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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76211

 

발제자 : 화니짱

 

기원에 관한 서사로서의 트로이 신화

프랑스의 트로이 서사에서 로마가 누락된 것을 이해하려면 기원에 관한 이 서사를 가설적 역사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이 서사는 법을 말하고 권력의 법을 말하는 담론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프랑스가 제국을 계승했다는 것과, 로마와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것을 뜻합니다. 프랑스는 즉 다른 종류의 로마입니다. 프랑스는 로마로부터 독립해 있기에 다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로마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계승

프랑수아 오트망의 프랑코 갈리아라는 텍스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유포한 게르만설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프랑스에서 유포된 트로이설의 맞수였습니다. 갈리아를 침략한 프랑크족도 우리처럼 게르만족이다. 갈리아족은 로마적 지배에 저항했지만 수세기 동안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4세기와 5세기 무렵, 형제인 갈리아족을 위해 이들의 게르만족 형제가 해방운동에 착수했다. 게르만족과 갈리아족은 이제 하나의 동일한 민족일 수밖에 없으며, 그 구성(헌법)과 기본법은 게르만 사회의 기본법입니다. 자신들이 원한 왕을 선출하고 필요하면 왕을 퇴위시키는 인민의 주권, 일시적인 공무원이자 늘 평의회의 처분에 따르는 행정관들에 의해서만 규제되는 인민의 주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왕들은 그 뒤로 이 게르만적 구성(헌법)을 위반함으로써 16세기 프랑스 군주제가 잘 보여주는 절대주의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54)

 

'갈리아-프랑스

게르만-프랑스, 프랑코-갈리아 의 강력한 통일성이 이른바 역사라는 형태로 현재의 양분을 이야기 합니다. 오트망이 말하는 로마인 침략자가 과거 속에서 전치된 것, 즉 교황-성직자들의 로마적 등가물임은 분명합니다. 형제이자 해방자인 게르만족은 분명히 라인 강 저편에서 온 개혁된 종교입니다. 인민주권과 왕국의 통일성은 당시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지지를 받았던 입헌군주제라는 정치적 기획입니다.

 

침략, 역사, 그리고 공법

17세기의 1/3분기 발부터 이 테제는 그 게르만적 기원을 우회하려는 대상이 됩니다.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 군주제의 기원-창설에 관해 말해진 것과 17세기 중엽 프랑스 군주제의 창설에 관해 말해진 것 사이에는 공통점도 근본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침략이 그 형태, 모티프, 결과와 더불어 역사적 문제가 됐다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공법의 원리 자체를 정식화하는 것이 침략에 요구됐던 것입니다. (156)

 

민족적 이원론

민족적 이원론의 테마를 도입한 것은 하나의 갈등으로서, 이것은 아직 역사에도 공법에도 기입되지 않은 두 가지 주요사항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하나는 반목하는 집단들 간의 전쟁이 실제로 국가의 하부 구조를 구성하는가의 여부를 아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권력이 이 전쟁에서 어느 정도까지 산물이나 중재인으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 이와 동시에 더 흔하게는 도구, 수혜자, 당파적이고 교란하는 요소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아는 문제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굳이 정식화될 필요조차 없었던 사회체의 동질성이라는 암묵적 테제가 이로부터 깨지게 됐습니다. (162)

 

군주의 앎

행정은 왕이 무제한적 의지를 고장에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지만 반대로, 행정은 자신이 왕에게 부과한 앎의 질과 성격에 의해 왕에게 군림합니다. (165) 귀족적 반동과 연결된 모든 역사가의 진정한 표적은 17세기 이래로 행정기구를 국가의 절대주의와 연결하는 앎-권력의 메커니즘이었습니다. 되찾아야 하는 것, 이제 차지해야 할 것은 왕의 앎입니다. (166)

 

 

앙리 드 불랭비리에의 프랑스의 상태

귀족이 왕의 앎 속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시 얻기 위해 사용하고자 했던 이 새로운 앎의 적은 법적 앎입니다. 이것은 왕이 자신의 절대주의라는 이미지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인 앎이라는 점에서 순환적인 앎입니다. 법원 서기들의 이러한 앎에 맞서 귀족은 역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앎을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공법의 제도들을 더 깊고 더 장중하며 더 본질적인 또 다른 약속으로 이뤄진 더 오래된 그물망 속에 다시 놓으려고 노력합니다. (168)

 

재판소 문서고, 관료조직, 그리고 귀족의 앎

또 다른 거대한 적은 행정(관리)감독관의 앎, 즉 관료조직의 앎입니다. 이 앎 덕분에 왕은 자신의 권세를 떨치고, 복종을 얻으며, 재정(세금) 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귀족은 반대로 부와 권력이 줄어들어갔습니다. 이에 맞서 귀족은 부의 역사를 부각시킵니다. 결국 이 역사는 궁극적으로 왕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자행한 부정행위의 혼합물일 뿐인 부의 생산이라는 문제의 뒤를 캐는 역사입니다. (169)

 

역사의 새로운 주제(주체)

이때까지 역사란 권력에 의한 권력의 이야기였습니다. 17세기 말 반동적 귀족의 담론과 더불어, 역사의 새로운 주체/주제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말을 하는 새로운 주체입니다. 자기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당시의 한 역사가가 사회라고 불렀던 새로운 주체/주제입니다. 즉 신분에 의해 결집된 개인들의 연합, 집단으로 이해된 사회, 이것은 당시의 어휘로 민족이라는 말로 지칭되었습니다. (171) 국가 아래에서 서로 대립하는 집단들의 수준에서 일어난 이 모든 과정이 역사의 최초의 주제로서 표면에 떠오릅니다. 이것은 집단 간 동맹이나 경쟁상태, 감춰지거나 드러난 이해관계의 어두운 역사입니다. 더 이상 권력의 강화라는 의례적 성격이 아닌 새로운 파토스, 이것이 그 웅장함에 의해 프랑스 법 사상의 대부분을 이루게 될 사상을 표시하게 됩니다. 요컨대 그 파토스란

첫째. 역사적 앎에 대한 거의 에로틱한 열정.

둘째. 해석적 지성의 체계적인 저하.

셋째. 가차 없는 고발.

넷째. 국가에 맞선 음모나 공격, 쿠데타, 국가에 대한 타격 같은 어떤 것에 대한 역사를 분절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헌법

역사적 앎이 절대 군주제의 행정적 앎 유형에 맞서는 정치적 무기였던 시대에, 구준제는 이 앎을 다시 식민화하고 싶어 했습니다.(175) 우선 국왕의 모든 장관에서 필수적인 기록, 정보를 제공하는 재무도서관이 1760년경에 창립됩니다. 1763년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공법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문서 보관소가 창립됩니다. 1781년에는 이 두 제도가 행정-역사-공법 입법도서관으로 통합됐습니다.(174) 이것은 삼부회보다 10년 전에, 이미 일종의 헌법을 암묵적으로 처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재료들에서 출발해 삼부회가 기획하고 1789년에 조직됐던 것입니다.

이것은 왕권의 최초의 양보입니다. 왕의 권력과 그의 행정 사이에 어떤 것, 즉 헌법이나 기본 법률들, 인민의 대표 등과 같은 것이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처음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앎은 군주의 앎을 다시 차지하기 위한 무기였기 때문에, 군주의 권력과 행정의 지식-행사 사이에 이 앎을 권위적인 형식으로 다시 이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175)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5강~6강 발제 15.10.2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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