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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진실 / 미셸푸코 / 세 번째 강의 / 2017.9.17.(일) / 닥홍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에서 발견된 파레시아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 시기는 민주정 제도와 체제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던 아테나이의 정치적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파레시아가 경멸적 의미로 사용되는 유일한 형용어구가 나오기에 흥미롭습니다.
인용된 구절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해 법정에 소환된 오레스테스의 재판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러 온 사자의 이야기입니다. 무슨 시민이 출석했을 때 전령이 일어나 “누가 말하기 원하시오?”라고 발언의 평등권 isegoria를 담보하며 시작합니다. 그러자 탈튀비오스와 디오메데스가 이야기를 합니다.
탈튀비오스는 힘 있는 자들의 권력에 순종하는 하수인입니다. 탈튀비오스는 타자의 권력을 대리하는 전령이자 예속된 자로 솔직하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dichomutha라는 말은 상반된 두 사물을 동시에 의미하는 양의적 담론을 지시합니다. 탈튀비오스는 민회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심을 얻기를 원했고, 두 진영의 적대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양의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처하자고 제안합니다.
한편 에우리피데스의 또 다른 작품 <<탄원하는 여인들>>에서는 테바이에서 온 이름 모를 전령과 아테나이의 일등 시민인 테세오스 간의 흥미로운 대화가 등장합니다. 민주정, 군주정, 전제정, 민주정 가운데 어떤 통치 체제 최상의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민주정에서는 법이 성문화 되어 있고,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민회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두 번째 연사는 디오메데스로 용맹한 무훈과 유창한 수사학으로 유명한 전시입니다. 그는 절제된 해결책, 가벼운 형별, 정치적 동기를 갖지 않는 형벌, 복수심에 불타는 앙갚음이 아닌 형벌을 제안합니다. 오레스테스는 추방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적 동기에서 아테나이를 정화하고자 합니다. 디오메데스는 매우 절제되고 합리적인 판결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사람들 일부의 동의만 얻고, 나머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합니다. 극단적인 의견은 만장일치를 이끌어내지만, 절제된 의견은 민회를 분열시킵니다.
그 다음 연사 둘은 우리의 말로 하자면 사회적 유형의 사람입니다. 탈튀비오스와 대칭을 이루는 나쁜 웅변술사인 전자는 민주정에 해로운 연사입니다. 그의 첫 번째 특징은 “절제되지 않은 혀를 가진 자가 그때 일어섰다.”라는 아튀로글로소스 절제되지 않은 혀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혀는 있지만 문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입이 항상 열려 있어서 입을 다물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경멸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침묵할 수 없다는 것,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튀로글로소스, 아튀로스토미아와 같은 나쁜 파레시아 개념은 두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 첫째, 아튀로글로소스라면 말할 것과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을 전혀 구분할 수 없고, 말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둘째, 플루타르코스는 그것이 진실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징표라고 말합니다. 아튀글로소스인 사람들은, 그들을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이성, 합리적 담론에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튀로스토미아로 전락하지 않고 파레시아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지혜의 징표입니다. 철학적 중요성이 없는 솔직함은 파레시아가 아닌 아튀로스토미아에 속합니다. 세 번째 연사는 아튀글로소스이고 이후에 그가 아튀글로소스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서너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뻔뻔하고 강건합니다. 두 번째는 아르고스인이 아닌 아리고스인입니다.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소란스러운 말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토뤼보스를 신뢰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큰 목소리, 고함, 아우성 등의 소음을 말합니다. 세 번째 연사는 자신이 표명할 수 있는 정합적 언어를 신뢰하지 않고, 청중들에게 감동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만을 신뢰한 것입니다. 부정적 연사의 마지막 특성은 그가 자신의 무지한 직설, 아마테스 파레시아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튀로글로소스와 비슷하지만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연사가 설령 부정행위나 무력을 통해 도시국가에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시민으로서 파레시아의 권리를 소유하고는 있으나 그것을 적절하게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파레시아는 형식적인 시민의 권리에 불과합니다. 결국 파레시아는 훌륭한 교육과 결부되어야 하며,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훈련, 파이데이아 혹은 마테시스와 결부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파레시아를 마테시스 없이 사용하고 무지한 직설을 행할 경우, 도시국가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유형의 연사에 대한 특징짓기, 폭력적이고 정념적이며 그 도시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연사는 위험하다는 특징짓기가 발견됩니다. 나쁜 파레시아는 아테나이 헌법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이는 파레시아가 모든 사람, 적어도 시민으로 등록된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훌륭한 파레시아가 있는데 이 파레시아는 순수한 합법성뿐만 아니라, 마테시스 즉 교육과 지식을 요구합니다.
플라톤이 <<일곱째 편지>>에서 디온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 어떻게 해서 그가 하고자 했던 바가 좌절됐는지 설명한 것을 기억하시죠? 첫 째는 신이 질투한 것이고 둘째는 시칠리아에 아마티아amathia(무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티아는 인간의 모든 악령이 뿌리를 내리고 꽃피우며 후에 씨를 뿌린 자들에게 가장 쓴 결질을 맺게 하는 토양입니다.
세 번째 연사는 오레스테스와 그대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화자로 넘어갑시다. 그는 정치계의 디오메데스와 대칭을 이룹니다. 그의 특징은 첫째, 신체적으로 위풍당당하지 못하고 존재감이 없으며 둘째, 용감한 남자입니다. 셋째, 정치적 토론 장소인 아고라에 자주 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데, 이 훌륭한 연사, 긍정적 파레시아스트는 직업정치인이 아니고 민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는 돈을 받기 위해 아고라에 오는 생계수단이 없는 가난한 자들의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중요한 순간, 중요한 정책 결정을 위해 참여하는 자입니다. 넷째, 아우투르고스인데 경작자입니다. 그는 지주입니다.
에우리피데스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갖는 정치적 능력과 역량을 강조합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들 아우투르고스의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이 언제나 도시국가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고 하고 이 일에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상인과 도시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무관한 농촌일에 신경안쓰는데, 지주들은 농촌의 방어와 보호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서 훌륭한 전사입니다. 지주들은 하인들에게 말하고 명령을 내리며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해야 할 바와 관련해 결정을 내리는 일에 익숙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중요하고 합리적이며, 그들은 도시국가에 적절한 발의와 조언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훌륭한 연사의 마지막 특징은 그가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의 삶에 결정이 없는 청렴하고 완전무결한 품행을 갖춘 자입니다.
마지막 연사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지주가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드는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나온 연사가 오레스테스를 돌로 쳐서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한 반면, 이 지주는 오레스테스의 무죄방면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한 일에 대한 보상까지 요구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먼저 이 장면에서 오레스테스의 소송이라는 문제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결정은 전쟁의 속행을 야기할 적대적 결정이거나 평화를 가져올 결정이었습니다. 무죄방면은 평화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오레스테스가 전쟁 동안 자신의 남편을 속이고 애인을 취하는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데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이 장면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준거는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때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 간의 경쟁이 첨예한 408년입니다. 아테나이에서 민주파는 늘 전쟁이 찬동했고 귀족파는 평화에 찬동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민주파는 매우 명백한 경제적 이유로 전쟁에 찬동했습니다. 반면, 귀족파는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스파르타와의 평화적 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고,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와 유사한 헌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귀족파의 지도자는 테라메네스라는 자였는데 그는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주요 권리가 지주들에게 할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오레스테스의 훌륭한 연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전쟁과 평화, 아테나이의 헌법과 관련된 클레오폰과 테라메네스 간의 논쟁, 요컨대 민주파와 보수파 간의 논쟁이 오레스테스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파레시아 기능의 위기가 두 주요 양태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누가 파레시아를 사용할 자격을 갖느냐는 문제입니다. 아무 때나 원하기만 하면 모든 시민이 의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권리로 파레시아를 수용하면 충분할까요? 아니만 파레시아는 사회적 신분과 개인적 덕에 따라 소수의 시민들에게만 배타적으로 보장되어야 할까요? 만인에게 파레시아를 부여하는 평등체제, 그리고 개인적 자질이나 경제적 사회적 위상의 측면에서 도시국가를 이롭게 할 파레시아를 행할 능력이 있는 자들은 여러 시민 가운데서 선별할 필요성 간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이 모순이 파레시아 위기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파레시아와 마테시스가 맺는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파레시아가 더 이상 그 자체로는 진실을 밝혀낼 능력이 있는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진실과의 관계는 교육을 통해, 개인적 수련을 통해 확립되어야 합니다.
간략히 말하면, 파레시아의 위기는 진실의 문제입니다. 각자가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권한을 평등하게 갖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체제의 장에서 누가 진실을 말할 능력이 있는지를 아는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진실, 민주주의 그리고 교육 바로 이것들이 파레시아 위기의 주요 특징들입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기원전 5세기 말에 민주정에 대한 문제 제기와 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의 교차 지점에서 이와 같은 파레시아 위기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평등한 제도적 체제인 민주정은 그 자체로는 어떤 사람이 진실을 말할 권리와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솔직하고 용기 있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발언 행위로서의 파레시아, 순수한 솔직성으로서의 파레시아는 진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파레시아에 접근해야 할 필요성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나이에서 자유, 권력 그리고 진실이 맺는 문제 제기적인 관계로서 파레시아를 문제화하는 것입니다. 진실, 발언 행위, 자유, 권력 그리고 정치제도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문제화가 이 시기에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점을 방법론적 관점에서 관념사와 사유사로 구분하려 합니다. 대체로 관념사가는 어떤 개념이 출현하는 시기를 특정하려 하고, 새로운 어휘의 탄생을 통해 그 시기를 확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유사를 연구하면서 시도하려는 바는 다릅니다. 일정한 행동 방식과 습관을 갖고 있고, 일정 유형의 실천에 참여하며, 일정 유형의 제도를 작동시키는 사람들에게 이 제도, 실천, 습관, 행동이 문제로 떠오르게 되는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유사는 그것이 아무 문제없이 수용되고 친밀하며 조용했던, 아니면 적어도 논의의 여지가 없었던 경험의 장 혹은 실천의 장이 토론과 논쟁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반응을 야기하며 습관, 실천, 제도에 위기를 발생시키는 방식에 대한 분석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해 고심하는 방식, 이러저러한 것들에 마음을 쓰는 방식, 아마도 광기, 범죄, 섹스, 자기 자신 혹은 진실을 돌보는 방식에 관한 역사입니다. 파레시아란 말이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의 발언의 자유를 하나의 관념이나 가치로서 발견했다는 징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은 아테나이에서 발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문제화 형식이 있었다는 징표이고, 이것은 진실, 자유, 정치권력, 발언 행위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배려와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파레시아에 가담하면서 진실이 아닌 바를 말할 수도 있나요?
가장 형편없는 자들까지를 포함한 모든 시민이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진실을 말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두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누가 사회적 정치적 제도적으로 파레시아를 행사하도록 허용받을 것이며, 누군가 파레시아를 행사할 때 그가 진실을 말하리라 확신할 수 있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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