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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강연



사드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교차 작용, 곧 ‘에로틱한 장면(scene)’과 ‘이론적 담론(discours)’ 간의 교차 작용을 살펴보자. 일견 ‘장면’은 사태와 행위를 재현하고, ‘담론’은 그 장면에서 연출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장면의 앞 또는 뒤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드의 담론은 장면에 대해, 곧 욕망 자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담론의 대상은 신과 법, 사회계약, 범죄 일반, 자연 등의 문제다. 그리고 이 이론적 담론은 성적 흥분 상태를 고조시키는 작용을 한다. 담론은 욕망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사슬처럼 연결되어 욕망을 다시 작동시킨다. 즉 사드의 담론은 욕망과 함께하는 담론, 욕망에 이어지는 담론, 욕망의 앞 혹은 뒤에 오는 담론, 욕망이 나타나기 전에 혹은 욕망이 사라진 후에 욕망을 대신하는 담론이다. 즉, 담론은 욕망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욕망의 상위에 위치하지 않는다.

사드의 글에서 담론은 네 가지 존재가 ‘없음’을 부단히 확증한다. 그것은 신, 영혼, 범죄, 자연이다. 즉 사드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네 가지 원리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제시하는 인물로서, 그는 자신 위에 어떤 종류의 절대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벗어난 실존’은 어떤 불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 실존이다. 신도, 인격적 정체성도, 자연도, 사회 혹은 법에 의한 구속도 없다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담론은 무엇에 봉사하는가? 이 담론의 기능은 무엇인가?

① 탈거세화의 기능
사드의 담론은 모든 한계를 철폐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어떤 욕망도 포기하지 않도록 한다. 나는 내 이익의 어떤 부분도 희생시키지 않아야 하며, 나의 욕망은 온전히 충족되고 또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서양에서 담론이 기능하던 바, 곧  ‘자기 포기’ 또는 ‘거세’ 효과에 반하는 것이다. 서양의 철학적 담론은 신, 영혼, 법, 자연 등 근본적인 것들을 긍정함으로써 질서에 부정성을 도입해 왔다(“신이 존재하므로, 너는 그것을 하면 안 된다”). 반면 사드는 이 모든 근본을 부정함으로써 부정성 자체를 무화한다.

② 차이화의 기능
사드의 담론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리베르탱)과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희생자)를 구분하는 기능을 한다. 담론은 희생자와 리베르탱 사이의 차이화, 곧 문턱을 확립한다. 담론의 바깥에 떨어진 희생자의 신체는 무한정한 방식으로 욕망의 대상, 곧 학대, 분리, 분할, 조각내기의 대상이 된다. 이때 신체는 자신의 통일성을 잃으며, 자신의 주권과 조직을 유지하지 못한다.

③ 파괴의 기능
사드 담론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신은 악하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을 더욱더 악하게 만드는 것, 신을 더욱더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악덕을 승리하게 만드는 자, 바로 리베르탱이다. 리베르탱이 많을수록, 리베르탱이 더 리베르탱이 될수록, 신의 악함은 단순한 증명을 넘어 실제로 실현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욕망은 무한한 상호 작용에 의해 서로 되먹임 효과를 낳는다. 신의 비존재는 담론과 욕망 속에서 매순간 실현된다. 담론과 욕망은 사실상 매순간 파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신(영혼, 법, 자연)을 말하고 있다.

④ 투쟁과 경쟁의 기능
네 가지 테마는, 이를 신봉하는 각 개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되풀이된다. 한 리베르탱은 자기만의 고유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각 리베르탱은 이 네 가지 테마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며 어떤 기초 위에서 어떻게 정당화되어야 하는가, 또 그로써 얻어낼 수 있는 결과와 성적·범죄적 실천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자신만의 특정한 방식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각 리베르탱은 다른 리베르탱에 의해 더 강하거나 약한 체계를 가지며, 그 강약에 따라 정복하거나 정복당한다. 이 투쟁과 경쟁은 결국 단 한 명만이 남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⑤ 개인 자체의 무화 기능
담론이 리베르탱들 사이의 전투에 사용되는 도구라면, 담론은 동시에 리베르탱 본인을 죽음에 노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리베르탱은 자신의 담론을 다른 리베르탱의 담론과 맞부딪히게 하면서 죽음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음이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욕구를 죽고자 하는 욕구로 되돌릴 때, 우리는 자연에 등을 돌리는 것이며, 자연을 조롱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자신과 관련하여 극한의 죄악을 저지르는 순간이자, 극한의 쾌락이 얻어지는 순간이다.

이처럼 사드의 담론은 ‘욕망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역할’을 전혀 갖지 않는다. 담론과 욕망은 동일한 평면 위에 존재하면서 서로서로에 의해 구축된다. 욕망이 담론을 점점 더 참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된 담론 역시 욕망을 증대·심화시키면서 무한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담론과 욕망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고 맞물려 있다. 즉 사드는 서양이 거짓, 환상, 무지 안에 내버려두었던 욕망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려 한 것이 아니다. 사드는 진리의 욕망하는 기능을 복원하고, 욕망의 진리 기능을 보여 주려 했다. 그는 욕망을 진리의 절대권 아래 정돈시켰던 플라톤적 구축물을, 욕망과 진리가 동일한 나선의 내부에 함께 속해 있어 서로 맞부딪히고 서로에게 맞서는 하나의 놀이로 대체한 인물이다. “욕망은 진리 안에서만 무한하고, 진리는 욕망 안에서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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