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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푸코 / 2015.11.10.() /닥터홍

1976.3.3.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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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앎의 전술적 일반화

역사적 담론은 규칙적이고 규범적인 형식의 귀족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전략에 두루 사용될 수 있는 전술적 도구로 일반화 되었다. 역사적 앎은 정치적 장의 모든 적대세력들에 의해 배치되고 사용될 수 있는 일종의 담론적 무기가 되었다. 이것을 단순히 귀족 이데올로기나 계급 입장의 산물로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이것은 담론적 전술이고 앎의 장치, 혹은 권력의 장치이다.

역사적 담론은 세 개의 투쟁과 일치하고, 서로 다른 세 개의 전술을 생산하며 세 방향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는 언어현상 및 언어학과 근본적으로 관련을 맺고, 민족성에 중심을 둔다. 두 번째는 사회적 계급들에 중심을 두고, 경제적 지배를 주 현상으로 하며, 결국 정치경제와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번째는 종족에 중심을 두며, 생물학적 종의 특성 및 도태가 주현상이다. 언어학, 정치경제학, 생물학, 말하기, 일하기, 살기. 이 모든 것이 역사적 담론과 전술에 투입되고 연결된다.

 

헌법, 혁명 그리고 순환적 역사

어떻게 역사적 앎이 18세기 초의 귀족의 반동이라는 자신의 탄생 장소를 벗어나 18세기 말의 전방위적 정치투쟁의 일반적인 도구가 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불랭빌리에는 민족의 이원성을 역사 이해의 원칙으로 삼았었다. 일련의 세력관계의 이동과 수정, 반전 등에 의해 최초의 갈등(전투, 전쟁, 정복, 침입), 즉 다른 모든 대립이 파생되는 최초의 호전적인 핵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역사 속에 자리 잡은 다양한 전투들을 관통하는 일종의 전투 계보를 그리는 것이다. 배신, 결합, 계략, 비겁성 등을 들춰내어 전략의 끈을 잇고 끊이지 않는 도덕적 분할의 선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크 족의 골 침입 같은 실제로 존재했던 어떤 결정적 힘의 시련기에 역사에 의해 기입되고 증언된 힘의 관계를 재발견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분석의 기획에 있어서 세 임무는 전략적 끈 잇기, 도덕적 분할선 긋기, 그리고 역사와 정치가 구성되는 시점, 즉 왕국의 구성시기를 엄정하게 확립하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법률이나, 왕과 신하간의 계약으로서의 헌법이 아닌, 힘의 관계나 비례의 작용과 균형, 안정적인 비대칭성, 불규칙성으로 구법의 재정립이 아니라 힘의 혁명에 의해 접근될 수 있는 헌법을 자리매김해야 한다. 불랭빌리에에게서 가능했던 것이 헌법과 혁명이라는 두 개념의 짝짓기이다. 헌법이 법률의 총체가 아닌 힘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 힘이 제로에서 정립될 수는 없다. 그래서 순환적 역사철학, 즉 역사는 순환운동에 의해 발전한다는 개념이 재도입된다. 헌법과 혁명, 순환적 역사이 세 개의 주제가 불랭빌리에의 전술적 도구의 양상들이다.

 

미개와 야만

그렇다면 구성의 시점을 찾기 위해서 불랭빌리에가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가장 큰 적수는 자연인, 미개인이었다. 그것은 법률 이론가가 사회체의 구성요소로 보았던 자연인이다. 즉 경제인에 의해 발명된 이해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노동의 산물을 다른 산물과 교환하는 과거도 역사도 없는 호모에코노미쿠스적 인간이다. 18세기 법 이론에서 19, 20세기 인간학에 이르기 까지 미개인(자연인)과 교환의 짝짓기를 계속 발견할 수 있다. 불랭빌리에의 역사 정치학 담론은 다른 주체 미개인의 적수, 야만인을 내세웠다. 야만인은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되고, 성격되어 지고, 정의된다. 야만인이 경멸 혹은 선망의 대상에게서 적대관계 혹은 영구 전쟁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사회를 건설하며 역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문명을 파괴하고 불지르고 거기에 침투하므로써 역사에 편입된다. 미개인(자연이)과 야만인의 차이점은 문명과의 관계, 즉 선행하는 역사와의 관계이다. 방금 불태워 버린 문명의 선행 역사가 없으면 야만인도 없다. 두 번째로 야만인은 교환의 매개가 아니다. 그들은 장악하여 약탈하여 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의 자유는 타인의 잃어버린 자유위에 (약탈하여) 있고 자신의 자유를 권력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야만인의 권력은 개인적인 힘을 증가시키기 위함이고 군사적이며 민간적인 양도, 계약(홉스)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다.

불랭빌리에의 분석속의 헌법과 혁명, 야만, 지배라는 요소를 통해 18세기에 수립될 커다란 전술들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헌법의 균형과 야만의 광포성 사이를 어떻게 가시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가이다. 올바른 헌법의 기능을 위해 야만성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문제는 야만인과 야만성에 대한 여과이다. 귀족이건 왕건이건 부르주아지건 역사적 담론의 장 속에서 전투들의 전술적 입장들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이 야만성의 필연적 여과작용이다.

(불랭빌리에 의한 프랑크 족(야만인)의 침입에 대한 역사에의 도입 상기)

 

야만의 세 검열 : 역사적 담론의 전술들

첫 번째 여과장치는 프랑스 왕정을 도입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 왕정을 떠받쳐 주는 게 그 옛날 게르만의 침입이었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뒤보스, 모로에 따르면 프랑크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침략은 없었다. 침략이 있기는 있었는데 그것은 부르군디나 고트족에 의해 일어났고 침략을 몰아내기 위해 로마는 소수민족인 프랑크족과 연합을 하여 그들은 갈로로맹의 시민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프랑크족은 흡수 되었고 로마의 황제만이 있ᄋᅠᆻ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여과장치는 프랑크의 게르만적 자유(야만적 자유)를 귀족적 특권의 고유 성격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프랑크인이 체제는 골의 정치 사회적 귀족체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난폭하고 야만적 민주주의였다. 군주와 권력들은 점점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어, 프랑크인들의 야만적 민주주의에서 이탈해서 왕권주의적이고 동시에 귀족적인 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잠시 샤를마뉴 대제가 민중들에게 가깝게 되어 게르만적(프랑크적, 야만적)민주주의에 회귀 되었으나(이 잠시의 사례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이용된다) 이후 귀족들이 절대주의 위그 카페왕정을 수립하였고 위그 카페에 대한 귀족들의 선물을 보상하기 위해 왕조에서 귀족들에게 행정 관할구역과 봉토를 하사했다. 왕정과 귀족계급 사이에 왕을 만들어낸 귀족과 봉건제를 만든 왕 쌍둥이 현상이 생겨난다. 나중에 귀족과 왕조도 싸우지만 그들은 근본에서는 쌍둥이였다.

세 번째 여과장치는 나쁜 야만성인 게르만의 야만성(프랑크)과 자유를 간직한 좋은 야만성인 골의 야만성을 분리하는 것이다. 브레키니와 샵살의 가설에서 보면 로마인들은 골의 자유를 허용해서 도시가 활발했다. 반면 프랑크는 도시에 관심이 없었다. 카롤링거 왕조 말기에 봉건제가 들어섰을 때, 물론 세속의 혹은 성직의 대영주들은 도시의 부에 손을 대려 했지만 도시들은 저항하고 싸웠다. 15, 16세기 이 저항은 왕권 귀족들로 하여금 그들(골의 자유)의 법과 경제방식, 삶의 방식을 존중하게 만들었다. 이 가설에서 부상한 것은 제 3신분으로 이들은 단순히 왕의 양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저항 에너지 부, 상업 덕분에 옛 골인들의 야만성과 연결된 매우 세련된 도시법 덕분에 형성된 계급이다. 이들은 로마의 풍습을 가까이했다. 대혁명 때도 로마적인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 브레키니와 샵살 담론의 중요성은 그것이 역사의 장을 엄청나게 넓혀 놓았다는 점이다. 야만의 유목민(프랑크)이 골 지방을 누빈 한 세기의 작은 핵에서 출발한 것이 샤를마뉴의 중요성을 보았고 카페 왕조를 보았고 로마인들의 도시조직, 골의 자주권 까지 갔고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15,6세기에 경제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방법의 문제: 부르주아지의 반역사주의와 에피스테메의 장

이렇게 세밀하게 역사를 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방법의 문제 때문이었다. 모든 분석 방법에서 여러 변화들을 단절 없이 완벽하게 주파 할 수 있다. 역사적 가설이 무엇이든간에 모든 역사적 담론들은 그 에피스테메의 조직이 매우 촘촘하다. 이 말은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주체들이 말하고, 전술적으로 상반되고 적대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앎을 규제하는 촘촘한 망이 형성되고 앎이 규칙적으로 형성되면 될수록 거기서 말하는 주체들이 엄격한 선에 따라 정렬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대립된 담론들은 전체적인 전략 안에서 진실만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 법규, 경제적 이해 또한 문제가 된다. 담론의 전술적 가역성은 이 담론의 형성규칙들이 동일했기 때문에 나온 직접적 결과이다. 담론 외적 투쟁에서도 이 담론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처럼 에피스테메의 장이 규칙성을 지니고, 형성약식이 동질적이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있어서의 역사적 담론의 활성화

두 번째는 대혁명기에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다. 부루주아지(3신분)는 역사에 정치적 기획을 투입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역사우호자였던 귀족과 달리 그들은 반역사적이었다. 그들의 반역사성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선 18세기 부루주아지는 계몽군주에 우호적이었다. 그 이유는 계몽군주가 역사를 중요시 하지 않고 철학, 기술, 행정에 의한 제한적이고 완화된 왕권이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대혁명 전까지 그들은 무역사적(a-historique)인 헌법을 요구하며 미개인들에게 호소하는 루소의 사상에 열광하며 야만인들의 역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후 법률적 루소주의를 위시하여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형태가 대혁명 기간에 부활한다. 로마적 도시국가와 프랑크적 자치와 갈로 로맹적 가치의 접합점이있던 샤를마뉴라는 인물이다. 그는 광장에 인민을 모으고 상업과 도시의 수호자였다. 반면 대혁명에서 봉건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혐오한다.

 

봉건제와 고딕식 로마네스크

여기서 19세기 초에 아주 중요한 것 어떤 것이 형성되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재해석이며 대혁명을 관통하는 정치적, 사회적 투쟁을 종족의 역사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대혁명기에 유행했던 고딕 소설은 정의롭지 못한 군주, 무자비한 유혈적 영주들을 다뤘다. 고딕 소설이 나오기 약 1세기 전 사람들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영주와 봉토 그들의 권력과 지배형식등의 주변에서 싸웠고 18세기 전체에 걸쳐 봉건제의 문제가 법과 역사 정치의 차원에서 다뤄졌다. 다음번은 대혁명의 재평가로서의 역사에 대해 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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