다고 믿습니다. 비평은 실증성의 또는 과학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기초에 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비평은 자신이 맡았던 역할, 곧 글씨기와 문학 사이의 매개라는 역할과는 전혀 다른 역할, 전혀 새로운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비평은 독해의 일차적, 절대적, 특권적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평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지금 글쓰기의 곁을 통과하는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우선 비평이 더 이상 작품의 창조라는 심리학적 순간이 아니라, 자신만의 형식과 배치를 갖는 글쓰기에, 작가의 글쓰기라는 두께 자체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비평이 보다 더 나은 또는 보다 더 이른 또는 더 잘 무장한 하나의 독해가 되고자 욕망하기를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의 얽힘, 하나의 그물망을 형성하는 하나의 글쓰기입니다. 글쓰기 일반의 이 점과 선은 서로 교차하고, 서로를 되풀이하고, 서로 겹치며, 서로로부터 빠져 나가고, 결국, 완전한 중립성 안에서, 우리가 문학의 그리고 비평의 전체라 부를 수 있을 어떤 것, 다시 말해 글쓰기 일반의 부유하는 현동적 상형문자를 형성합니다.

어떻게 해야 비평이 이차 언어인 동시에 하나의 일차 언어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학자 야콥슨이 메타언어라는 관념을 도입했습니다. 메타언어는 주어진 한 언어의 특성들, 한 언어의 형식들, 코드들, 한 언어의 법칙들을 또 다른 하나의 언어를 통해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메타언어의 두 번째 특징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일차 언어의 형식, 법칙, 코드를 정의할 수 있는 이차 언어가 일차 언어와 그 본성상 필연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일차 언어에 대한 이 절대적 후퇴의 가능성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성, 그 위에서 전적으로 담론적인 하나의 담론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그와 동일한 평면 위에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작품이 위반과 죽음이 동시에 문제되었던 거울과 비현실의 놀이 안에서 스스로를 문학의 시뮬라크르로서 제공하는 공간으로서 나타났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문학은 인간에 의해 실제로 발화된 파롤의 무수한 현상들 중 하나입니다. 문학은 랑그와의 관계, 곧 랑그의 각 단어를 실제로 발화되게 해주고 투명하게 만들어 주면서 결국 이해되도록 만들어주는 이 코드 구조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학이란 그 극한에서는 하나의 특이한 파롤 현상, 파롤의 다른 모든 현상과는 구분되는 하나의 파롤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단어가 랑그의 코드에 물론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음으로 인해 중단되어 버리는 한에서 -그것은 문학이 됩니다. 만약 한 명의 문학가에 의해 쓰인 각 단어가 실제로 랑그의 코드에 복종하지 않으며, 또 절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광기의 파롤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광기와 문학의 본질적인 상화 귀속의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곳은 문학의 매 단어에 의해 늘 긍정되고 늘 포착되는 위험, 결국은 이 단어, 이 문장,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이 코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입니다. 문학적 파롤은 언제나 코드를 중단시킬 절대권을 갖습니다.

나는 메타언어가 문학적 비평을 위한 방법론으로서 실제로 적용 가능하다거나, 또는 비평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리매김해줄 수 있는 논리적 지평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메타언어가 정확히 우리가 랑그를 위해 확립된 코드로부터 출발하여 실제로 발화된 모든 파롤의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코드가 파롤에 포함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코드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같은 파롤로부터 메타언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구원을 요청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문학적 의미의 글쓰기란 작품의 중심 자체에 되풀이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비평을, 매우 소박한 방식으로, 하나의 메타언어가 아니라 언어 안에 존재하는 되풀이 가능한 그 무엇인가의 되풀이로서 정의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비평이란, 순수하고도 단순하게, 이중/분신들의 담론, 곧 그 안에서 언어의 동일성이 서로 분할되는 차이와 거리에 대한 분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 순간에 우리는 세 가지 형식의 비평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테면, 형상들의 일람, 인식, 또는 학문인데, 언어의 동일한 요소들이 되풀이되고 변형되며 결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입니다. 언어의 형식적 되풀이를 다루는 학문으로 인식되는 것은 수사학입니다. 두 번째 형식은 언어의 다양성을 가로질러 의미, 변형 또는 동일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 단어들을 가지고 하나의 의미를 되풀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두 번째 형식은 고전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한 작품의 다원성을 가로질러 심리학적 혹은 역사적 의미작용의 동일성, 결국에는 어떤 주체성의 동일성을 되찾으려 시도하는 비평을 구성합니다.

(171) 되풀이의 두꺼운 구조를 통해 작품이 자기 자신에 대해 수행하는 이러한 자기내포, 자기 지시의 해독으로 기능할 세 번째 형식의 공간은 존재할 수 없는지, 나타날 수 없는지 자문해봅니다. 선분의 분석을 위한 공간을 존재할 수 없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문학적 분석이라 부르는 다형적이고도 다양한 기획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마도 작품 자체의 이 자기내포에 대한 분석, 작품이 자신이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를 그려나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 기호의 분석이라고 봅니다.

문학 작품이 이념도, 아름다움도, 특히나 감정도 아닌, 단지 언어를 통해서, 따라서 기호 체계를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역설적이리만치 최근의 발견입니다. 이 기호 체계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많은 다른 기호들로 이루어진 그물망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문화 속에 존재하는 역사 속의 한 시점을 연구하고자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기호의 특정한 상태, 기호 일반의 일정한 상태를 얻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시니피앙의 가치를 지지해주는 요소들은 무엇인지, 시니피앙의 요소들이 따르고 있는 규칙은 어떤 것들인지를 우리가 확정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들에서 문학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하나의 기호처럼 작용했다는 사실, 문학이 존재하게 된 것, 문학이 창조된 동시에 소비되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의례, 하나의 종교적 의례가 갖는 시니피앙적 기능을 취하는 한도 내에서였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175)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것은 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시니피앙의 영역을 고정시켜주는 기호학의 첫 번째 층위입니다. 구어적 기호의 분석에는 두 번째 층위가 존재할 수 있을 텐데 이는 문화적 기호론이 아닌, 언어학적 기호론으로 이해된 기호론적 분석이라는 층위입니다. 이 두 번째 층위가 규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어떤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선택이 따르는 구조들은 무엇이며, 왜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졌는가, 체계의 각 시점마다 주어지는 잠재성의 정도는 어떠한가, 작품의 내적 구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쓴다는 것이 단순히 몇 가지 개인적인 표현들을 뒤섞음으로써 한 시대의 관례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쓴다는 것은 특히 글쓰기의 기호에 다름 아닌 이 기호의 사용을 함축합니다. 마지막으로 엄격하고 은밀한 네 번째의 기호학적 층위는 우리가 내포 혹은 자기 내포라 부를 수 있을 기호에 관한 연구가 될 것입니다. 이 기호는 그것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를 지시하고, 어떤 특정한 형식 아래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특정한 얼굴을 통해 재현하는 그러한 기호입니다.

이 네 가지 층위 안에서 문학은 하나의 형상, 자기 자신의 의미 작용을 속성으로 갖는 하나의 형상을 구성하는 재료들을 채취합니다. 문학은 특정 사회, 특정 문화의 분리된 개별적 층위 안에 주어지는 기호들의 수직적 재배치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문학은 침묵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침묵의 말 할 수 없는 부분도 아닙니다. 문학은 우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한에서만, 우리가 끊임없이 기호들을 순환시키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기호론적 분석을 어떤 방향으로 전개시켜 나갈 수 있을지 이해합니다. 이 또 다른 길이 더 이상 작품의 중요한 의미 구조가 아닌, 작품의 공간성에 관련된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83)

오랫동안 우리는 언어가 시간과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시간을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스스로 자신을 역사/이야기로서 의식하게 되는 것은 역시 무엇보다도 언어 안에서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아무도 언어를 결국 시간이 아닌 공간과 관련하여 사유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은 언어가 시간이 아니라 공간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의 본질이 시간을 사유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첫째, 철학은 시간을 더 잘 사유하기 위해서 공간 및 언어로부터 거리를 취해야만 했습니다. 둘째, 시간을 사유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언어를 따돌려야 했습니다.

베르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는 언어의 이 모든 놀이, 공간성을 무력화시키는 은유의 이 모든 놀이 덕분에 무엇인가가 태어난다고, 혹은 적어도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무엇인가는 다름 아닌 시간의 흐름 자체일 것입니다. (185)

우리가 무엇보다도 경험적인 수많은 방식으로 지금 발견하고 있는 것은 언어가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기능이 시간이라면 언어의 존재는 공간입니다. 언어의 존재가 공간인 이유는 언어의 개별 요소들이 특정한 공시성의 그물망 안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시니피에와 함께 시니피앙 작용을 하는 기호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치환의 법칙, 요소들의 결합 법칙에 의해서 하나의 집합에 대해 그러니까 결국은 공간 안에서 규정된 조작의 계열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간으로서의 이러한 작품 언어 분석이 시도될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187)

이미 여기저기에서 부분적으로 소묘된 이러한 가능한 분석에 대해 여러분은 그것이 분산된 질서를 통해 작품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쪽에는 기호론적 층위에 대한 해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공간화의 형식들에 대한 분석이 있습니다. 이 두 움직임이 서로 평행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혹은 수렴되는 것일까요?(197) 어느 날엔가 새로운 기호론적 가치와 그것들이 공간화되는 공간을 동시에 출현시켜줄 어떤 독특한 언어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요?

우리가 여전히 그런 담론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문학적 분석의 임무, 아마도 철학의 임무, 현존하는 모든 언어와 모든 사유의 임무는 모든 언어의 공간이 도래하도록, 그 안에서 단어, 음소, 표기된 약호가 일반적으로 기호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언어에 도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언어의 억제를 통해 의미를 해방시키는 이 틀이 어느날엔가는 나타나야 할 겁니다.

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문학은 왜 19세기에 출현했으며, 또 책이라는 이 기묘한 공간에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정확히 문학이라는 것이, 이제 이백년 남짓 된 최근의 발명품이며, 근본적으로 지금 구성되고 있는 관계, 언어와 공간의, 이제야 어렴풋이 가시적이 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유할 수 없는 하나의 관계이기 때문일 겁니다. (199)

문학적 분석은 언어가 점차로 덜 역사적이며 덜 연속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안개 속에서이긴 하지만 조금씩 드러내줍니다. 엄밀한 의미의 문학은 이 밝혀진, 움직이지 않는, 갈라진 언어, 다시 말해, 지금 오늘 우리가 사유해야 할 이것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201)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