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담론과 진실 / 미셸푸코 / 들어가며, 옮긴이해제 / 2017.9.03.(일) / 닥홍
170903 담론과 진실 들어가며 옯긴이 해제 푸코.hwp
들어가며
파레시아는 모든 것을 말하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다.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 등으로 번역한다. 푸코는 1982-84년 내내 심리학적 규정과는 반대되는 논증을 전개한다. 파레시아 개념은 민주주의와 진실 간의 관계를 재평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가치를 지니며, 주체와 진실 간의 관계를 문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윤리적 가치를 지니고, 비판적 태도의 계보를 기술하기 위한 철학적 가치를 갖는다. 파레시아는 개인의 덕이나 수사학적 기술이기보다는 일정한 발언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푸코는 담론의 화용론이라는 틀 내에서 파레시아 개념을 구축한다. 분명 언제나 중요한 것은 주체에게 진실의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지만, 진실을 정확하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타인들 앞에서 그 진실을 말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문제시하는 그런 진실의 능력이 주체에게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주체가 진실과 맺는 윤리적 관계에 관한 문제다.
파레시아의 1차적 정의는 정치적인 정의라 할 수 있다. 민주정에서 능동적 주체라는 것은 자유로운 발언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파레시아스트는 선동가와는 반대로, 민중이 듣기 좋아하는 의견들만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의견의 불일치를 만들어내고 대중의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위험을 감수하면서 듣기 거북한 진실들을 부르짖는 임무를 담당한다. 한편 플라톤은 전제정의 틀에서 군주에게 조언하는 자로서의 파레시아스트를 출현시킨다.
파레시아의 윤리적 차원은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의식 지도’실천에 집중된다. 지혜와 진실 쪽으로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걸 위한 ‘기술’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파레시아의 다양한 실천들에 윤리적인 태도로서 ‘자기 배려’라는 공통의 토대가 있다. 단순히 자기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타자 앞에 불려 나가 자신의 주체성이 아닌 타인이 부여하는 자기 점검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구체적 품행을 규제하는 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철학적 차원에서 파레시아는 진실한 삶으로 나타난다. ‘진실한 삶’은 추상적인 담론들과 막연한 책들을 틸신비화하고 비웃으며 탈실재화한다. 이것은 관조하는 실존이나 이론적 실존이 아니며, 철학은 인식의 체계가 아니다. 이러한 극한 속에서 파레시아는 진실하다고 믿는 바를 말해야 할 의미로서, 또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진실을 보여줘야 할 의무로서 덜 직접적으로 밝혀진다. 적어도 고대에 진실이란, 누군가의 삶을 그의 실천적 양상들의 총체 속에 놓는 것, 즉 긴장 속에 놓는 것을 일컬었다.
파레시아는 비판이라는 이름을 회복한다. 칸트를 참조하여, 만약 사유하기 위해 책을 필요로 한다면, 잘 처신하기 위해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면, 건강하게 살기 위해 의사를 필요로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비겁과 게으름 그리고 복종의 안락함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푸코에게서 철학은 그리스의 빛에서 현대의 계몽에 이르기까지, 자기 통치에 관한 질문들을 타자 통치나 진실 말하기로부터 분리시키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비판적 기능 속에서 어떤 메타 역사적 한정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
푸코의 강의에서 펼쳐지는 파레시아의 이 세 차원, 즉 정치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그리고 철학적 차원은 분리 불가능하며 보완적이며 끊임없이 상호 교차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 설명을 넘어서서, 푸코의 강의들의 다른 기여에 대해 재검토 할 수 있다.
옮긴이 해제
1
1980년대에 푸코는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푸코는 이제 주체를 대상화하는 담론들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주체가 자기 자신에 관해 행하는 담론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푸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gnothi seauton은 너 자신을 돌보라 epimeleia heautou를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한 요소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제도적 신분이 타자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파레시아라 불렀던 직언 혹은 진언의 능력이 타자의 역할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파레시아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푸코는 파레시아가 우선 정치적 개념이었고, 이후 윤리적 철학적 차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2
파레시아는 푸코의 후기 사유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으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비판적 태도’를 뜻한다. 그것은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울어진 권력관계의 아래에서 위로, 위험을 감수하는 유형의 말하기 실천이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굳이 현대어로 번역하면 비판으로 변역할 수 있다고 한다.
파레시아를 통해 실체가 아니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고 영원히 그러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까발린다는 점에서 저항적 실천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파레시아적 태도, 비판적 태도에 대한 연구는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나지만, 특히 민주정에서 파레시아는 민주정 자체가 가진 결함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실천으로 나타난다. 다수의 의견, 혹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의견에 맞서서,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 믿는 바를 발언하는 용기, 평등만으로 굴러갈 수 없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그 돌출 자체가 그 위에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파레시아스트가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파레시아스트는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와 달리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또 미래를 예언하기보다는 현재를 명확히 설명하며, 그것과 관련해 가능한 한 명료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파레시아스트는 교육자와 다른데, 그 이유는 파레시아스트는 위험을 감수하는 반면, 교육자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는 진실 진술 방식이라 부른바로 네 형태의 진실-말하기, 현자, 파레시아스트, 교육자, 예언자를 구분한다.
3
<담론과 진실>을 통해 우리는 파레시아 개념이 세월의 흐름, 정치체제의 변화, 제국의 등장, 그리스도교의 출현 등에 따라 그 의미와 활용 방식에 여러 변주가 있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레시아가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로마 시대,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일 것이다. 경직된 위계적 관계 속에서 수평적인 소통의 관계를 중시하는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적 상황 속에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
한편 파레시아의 다양한 형태가 있고, 그 파레시아가 이루어지는 다양한 맥락이 있지만, 발언자 스스로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다. 이는 푸코의 저서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듯,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이다.
4
민주정은 진실되고 용감한 모든 파레시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민주정이 신뢰를 잃어갈 때 파레시아는 군주제의 범주에서 전개된다. 파레시아는 군주와 그의 조언자 간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군주는 파레시아스트를 징벌하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교육을 담당하는 자는 철학자다. 군주가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에토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축하고 도덕적 주체로서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로 도시국가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 보다는 도덕적 주체들을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파레시아가 발달한다. 이 파레시아가 목표로 삼는 것은 철학적 대화나 도덕적이고 영적인 서신 교환 등과 같은 다양한 테크닉에 의거해 개인의 에토스를 형성하는 작업이다. 이제 파레시아는 그것이 기원한 정치의 장을 벗어나 윤리적 장에서 전개된다.
소크라테스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윤리적 파레시아를 실천한다. 푸코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원리와 아름다운 삶이라는 이상이 자기 돌봄 내에서 서로 교차하게 된 시기를 재발견하려고 시도한다. 명성이 실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의지가 실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5
견유주의자인 디오게네스는 인간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파레시아라고 말했다. 진실을 말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용기를 가져야 하고 파레시아스트적인 삶의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견유주의자들은 검소하게 살았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부당하게 사형을 언도한 법률에 복종하기를 선택한 준법주의자였다. 견유주의 철학자는 사회질서와 단절되고, 주변부적인 생활방식을 주장하며 몸짓, 신체 상태, 옷 입는 방식, 처신하는 방식을 통해 비오스, 즉 삶의 방식을 현시한다. 후설의 본질적 환원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말해본다면, 견유주의의 경우에는 자기 수련적 환원, 요컨대 실존을 철저히 연마해 진실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우발적 사건이나 허영심으로부터 실존을 해방시키는 환원이며, 철학적으로 더욱 진정한 삶을 영위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6
견유주의적 다른 삶, 다른 세계로의 길을 열어주는 주체화의 절차는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그것은 담론과 이성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견유주의자들은 말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뭔가를 발화하는 신체를 가진 존재다. 그들은 어디에 속하거나 가입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인정이나 증명의 문제가 아닌, 실험의 문제다. 그들의 퍼포먼스는 윤리와 정치를 단언하면서 실존의 영토를 구축한다. 그것은 훈육이 아니라 자기 수련이다.
푸코가 견유주의와 그 후예들을 분석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기성질서의 비판적 해체, 다시 말해 기성의 모든 형식에 대한 항구적인 거부와 거절이다. 푸코의 위대성은 아마도 우리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발명할 잠재력을 어마나 잊고 살아왔는지, 또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의 양식과 주체성을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예속시키면서 이 잠재력을 파괴하고 있는 오늘날 그것이 얼마나 긴급한지, 그리고 이 잠재력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에 있는지를 환기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푸코는 파레시아와 자기 돌봄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삶을 우리에게 환기하고, 숙고된 비순응성과 저항을 통해 삶을 창조하라고 종용한다, 그리고 윤리, 정치, 철학, 예술의 교차 지점에서 시작되는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저항운동과 해방운동을 우리에게 설득한다.
'세미나 발제문 > 미셸 푸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론과 진실 2강 (0) | 2017.09.10 |
---|---|
담론과 진실 / 파레시아 / 2017.09.03.(일) / 호섭이 (0) | 2017.09.03 |
말과사물 / 미셸푸코 / 10인문과학 / 2017.8.13.(일) / 닥홍 (0) | 2017.08.13 |
말과 사물 / 10장 인간과학 / 1절, 2절 / 호섭 / 8월 13일(일) (0) | 2017.08.12 |
말과 사물 / 9장 인간과 인간의 분신들 / 호섭 / 8월 6일(일) (0) | 2017.07.31 |
- Total
- Today
- Yesterday
- 공화국
- 프롤레타리아 독재
- 생산양식
- virtù
- 야생의사고
- 한국전쟁의기원
- 안토니오그람시
- 집단심리
- 마키아벨리
- 로마사논고
- 옥중수고
- 루이 알튀세르
- 스피노자
- 의식과사회
- 신학정치론
- 루이알튀세르
- 무엇을할것인가
- 옥중수고이전
- 이탈리아공산당
- 생산관계
- 검은 소
- 브루스커밍스
- 이데올로기
- 그람시
- 레비스트로스
- 헤게모니
- 계급투쟁
- 개인심리
- 알튀세르
- 딘애치슨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