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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진실 / 미셸푸코 / 첫 번째 강의 / 2017.9.10.(일) / 닥홍
이번 강의 주제는 파레시아라는 개념입니다. 오늘 강의의 전반부에서는 파레시아라는 말의 의미를 개관하고, 이 말의 의미가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쳐 어떻게 변화됐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파레시아 내에서 말과 담론은 화자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완벽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청중은 화자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상이 파레시아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파레시아는 말하는 사람과 그가 말하는 것 사이의 일정한 관계를 지시합니다.
모든 것을 말하기인 Parresiazein 혹은 parresiazeisthai는 진실 말하기입니다. 파레시아스트는 진실되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실제로 진실인 바를 말하는 걸까요?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이 말하는 바가 진실되다고 믿기 때문에 진시된 바를 말하며, 그것이 진짜로 진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파레시아에서는 신념과 진실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파레시아의 중요한 두 번째 특징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를 근데 데카르트의 명증성 개념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데, 데카르트 이후로 우리에게 신념과 진실의 일치는, 명증성이라는 정신적 경험 내에서 획득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념과 진실의 일치는 발언 행위에서 발생하는데, 이 발언 행위가 파레시아입니다.
파레시아 내에는 신념과 진실의 일치관계, 주체와 진실의 관계 이상의 그 무엇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할 때는 위험이 수반됩니다. 파레시아는 위험에 맞서는 용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파레시아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파레시아 내에서 진실 말하기는 그 극단의 형식에서는 삶과 죽음의 게임에 속합니다. 이것에 세 번째 특징입니다.
네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파레시아가 모든 종류의 위험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파레시아의 기능은 누군가에게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레시아는 늘 화자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대화 상대자에 대한 비판이라는 비판적 기능을 갖습니다. 파레시아는 자아비판일 수도 있고 타자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늘 화자는 대화 상대자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입니다. 언제나 아래로부터 위를 향합니다. 파레시아는 진솔성, 진실과의 관계, 신념과 진실의 일치를 전제로 하며, 위험과 비판을 전제로 하고, 화자가 대화 상대자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이는 상황 내에서의 비판 행위를 전제로 합니다.
파레시아의 마지막 특징은 그것이 의무이기도 한 점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와 의무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파레시아는 일종의 발언 행위이며, 그 속에서 화자는 솔직함을 통해 진시로가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고, 위험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며, 자유 및 의무를 통해 법과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고, 자아비판이나 타자에 대한 비판 등 비판을 통해 타자와 일정한 관계를 수립합니다. 파레시아 내에서 화자는 자유를 활용하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며, 생명과 안전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고, 아첨 대신 비판을 택하며, 이득이나 이기심 대신 의무를 택합니다.
누군가가 선생님께 강한 압력을 행사해 선생님으로 하여금 어떤 정치적 선언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상황 말이죠.
예, 그것은 견유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침묵하는 파레시아스트의 태도입니다. 견유주의자들의 삶에서 파레시아스트의 태도에 속하는 일정한 행동과 태도를 발견하실 수도 있습니다. 견유주의자들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 선불교의 공안(화두)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뭔가 의미하는 것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내야 합니다.
도덕적 진신을 말해야 하는 의무와 비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 간에는 차이가 있는 걸까요?
진실이 비도덕적일 수 있다는 관념은 그리스적 태도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은 중세 이후의 서구사회에서입니다. 소련에서 리센코 사건에 즈음해 멘델이나 그 이론의 지지자가 파레시아를 행했을 때 제기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도 아니고, 파레시아 내에서 사용된 진실의 종류도 아니며, 도덕과 윤리 혹은 자연, 세계, 역사 등과 관련된 진실 말하기와 결부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게임의 문제입니다.
‘일치’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요? 그 자에게 진실이라는 건가요?
보시다시피 파레시아스트는 신뢰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의 믿음은 진실입니다 자기 제신에게만 진실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입니다. 그것이 파레시아입니다. 파레시아는 데카르트 이후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내에 자리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승리하고 타자들을 설득했다는 사실이,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고 확신케 하는 걸까요? 진실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진실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명증성이나 증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설득만이 관건이란 거군요?
아니요, 파레시아에서 화자는 진실을 말한다고 가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느냐, 아니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처벌을 받느냐에 있습니다.
만약 제가 진실을 말했다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그가 거기에 대해 아무 의심도 하지 않지만 저와의 관계에서는 제가 의문을 품는 경우, 저는 진실을 말한 것일까요?
그것은 파레시아스트의 자기 인식 문제입니다. 저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 자신이 진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데카르트의 문제와 파레시아스트의 태도 간의 차이입니다. 데카르트는 명증성에 도달하기 전에는 자신이 인식하는 바가 진실이라고 확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레시아의 경우, 도덕적 자질과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겹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진실에 접근할 경우, 그것은 그가 일정한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어떤 사람이 이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진실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자는 자신이 지혜롭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현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상황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언제나, 맥락에 구애받지 않고 지혜롭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파레시아스트는 현자와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현자의 민주정 버전입니다. 정확한 기준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용기가 있습니다. 파레시아스트가 위험한 뭔가를 말한다는 사실, 다수의 생각과는 다른 뭔가를 말한다는 사실은 그가 파레시아스트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표입니다. “어떤 사람이 파레시아스트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아무개가 파레시아스트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자기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스스로가 어떻게 확실할 수 있을까?’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질문은 근대적인 질문으로 이와 관련된 고대 텍스트는 없다. 첫 번째는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 위선자나, 아첨꾼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구분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매우 일반적인 범주이며 구체적으로 파레시아 개념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레시아 변화는 세 가지 상이한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19)
첫 번째 양상은 파레시아와 수사학이 맺는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전통에 속하는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파레시아와 수사학은 강력한 대립 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네카의 글에서, 충고나 사적 대화에서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솔직히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은 충고와 사적 대화라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발견됩니다. 하지만 로마 제정 초기 수사학 이론가들의 저작에서는 파레시아가 수사학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징후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파레시아는 수사학적 문채의 영도, 엑스칼라마티오, 리베라 오라티오, 연사가 청중의 감동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정치 영역에서의 변화입니다. 아테나이 민주정에서 파레시아는 보편적 법률이었고 훌륭한 시민을 특징짓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이자 개인의 태도였습니다. 헬레니즘 시대 제정 이후의 파레시아 게임에서는 군주는 조언자의 파레시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파레시아의 세 번째 변화는 삶의 기술로 간주되던 철학 영역의 파레시아와 관련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길거리에서 부단히 아테나이 사람들을 붙잡아 그들이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묻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돌보라고 권고하는데 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에게는 그가 그토록 열망하는 바, 국가를 통치하고 페르시아 왕보다 더 강건하게 될 능력이 없음을 지적합니다.
후에 그리스-라틴 철학과 기원후 1세기 동안 철학적 파레시아는 언제나 자기돌봄이라는 주제와 결부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돌보도록 권고해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는 파레시아스트여야 합니다. 파레시아는 고도의 테크닉이기도 한데, 이 테크닉에 힘입어 철학자는 자신의 제자나 친구를 인도합니다. 파레시아는 이제 영성 지도의 기술입니다.
세네카의 논설들과 서실을 통해 파레시아 테크닉들의 매우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변화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파레시아적 태도가 스승의 역할을 특징지었습니다. 스승, 철학자는 우정을 잃을 것을 감수하며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했습니다. 세네카의 텍스트에서는 두 참여자가 진실을 말하고, 또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게임이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학생, 제자 혹은 피지도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선생, 스승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제자, 학생, 피지도자 역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 상태, 느끼는 바, 영혼의 상태를 설명해야 합니다. 파레시아는 일종의 고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자기 돌봄의 역사와 우리가 자기수양이라 부를 수 있는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파레시아 개념을 다뤄볼 생각입니다. 자기수양은 특히 기원후 초엽에 그리스-로마에서 엄청나게 큰 중요성을 지녔습니다. 파레시아의 민주주의적 행사로부터 이 동일한 파레시아의 영적 사용으로 이끌어 가는 변화는, 자기수양이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후기 스토아주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자기수양 내에서의 진실 게임들과 관련된 문제는 광기와 범죄와 관련해 제기하려 했던 문제와 동일한 유형입니다. 관념사가들은 이렇게 묻는다. 인간의 주체성은 어떻게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대상화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 주체성은 왜 그리고 어떻게 대상적 인식의 장 내에 통합된 결과로서 소외됐는가? 서구 사회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윤리적, 정치적, 인식론적, 사법적 주체가 됐는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어떤 절차에 따라서 윤리적 정치적 학문적 영역의 취해진 형식을 받아들였는가?
저는 파레시아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비판적 태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의 계보를 연구해보려 했습니다. 진실과 사회 간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통한 사회와 진실 간의 관계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자라 불리는 자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한 사회에서 누가 진실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누구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 진실을 말하는 자에게 네 가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 현자, 교육자 그리고 파레시아스트입니다. 예언자는 신의 대리인이지만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자신의 대변인입니다. 현자는 침묵할 수 있지만 파레시아스트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자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자는 사회 내부에 존재하지만 파레시아스트는 분쟁적 상황 속에 위치합니다. 그는 권력과 맞서고, 다수의 사람들이나 여론 등과 대립합니다. 파레시아스트는 통합의 역군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역군으로 활동합니다.
이 네 역할은 섞여왔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루소는 현자이자 파레시아스트였고 에픽테토스는 교육자이자, 견유주의자로서 도발적 파레시아스트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대학에서 칸트는 파레시아스트의 역할과 교육자 역할을 다시 한 번 결합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르낭, 러셀도 한 예입니다.
우리 사회에 파레시아란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비판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역할과 관련해 종교, 정당, 대학, 신문, 미디어의 경쟁이 있습니다.
제가 파레시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첫째, 파레시아의 역할을 연구하려 하는데, 자기수양이 파레시아스트 게임이라는 특수한 진실 게임을 이용해 전개된 방식으로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둘째, 고대 문화에서의 파레시아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 내에서 비판적 태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의 기원과 계보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철학적 관점이 됐든 정치적 관점이 됐든 종교적 관점이 됐든 간에 비판의 역할, 비판적 태도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발견하고 창안한 파레시아스트 역할에 기인합니다. 주체화의 계보와 비판적 태도의 계보와의 교차 지점에 있는 파레시아의 분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속합니다. 인간 존재로서 우리는 진실을 말할 능력이 있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습관과 태도,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고, 진실을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파레시아에 관한 이번 강의의 일반적 범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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