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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1976년 2월 18일
- 발제자 : 화니짱
민족과 민족들
역사의 새로운 주제/주체의 도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입니다.
백과전서파는 민족의 실존에 대해 네 가지 기준을 부여합니다. 첫째. 민족은 인간의 거대한 다수자여야만 한다. 둘째. 민족은 어떤 한정된 고장에 사는 인간의 다수자여야 한다. 셋째. 이 한정된 나라는 국경선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야만 한다. 넷째. 이 다수자는 고유한 법률과 정부를 준수해야만 한다.
이리하여 민족에 관한 정의가 고착화됩니다. 이러한 정의는 귀족도 민족이고 부르주아지도 민족이라고 말하게 만들며, 그 당시에 지배적이던 넓은 정의를 배제하려는 목표를 지녔던 도발적 정의입니다. (178)
귀족들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대상으로서의 민족이라는 이 파열의 원리를 역사적 담론의 거대한 국가적 조직화 속에 어떻게 도입했는지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179)
로마의 정복
[‘불랭빌리에’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귀족을 약화시키고 하층민들을 치켜세움으로써 갈리아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고, 자신들 고유의 황제정치를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182)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특정한 귀족을 스스로 구성합니다. 자신들에게 맞설지 모를 군사적 귀족이 아니라 행정적 귀족을 말입니다. 갈리아의 부를 끌어내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제를 확보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로마인들의 영광과 몰락
로마인들은 더 이상 귀족[전사귀족계급]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점령한 갈리아 땅을 방어하기 위해 용병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현금 과세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통화량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평가절화와 화폐의 부재 때문에 상거래가 정체되고 대다수가 가난해지게 됩니다. 프랑크의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용병부대의 실존으로 인한 전반적인 황폐의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184)
문제는 로마적 체제나 프랑크적 체제가 정당성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닙니다. 결국 로마적 통치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부조리한가 혹은 정치적으로 모순적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의 영광과 몰락의 원인이라는 이 유명한 문제는 18세기의 역사적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 표현이 되며, 처음으로 경제적-정치적 유형의 분석이 시행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185)
앙리 드 블랭빌리에가 말한 게르만족의 자유에 대해
프랑크족의 힘은 로마인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 다시 말해 전사 귀족계급의 실존으로부터 프랑크족이 득을 봤다는 점에서 유래합니다. 프랑크족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자유를 가진 전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됐습니다. 그런데 이 전사 귀족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누린 자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기심의 자유, 탐욕의 자유, 전투와 정복과 노략질을 좋아할 자유였습니다. 지배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는 자유, 즉 존중의 자유이기는커녕 잔인함의 자유였던 것입니다. (187) 갈리아에 들어온 프랑크족 전사들이 갈리아-로마인들에게 동화되는 것을, 특히 제국의 법에 예속되는 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만하고 교만했다는 의미에서 너무나 자유로웠고, 그래서 전쟁의 우두머리가 그 말의 로마적 의미에서 주권자가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자유로운 그들은 정복과 지배를 너무나 탐했기에 갈리아 땅을 스스로 개인의 자격으로 탈취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봉건제의 아득히 먼 시작입니다. 이렇게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토지 소유자가 됐기 때문에, 갈리아의 땅 전체에 대해서는 로마식 주권의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188)
수아송의 항아리
클로도비크는 전리품을 분배할 때, 어느 항아리 앞에서 “이것은 꼭 내가 갖고 싶군!”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전사가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여러 승리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소유물로서 분할되어야만 하오. 그러니까 왕은 아무런 우선권도 갖고 있지 않소.” (189)
봉건제의 기원
사실상 프랑크족이 숫자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한 땅에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갈리아족에게 무기를 몰수했고, 전적으로 게르만적 계급인 전사 계급을 나라 한가운데에 남겨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싸우는 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네들 땅에 머물면서 경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부과세의 현물 납부를 요구받았을 뿐인 갈리아적 농민과 이 전사 계급 사이에는 로마적 갈리아와 같은 반목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아족과 프랑크족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편안히 소유한 덕분에 행복했다고 불랭빌리에는 말합니다. 즉, 프랑크족은 갈리아족의 생업 덕분에, 갈리아족은 프랑크족이 마련해준 안전 덕분에 행복했다고 말이죠. 여기에 불랭빌리에가 발명한 것의 핵심이 있습니다. 6-8세기부터 거의 15세기까지의 유럽 사회들을 특징짓는 역사적-법적 체계로서의 봉건제가 그것입니다. 부과세를 현물로 납부하는 농민 인구에 의해 떠받쳐지고 유지된 군사 계급의 이 지복감이 이른바 봉건제라는 법적-정치적 단위의 풍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리아에 정착한 이 귀족, 이 전사 귀족계급이 마침내 권력과 부의 요체를 잃고 결국 군주권력에 속박되어버립니다. (190) 항아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금지당한 모욕을 참지 못했던 클로도비크가 군대를 사열하면서 “수아송의 항아리를 기억하라”고 말하면서 이 전사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렸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시민적 행정관의 한 명에 불과했던 클라도비크는 시민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자기 권력의 절대적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군주는 권력의 군사적 형태와 규율이 시민법을 조직하기 시작한 순간에 탄생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왕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용병을 필요로 하고, 갈리아 인민에게서 용병집단을 형성합니다. 또 다른 동맹도 구성됐는데, 이번에는 왕권과 갈리아의 구 귀족계급 사이의 동맹입니다. 이들은 게르만족과 프랑크족 전사들에게 땅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딱 하나의 피난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교회기구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 자신들이 유통시킨 신앙체계로 인민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확산시켰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귀족계급은 교회에서 라틴어에 관한 지식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들은 교회에서 절대주의적 형태를 취한 법이었던 로마법 연구에 힘썼습니다. (192)
교회, 권리, 국가의 언어
이렇게 해서 라틴어, 로마법, 법의 실무와 더불어 교회는 절대 군주제의 거대한 동맹자가 됩니다. 라틴어는 국가의 언어, 앎의 언어, 법적 언어가 됩니다. 전사 귀족계급은 게르만의 언어만을 알고 있었기에 권력을 잃게 됩니다. 라틴어로 된 칙령에 의해 새로운 법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 전사 귀족계급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교회도, 왕도 전사 귀족계급을 무지한 채 머물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썼습니다. 불랭빌리에가 전사 귀족계급의 교육사를 통해 보여준 바에 따르면, 예컨대 교회가 피안의 삶을 마치 현세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양 강조했던 것은 마치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에게 여기[이승]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무런 중요성도 없으며 그들 운명의 본질은 저편[저승]에서 일어난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로써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에 매우 탐욕적이던 이 게르만족들, 현재에 그토록 집착하던 전사들은 조금씩 십자군 유형의 가사로 변모됐습니다. 블랭빌리에가 보기에 십자군은 귀족이 피안의 세계로 향했을 때 일어났던 것의 표현이자 현시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그 순간 이 세상에서는, 즉 그들의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왕, 교회, 갈리아족의 구 귀족계급이 그들[게르만족]의 땅과 권리를 빼앗게 될 라틴어로 된 법률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었습니다. (194)
블랭빌리에가 귀족들에게 권유하는 것은 반란이 아닙니다. 그것은 앎의 재개입니다. “당신들이 패배한 것은 어떤 순간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앎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앎과 기억의 원천을 간파하기. 이것은 역사의 모든 신비화를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역사에서 하나의 세력으로서 자처한다는 것은, 그 첫 번째 국면에서는 자의식을 되찾는다는 것을, 그리고 앎의 질서 속에 재기입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195)
불랭빌리에게서의 전쟁의 3대 일반화: 역사법칙과 자연법칙, 전쟁의 제도들, 힘들의 계산
첫째. 법의 기반들과 관련된 전쟁의 일반화
사실상 전쟁이 (자연)법을 완전히 뒤덮습니다. 블랭빌리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방향으로 역사를 편력해봐라. 어떤 사회에서도 자연법 따위는 없다. 오히려 도처에 불평등이, 불평등을 정초하는 폭력이, 전쟁이 있다. 귀족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에 이런 종류의 호전적인 긴장이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196) 물론 모든 지배, 모든 권력, 모든 전쟁, 모든 예속상태 이전에 일종의 원초적 자유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유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불랭빌리에의 경우 자유는 정확히 말해서 평등의 반대입니다. 자연의 평등법칙은 역사의 불평등 법칙 앞에서 늘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전투의 형태와 관련된 전쟁의 일반화
전쟁은 한 특정 국가에서 무기의 일반경제, 무장한 사람들과 비무장한 사람들의 경제이며, 이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제도적-경제적 계열들을 수반합니다. 만일 기사들의 중무장한 소수의 군대가 있다면, 왕의 권력은 불가피하게 제한됩니다. 왕은 그토록 비용이 많이 드는 기사들의 군대를 스스로 부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사들은 스스로 자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꾸로 경기병 군대라면 왕은 자기가 부양할 수 있는 대규모 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왕권이 증대하지만,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과세도 증가합니다. (199)
셋째. 침략-반란의 체계와 관련된 전쟁의 일반화
프랑크족의 귀족계급과 갈리아족 귀족계급의 예에서 보듯이 불랭빌리에의 분석에 있어 강자가 어떻게 약자가 되는지, 약자가 어떻게 강자가 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승자/패자라는 거대한 이분법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습니다. 강자는 약자가 되고 약자는 강자가 된 순간부터 새로운 대립, 새로운 균열, 새로운 분할이 있게 됩니다. (202)
전쟁에 대한 몇 가지 고찰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 내부에 일종의 계속된 전쟁으로서 힘관계를 도입함으로써 불랭블리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볼 수 있던 유형의 분석을, 역사적 용어로 소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정치적 장이 구성되고 정치투쟁에서 역사가 기능하게 된 것은 불랭빌리에의 담론과 같은 것에 있어서 오로지 군주만 관심을 가졌던 힘관계가 어떤 집단, 민족 등에게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순간부터 가능해졌습니다. 역사적-정치적 장의 조직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정치에서의 역사의 기능, 역사에서의 힘 관계들의 계산으로서의 정치의 활용, 이 모든 것이 여기서 서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전쟁이 사실상 역사적 담론의 진실의 모체였다는 관념에 이르게 됩니다. 즉, 철학이나 법이 믿게 만들려고 했던 것과는 반대로, 진실과 로고스는 폭력이 멎은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귀족이 제3신분과 군주제에 맞서 동시에 정치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역사를 전쟁으로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적 담론 같은 것이 수립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프랑스의 귀족계급이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발명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귀족계급은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전쟁을 바로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으며, 전쟁은 동시에 담론의 출발점, 역사적 담론이 향하는 참조점,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정치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접어들 때에 누군가가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된 전쟁이라 분석하고 말하고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7강~8강 발제 15.11.0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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