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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2. 25 강의>

발제자 덴마

불랭빌리에와 역사-정치적 연속체의 형성

불랭불리에는 민족 또는 민족들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제도, 사건, 왕들, 권력들 밑에서- 전혀 다른 것을 분석했다. 그는 이중의 반전을 시도했는데, 우선 신하들의 역사를 연구했다. (199) 권력관계의 다른 쪽에 있던 역사의 질료를 발견하며, 무기력한 실체가 아닌 하나의 힘, 또는 여러 개의 힘들로서 분석했다. 권력이란 그것을 행사하지만, 그러나 그다지 강하지 않은 소그룹의 힘이다. 그러나 결국 이 권력이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불랭빌리에가 발견한 것은 민중에 근원을 둔 힘과, 힘인 어떤 것으로부터 형성된 힘 사이의 결합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랭불리에는 소위 권력의 합리적 성격이라 부를 수 있는 원칙을 정한다. 권력이란 소유나 가능성이 아니고, 상호관계가 작동하는 대립항의 차원에서만 연구해야 하는, 또는 연구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편이 결코 무한하지 않고 다른 한편도 결코 제로가 아니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대항세력에 관한 역사를 써야한다.(200)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역사란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장이 아니다. 그에게 역사는 일종의 판례집 또는 권력행사를 위한 전략적 모델일 뿐이다. 그러나 불랭빌리에에게 있어서 힘의 관계와 파워게임은 역사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역사가 있었다는 것, 사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어떤 것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힘의 관계, 어떤 파워게임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불랭빌리에에게 있어서는 역사기술과 정치적 계산들은 정확하게 같은 대상을 갖는다. 아마도 역사기술과 정치적 계산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201) 그러나 그것들이 말하는 것, 이 이야기와 이 계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확하게 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사상 처음으로 불랭빌리에에게서 우리는 역사-정치적 연속체를 갖게 되었다. 불랭빌리에는 행정적 앎들을 비판하는 식의 앎에 근본적으로 반대였다. 그는 이 행정적 앎, 경제적 앎들을 몰수하여 그것의 탄생장소이며 사용의 장인 절대왕권 체제에 대항하는 무기로 다시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202) 불랭빌리에는 그때까지 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원칙이었던 것을 역사의 이해원칙으로서 작동하게 했다. 역사기술과 국가경영이 서로 연속성을 갖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경영의 합리성의 모델을 역사이해의 암호판으로 사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정치적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불랭빌리에의 의도는 귀족들에게 읾어버린 기억과 소홀했던 앎을 되돌려 주면서 다시금 사회적 장의 세력들 한가운데 하나의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관심은 현재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들의 장치 안에서 힘의 관계들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203) 역사는 투쟁의 장 안에서 스스로를 배치하고 기능하는 투쟁의 앎이 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현재 전쟁 중에 있으며, 그것은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204)

역사주의

역사주의는 바로 전쟁과 역사가 뒤얽힌 매듭, 전쟁이 역사에 또는 역사가 전쟁에 속해있는 그 피할 수 없는 상호귀속성이다. 역사적 앎은 그것이 아무리 멀리 나간다 하더라도 자연이나 법, 질서, 또는 평화를 절대 발견하지 못한다. 역사는 전쟁을 결코 피하지도 못하고, 그 근본법칙을 발견하지도, 그 경계선을 확정짓지도 못한다. 이유는 전쟁 그 자체가 이 앎을 지탱하고, 이 앎을 통해 지나가고, 이것을 관통하여 이것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 앎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이며, 전쟁안에 들어있는 전술적 장치이다. 전쟁은 역사를 관통하여, 즉 전쟁을 말하는 역사를 관통하여 수행된다. 그런데 역사적 앎과 실제적 전쟁을 잇는 기본적인 매듭, 그것이 바로 역사주의의 핵이다. 결코 더 이상 축소시킬 수도 없고, 그저 언제나 삭제해야만 하는 핵이다. [우리의] 첫 번째 과업은 역사주의자가 되어 역사에 의해 이야기되는 전쟁과 자신이 이야기하는 전쟁에 의해 관통되는 역사 사이의 영원하고도 피할 수 없는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206)

비극과 공법

소설과 규범의 문제 사이에도 본질적인 귀속관계가 있듯이, 비극과 법, 비극과 공법 사이에도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귀속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의 고전 비극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대 왕들만을 문제삼았다. 이처럼 고대에서 주제를 따온 이유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07) 첫째, 루이 14세의 왕권이 그 형태나 역사적 계속성에 의해 고대 왕정의 직계 후손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과 둘째, 비극의 비극적 힘을 약화시키고 그것을 연애극이나 음모극으로 떨어뜨리는 어떤 제도 즉 궁정의 존재가 뒤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궁정이 끊임없이 일상을 지엄한 것으로 만들고, 한 사람의 보통 인간을 왕국의 실체 그 자체인 왕의 인격으로 만드는 반면, 비극은 이와 정반대의 일을 했다. 비극은 궁정의 예식이 매일같이 치켜세우는 어떤 것을 허물고 해체한다. (208) 라신의 비극은 무엇을 했는가. 그것은 왕정 한가운데서 왕의 육체의 죽음과 부활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보여주며, 왕정의 찢겨진 예식과 그 뒷모습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라신의 비극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심리적이라기보다는 법률적인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루이 14세는 라신에게 자신의 역사편찬관이 될 것을 욕하면서, 사실은 그때까지의 역사편찬 관행이었던 권력찬양의 노선에 머물러 있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209)

역사의 중앙집권

라신의 먼 후계자인 자코브 니콜라 모로는, 루이 16세에 의해 역사장관으로 임명되었던 왕의 박식한 옹호자[장관으로서의 역할]였다. 이때는 군주의 권리가 역사의 이름으로, 그것도 귀족만이 아니라 의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 등 여러 지평에서 공격받고 잇던 시대였다. 이때는 또한 역사가 소위 모든 민족’, 모든 품계와 계급들에 의해 자기 권리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시기이다. 이와 같은 역사부서의 창설, 역사의 행정 집중은 정치투쟁 속에서 왕을 무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 역사-정치적 투쟁 안에서 강요된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210) 결국 이 역사적 담론이 국정수행에 결정적으로 통합되기 위해 이 담론을 영원히 코드화하려는 것이었다. (211) 모로는 라신과 같지 않고, 루이 16세는 루이 14세가 아니었고, 궁정의 역사편찬과 행정적 역사편찬의 차이는 크다.

계몽주의 시대의 문제틀과 앎의 계보학

학문의 역사는 인식의 구조에서 진실의 요구로 나아가는 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앎의 계보학은 담론과 권력, 또는 담론적 실천과 권력의 대립이라는 다른 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수많은 이유로 이것을 18세기라는 특정의 시기, 이 영역에 적용해보면 앎의 계보학은 우선 계몽주의 시대의 문제틀을 해체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 당시에 계몽주의의 진보로 여겨졌던 것, 즉 무지에 대한 지식의 투쟁과 환상에 대한 이성의 투쟁, 편견에 대한 경험의 투쟁, 그리고 오류에 대한 이성의 투쟁등을 해체시켜야만 했다. (211) 거대하고 수많은 싸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식과 무지 사이의 싸움이 아니고 앎들 상호 간의 거대하고 무수한 싸움이었다. 앎들은 그것들 안에 내재하는 권력 효과들에 의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212)

규율적 앎의 네 가지 작동과 그 효과들

18세기에는 각기 다른 다수의 무수하고 다양한 앎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경제적 수요와 마찬가지로 생산력이 발전해감에 따라 이 앎의 값은 상승하여 앎들 상호간의 투쟁, 돌기성의 제한, 비밀의 요구가 점점 고조되어 팽팽한 긴장을 이루게 되었다. 앎의 배타적 소유, 그 분산과 비밀에 연결된 권력의 효과와 경제적 유도의 주변에서 일어난 거대한 투쟁이었다. (212)

그런데 이 투쟁, 일반화의 시도이기도 한 병합의 기도 안에서 국가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네 가지의 방법으로 개입하려 했다. 우선 경제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면서 불필요하고 환원불가능한 소소한 앎들을 제거하거나 자격을 박탈했다. 그러니까 (1)제거와 자격박탈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로는 이 앎들 (2)상호간의 규격화를 시도하였다. 앎들 상호간 뿐만 아니라 그 앎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상호 교환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 조작은 이 앎들의 (3)등급적 분류이다. 모든 앎들을 마치 큰 상자 안에 작은 상자를 차례로 집어넣듯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놓을 수 있게 되었다. 네 번째 가능성, (4)피라미드적 중앙집중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 피라미드적 중앙집중이 앎들의 통제를 가능케하고, 선택권을 확보하고, 그 중에서 강조하고 싶은 앎의 내용과 방향을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서 위로 전달할 수 있게 해준다. (213)

모든 기획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도태와 규격화, 등급화, 집중화 등의 네 가지이다. 이것들이야말로 소위 규율적 권력을 조금만 상세히 들여다보면 확연하게 눈에 띄는 네 개의 조작이다. 18세기는 앎을 규율화한 세기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앎을 내면적으로 조직하여, 스스로 자기 영역 안에 틀린 앎이나 또는 앎일 아닌 것을 도태시키는 기준을 마련하고, 내용을 동질화, 규격화, 등급화하며, 마지막으로 일종의 사실의 축 위에 그것을 집중시키는 규율로 만든 것이다. (214) 그러니까 모든 앎을 규율로 정비하고, 이렇게 내적으로 규율화된 앎들을 분산시켜 그것들 상호간의 소통, 분배, 등급화를 통해 일종의 통합 분야를 만드는 것.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215)

철학과 과학

과학은 18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앎들의 규격화와 함께 그 다형적 개체성 안에 현재 우리 문화의 몸체를 이루는 사실과 강제, 즉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타났다. 바로 그 시기에, 그리고 이런 현상과 함께 철학의 창시적이며 정초적인 역할도 사라졌다. 보편 과학의 기획으로서의 수학도 사라졌다. 이제는 일반 분야로서의 과학, 앎들의 규율적 경찰로서의 과학이 철학과 보편 수학의 대를 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것은 앎들의 규율적 경찰에 고유한 문제, 즉 분류의 문제, 등급의 문제, 근접성의 문제 등을 제기할 것이다.

앎들의 규율화

소위 이성의 진보 밑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 다형적, 이질적 앎들의 규율화였다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15) [18세기 말 19세기 초 나폴레옹적] 대학은 실제와 이론의 독점에 의해 선발권을 행사했다. 이로써 그 밖에서 생겨난 원시상태의 앎은 처음부터, 비록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동적으로 처음부터 자격이 박탈되었다. 아마추어 학자의 사라짐, 그것이 18세기 고유의 현상이다. 일종의 공인된 학문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앎의 동질화를 꾀하고, 합의를 끌어내며, 직간접적인 국가기구의 성격에 따라 마침내 중앙집중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불분명한 경계선 및 연장과 함께 대학 비슷한 어떤 것이 19세기초에 생겨난 것은 이 앎들의 규격화가 작동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216)

나는 가장 미세하고 가장 기본적인 수준, 즉 개인의 신체의 수준에서 바라본 권력의 규율적 기술이 어떻게 권력의 정치-경제학을 변화시켰으며, 또한 권력장치들을 변모시켰는지를 검토하여 보여주었다. 또한 개인의 육체에 가해지는 규율적 기술이 앎의 축적을 유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앎의 영역을 개척하기까지 했으며, 그 예속된 육체들로부터 영혼 주체, ‘자아’, 심리현상 등으로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을 끌어내는 과정도 보여주었다. (217) 이 모든 것이 작년의 내 연구주제였다. 이제는 앎들에 가해진 규율화, 이 규율화된 앎에서부터 더 이상 진실의 통제가 아니라 과학의 통제인 새로운 통제방식이 나타난 경로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218)

왕권은 역사적 앎을 규율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앎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제 국가에 의해 규율화되고 공식 교육의 내용이 된 역사는 투쟁과 연결된 역사, 투쟁하는 주체들의 의식으로서의 역사와는 영원히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벌어짐은 결코 그 양쪽의 존재를 방해하지 않는다. 한편에는 역사적 규율의 형식을 띤, 실제로 규율화된 앎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정치의식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분열되어 투쟁하는 다형의 역사의식이 있다. (219)

151103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8강.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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