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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세미나 / 헤겔레스토랑 / 슬라보예 지젝 / 17-06-14 / 서문 발제 / 화니짱

 

0_그래도 그것은 돈다

멍청함에도 정반대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주체가 똑똑 바보인 경우가 있다. 당최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고, 상황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감추어진 맥락의 규칙은 놓치고 만다.(23) 이러한 천치스러움의 원형은 안데르센 동화의 순진한 소년으로, 그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공연히 외침으로써 우리가 다들 옷 아래로는 벌거벗었다는 요점을 놓치고 만다.

 이와 정반대되는 멍청함의 두 번째 형상은 얼간이의 멍청함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상식과 동일시하며, 완전히 외관들의 대타자를 대변하는 사람들의 멍청함이 그것이다.(24) 위대한 탐정들은 이 ‘멍청한’ 상식적 파트너들이 필요하다. 즉 상식적인 대타자의 예상된 반응을 분석에 포함시킬 때만 범죄를 해결할 수 있다.(24)

 이 경우 ‘천치-또라이-얼간이’의 셋으로 나눈는 것은 말이 된다. 즉 천치는 그야말로 혼자로, 대타자 바깥에 있으며, 얼간이는 대타자 내부에(멍청하니 언어 속에 거주하면서) 있으며, 또라이는 이 둘 사이에 있다. 대타자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은 채, 그것을 불신하면서.(25) 라캉식으로 표현해보자면, 또라이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합적이지 않으며 ‘빗금이 처져 있다’는 걸 안다. 그를 완전히 멍청하진 않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의 멍청함의 비정합성뿐이다. 모든 인간이 가담하고 있는 이 멍청함의 이름은 물론 대타자이다.(26) 바로 이 또라이성이 급진적 혁명가(그리고 분석가)의 주체적 입장의 핵심을 이룬다. 이 책은 ‘천치를 위한 헤겔 완벽 가이드’도 ‘얼간이들을 위한 헤겔 대학교재’도 아니다. 이것은 대략 ‘또라이를 위한 헤겔 가이드’ 정도가 될 것이다.(27)

 ‘그래도 그것은 돈다’는 일화는 갈릴레오의 삶에 대한 역사적 사실로서는 아마 거짓일 수도 있지만 갈릴레오의 주관적 입장을 가리키는 것으로는 진실일 것이다.(28)

 이 책에서 나는 ‘그래도 그것은 돈다’로부터 모든 존재론적 결론을 끌어내려고 애써볼 생각이다. 즉 ‘움직인다는 것’은 공백에 도달하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즉 ‘물들이 움직인다’, 아무것도 없는 대신 무엇인가가 있다. 현실이 그저 아무것도 없음에 비할 때 초과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 아무것도 없는 것 이하의 것(less than nothing)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픽션에 의해 보충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이 텅 비어 있음을 감추기 위해.(29) 



평범한 가난한 유대인이 일어나 이렇게 선언했다. “오 신이여,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자 부유한 장사꾼이 랍비를 발로 툭 차더니 귀에 대고 경멸조로 속삭였다. “오만방자하지 않소! 감히 제깟 게 뭐라고 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야!” 실제로 순수한 없음에 이를 수 있으려면 이미 무엇인가여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이처럼 기묘한 논리를 양자 물리학부터 정신분석에 이르는 극히 이질적인 존재론적 영역, 상이한 수준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이처럼 기묘한 논리, 즉 프로이트가 충동이라고 부르는 것의 논리는 현대의 입자 물리학에서 널리 논의 중인 힉스장이라는 가설로 완벽하게 제시되었다. 특정한 체계로부터 빼내면 반드시 해당 체계의 에너지양이 늘어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가설을 수립하도록 강요하는 현상들이 있다. 이 어떤 것이 힉스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타나는 어떤 것은 무보다 더 적은 에너지를 담고 있을 것이며, 전체적인 음에너지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은 어떻게 무로부터 무엇가가 나타나는가?’에 대한 물리학적 버전이다.(30)

그렇다면 왜 헤겔에게 초점을 맞추는가? 철학사에서 이 그래도 그것은 돈다는 독일관념론에서, 특히 헤겔의 사유에서 가장 정합적인 정식화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책의 공리는 하나는 둘로 나뉜다이기 때문에 이 책의 중심적인 부분은 헤겔에 관한 부분과 헤겔의 반복으로서의 라캉에 관한 부분으로 나뉜다.(31) 실용주의(‘통하면 그만이지, 그것이 철학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신경 쓸 거 있어?’)와 뉴에이지식 반계몽주의라는 거짓 대안을 넘어 헤겔적 독법이 새로운 유물론적 해석을 위한 길을 열어주길 바란다. 이 책에는 헤겔과 관련해서 세 가지 주제가 상술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참조하는 방식의 모호함, 헤겔의 정신 이론에서의 광기의 독특한 지위, 헤겔의 체계가 이 체계의 틀을 폭파시키려고 위협하는 초과를 낳는 복수의 점(천민, 섹슈얼리티, 결혼)이 그것이다.

라캉과 관련해 첫 번째 간주곡은 의미화 과정의 소급성을 다룬다. 두 번째 간주곡은 라캉의 반상관주의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에 대한 메이야수의 최근 비판과 대립시키고 있다. 세 번째 간주곡은 인지과학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체라는 개념의 한계를 탐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헤겔의 반복으로서 라캉이 가진 정치적 함의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33)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장을 더불어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주요한 입장이 있다. 먼저 바디우가 민주주의적 유물론이라고 적절한 세례명을 주었던 것의 두 측명이 있다. (1)과학적 자연주의(뇌과학, 다윈주의 등) 그리고 (2)담론적 역사주의(푸코, 해체 등)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영성주의적 반응의 두 측면이 있다. (3)뉴에이지의 서구적 불교’, 그리고 (4)초월론적 유한성 사상(이것은 하이데거에게서 정점). 이 네 입장은 일종의 몰역사적 사유 대 역사적 사유, 유물론 대 영성주의라는 두 중심축을 따라 일종의 그레마스적 사각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책의 명제는 이중적이다. (1) 이 네 가지가 모두 놓치고 있는 차원이 하나 있다. 초월론적 간극/단절이라는 차원이 그것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프로이트의 용어가 바로 충동이다. (2) 이 차원이 현대적 주체성의 핵심 자체를 가리킨다.

담론적 유물론의 기본 전제는 언어 자체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주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서 교환 영역이 상품의 생산과정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과 똑같이 언어적 교환 또한 의미를 낳은 텍스트적 과정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의미를 생산하는 담론적 실천들의 복잡한 장을 간과한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언어적 물신주의라는 이 개념의 근본적 모호성이다.(34) 우리는 이 둘이 공유하는 기본 전제, 즉 담론적 생산과 물질적 생산이 이런 조야한 상동 관계에 있다는 전제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이 그 자체로 나타나는 독특한 철학적 순간(계기)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독일관념론이 그러한 순간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1787년과 헤겔이 사망한 1831년 사이의 시기에 걸쳐 있다.(35) 이전에 일어난 모든 것은, 그러한 폭발을 위한 준비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일어난 모든 일은 독일관념론에 대한 해석, 전복, 비판적 ()독의 여파로 읽어야 한다.

칸트는 현실을 전체로 구상하려는 순간 나타나는 균열을, 일련의 회복할 길 없는 이율배반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헤겔은 그러한 균열을 극복하는 대신 그것을 발본화하지 않았는가? 칸트에 대한 헤겔의 비난은 칸트가 사물들에 너무 친절하다는 것이다. 즉 이율배반을 사물들 자체 속에 위치시키는 대신, 즉 현실 자체를 균열되고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대신 이성의 한계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36) 변증법적 분석의 요점은 모든 현상이, 발생하는 모든 것이 자체에 고유한 방식으로 실패하며, 자체의 핵심에 균열, 적대, 불균형을 함축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데 있다. 현실에 대한 헤겔의 시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서 미래의 죽음의 흔적으로 보는 륀트겐 장치의 시선이다.(37)

4명의 위대한 독일관념론자들의 철학의 3가지 조건을 배열해보자. 칸트는 뉴턴 과학과 관련되는데, 그의 기본적 질문은 어떠한 종류의 철학이 뉴턴적 돌파에 적합한가이다. 피히테는 정치, 프랑스혁명이라는 사건과 관련된다. 그리고 셸링은 낭만주의 예술과 관련되어 명시적으로 철학을 절대자에 대한 최고의 접근으로서 예술에 종속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헤겔은 사랑과 관련되는데, 그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유의 맨 처음부터 사랑의 문제였다.(37~38)

이 모든 것은 칸트와 함께, 현실의 초월론적 구성이라는 생각과 함께 시작된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존재 자체에 대한 일반 과학, 전체 현실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기술로 간주되었으며, 개별과학들과 어떤 질적인 차이도 없었다. 바로 여기에 존재적 현실과 그것의 존재론적 지평의 차이를 도입한 것이 칸트였다. 리가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존재적 현실)과 무엇이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 규정해주는 선험적 망(존재론적 지평) 사이의 차이를 도입했던 것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에서 가상은 사물들이 유한한 필멸의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상적인(결함있는) 방식으로 간주되었다.(38) 우리의 과제는 그러한 가상을 넘어 사물들의 진상에 가닿는 것이었다. 하지만 칸트와 함께 가상은 이러한 경멸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현실로 지각하는 것 속에서 사물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그것을 단순한 환영적 가상으로 비난하고 그것을 넘어서 초월적 현실에 가닿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것, 사물들의 이러한 나타남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 사물들의 초월론적 발생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식별해내는 일이 되었다. 내가 현상들 사이에서 지각하는 원인들이 거기 존재하는 유일한 원인들이며, 선험적인 원인 개념은 그러한 원인들의 완벽한 모델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의 조건이다.(39)

비판적 체계란 모든 생각 가능한 오류들을 그러한 오류들의 내재적 필연성 속에서 체계화시킨 선험적 구조이다. 우리가 결국 얻게 되는 것은 선행적 환상들을 극복한 진리가 아니다. 유일한 진리는 모든 가능한 환상들이 논리적으로 상호 연결된 정합성 없는 건축물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행했던 작업이 아닐까? 여기서 헤겔과 칸트의 유일한 차이라면

칸트에게서는 이전의 환상에 대한 비판적 탄핵으로 등장하는 진리의 이러한 대화적 과정이 우리 인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그러한 인식에 외적이고 무관한 것으로 남아있는 예지체적 현실과는 관련이 없는 반면 헤겔에게서 그러한 과정의 고유한 장소는 물 자체인 것이다.(41)

헤겔은 극히 빈곤한 존재개념(그것은 무와 동일하다)으로부터 시작한다. 헤겔에 대한 셰링이 비판은 존재/없음으로부터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을 낳는 현실적인 생성으로 넘어가려면 우리의 출발점인 무는 살아있는 무, 어떤 내용을 생성하려는 또는 움켜쥐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욕망의 공백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4) 셸링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는 신 안에서 두 가지를 구분함으로써, 즉 존재하는 신과 신 자신의 근거(신에게서 아직 완전히 신이 아닌 것)를 구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바로 이 주체적/ 전재귀적 근거에 철저한 각, 불안정성, 불화를 도입한 것은 오직 셸링뿐이었다.(45)

세 가지 입장이 실러-슐레겔-휠덜린이라는 일종의 삼각형을 형성한다. 실러는 유기적이고 실체가 있는 질서로 주체가 통합됨을 믿고 있다. 자유로운 자아 본연의 모습이 아름다움 자연과 예술에서 온전히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슐레겔은 실체적인 조화를 가진 것이면 무엇이든 부단히 뒤흔들어놓는 주체성의 힘을 주장한다. 독일관념론에서 이러한 대립은 셸링 대 피히테라는 형태로 반복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성에 선행하는 근원의 실정성 대 주체성의 영원한 동요.

여기서 헤겔은 네 번째 입장을 차지한다. 반성하는 주체를 반성 이전의 존재로부터 분리시키는 비극적 간극을 이러한 존재 자체 속으로 옮겨놓는 것이다.(48) 즉 절대적 존재로부터의 분리 그 자체가 우리를 그와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분리는 존재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 분리는 주체-객체의 분리가 아니라 바로 분리와 통일 사이의 분리이다. 따라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공식을 분리와 비분리의 분리로 보충해야 할 것이다. 일단 이러한 단계를 완수하면 접근 불가능한 재귀 이전의 근거로서의 존재는 사라진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는 궁극적인 재귀적 범주로서, 자기 관계적인 분리의 결과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존재는 분리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때 나타난다. 휠더린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주체가 존재와 즉각적으로 하나가 되도록 연출함으로서 역으로 우리를 존재로부터 분리시키는, 단지 재귀적 범주에 불과한 것은 지적 직관이요, 존재의 삶 자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내러티브적 길이다.(49) 휠덜린은 분명히 헤겔의 정신분석학과 흡사하게 바로 별난 길’(중심의 상실, 그리고 중심의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의 반복된 실패, 이 둘 사이에서 영원히 동요하는 길)을 성숙과정이자 정신적 교육 과정으로 소급적으로 재구성하는 내러티브 속에서 해결책을 찾는다.(50) 담론적 선험주의가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항상-이미 언어에 의해 매개되고/구성되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휠덜린의 해결책은 어떻게 시니피앙 자체가 실재의 수중에 들어가는지, 즉 의미작용적인 개인(내러티브화)이 어떻게 실재 속에 개입하는지, 어떻게 그것이 실재적인 적대성의 해소를 초래하는지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헤겔의 경우 다른 세 관념론자에게서는 모두 부재하는 독특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매개가 존재한다. 즉 변증법적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인식론적 장애물을 물 자체 속으로 옮겨놓는데, 그러한 장애물을 물 자체의 존재론적 실패로 두는 데 있다. 그리하여 온전한 진리에 가닿는 데 실패하는 것 자체가 진리의 지표가 된다. 헤겔의 이러한 근본적 통찰이 오늘날 하나도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우연성-타자성-이질성을 모두 결합한 총체성이라는 주제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라는 것이 이 책의 전제이다.(51)

하지만 이 책의 목표는 단순히 헤겔로 돌아가자는 거시 아니라 오히려 헤겔을 반복하는 것이다. 헤겔에게서는 순수반복을 사유할 수 없는 무능력, 라캉이 대상a라고 부른 것의 단독성을 주체화할 수 없는 무능력이 드러났다. 그리고 라캉의 경우 그의 작업은 정합성 없이 열린 상태로 마감되었다. 세미나20앙코르는 그의 궁극적 성취와 교착 상태를 대변하며, 이후 몇 년 동안 필사적으로 다양한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나는 정신분석과 헤겔 변증법이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를 구출하리라는 것에,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하리라 생각한다.(53)

라캉은 자본주의의 가짜 위반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현실이 기반하고 있는 환상들의 진상을 밝혀냈다. 하지만 라캉의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는 운명적으로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은 상징적 질서 자체의 구성요소이며, 따라서 지배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은 단지 새로운 형상의 주인을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라캉을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큰 과제는 이런저런 버전의 주인의 담화에 의해 다시 포획되지 않을 저항의 공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애초에 라르드로는 장베와 함께 지배와 섹슈얼리티 사이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미완의 열림을 발전시키려고 했다.(54) 즉 지배관계없는 섹슈얼리티는 없으므로 성해방과 관련된 모든 프로젝트는 결국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낳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카프카라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즉 저항은 새장을 찾아 나선 새라고. 저항은 철저하게 탈성화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통찰에 기반해 라르드로와 장베는 철저한 해방의 행위자로서 금욕적인 모택동주의와 라캉적 천사의 모습의 개요를 그려 보인 바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 정권의 파괴적 폭력에 직면한 두 사람은 사회관계에서 철저한 해방이라는 모든 개념을 포기하고, 결국 정치에서의 차악을 긍정하는 분열된 입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치에서 우리는 온건해야 하며, 일부 주인은 다른 주인보다 더 낫다는 것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며, 가능한 유일한 저항은 내면의 정신적 저항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저항의 영성화를 거부하며, 라캉을 통과하는 급진적 해방의 프로젝트라는 바디우 원래의 프로젝트에 충실할 것이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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