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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인간과 인간의 분신들
1. 언어의 귀환
언어의 재출현으로 고전주의 사유 질서는 사그라진다. 재현의 연쇄를 끊고 세분하고 늘어놓고 영속적 도표에 나누어 배치하기 위한 격자 체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말은 더 이상 재현과 교차하지 않고, 사물의 인식을 위한 자율적 격자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로써 말은 수수께끼 같은 예전의 밀도를 찾는다. 그러나 이는 르네상스 시대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언어에는 ‘생명’이나 ‘노동’과 다른 특이한 운명이 부과된다. 자연사의 도표가 해체되었을 때, 생물은 ‘생명’의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부의 분석이 사라졌을 때, 모든 경제 과정은 생산 현상과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반면 일반 문법의 단일성, 즉 담론이 사라졌을 때 언어는 특정 단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존재 방식에 따라 출현하게 된다.
이는 19세기 초에 담론의 법칙이 재현과 분리되면서 언어의 존재가 파편화되면서 가능해진 현상이다. 특히 니체와 말라르메는 사유를 언어 자체 쪽으로, 언어의 독특하고 난해한 존재 쪽으로 격렬하게 내몰았다. 우리의 호기심은 이제 언어란 무엇이며, 언어를 실질적으로 온전히 나타나게 하려면 그 윤곽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향한다.
이 물음에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또 언제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정확히 알 수 없고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물음을 스스로 제기할 수 있는지, 왜 오늘날 이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왕의 자리
<시녀들> 그림이 예증하듯이 고전주의적 사유에서는 재현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재현 속에서 묘사되지만 오직 이미지나 반영으로만 식별 가능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재현에 현존하지 않는다. 즉 18세기 말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자연’의 기능과 ‘인간’의 기능이 일대일로 대립한다. 실제적이고 무질서한 병치 작용을 통해 자연의 존재물들은 정연한 연속에서 차이를 내보였다. 인간은 이 혼란스러운 연쇄에서 동일한 것을 이미지들의 진열로 나타내었다. 자연과 인간은 동일한 요소(동일성, 연속, 감지할 수 없는 차이, 부단한 연쇄)에 작용을 가했다. 분리 가능한 동일성과 가시적 차이를 도표 형태의 공간과 정연한 연쇄에 따라 나누어 배치할 수 있게 해 주는 일반적 분석의 가능성을 끊임이 없는 바탕 위에 잇달아 나타나게 했다. 연과 인간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이 결과에 이를 수 없었다.
존재물의 연쇄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재현들의 계열에 연결되면서 담론이 된다. 즉 자연과 인간이 교차하는 곳에서 솟아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담론의 힘이었다. 명명하고 재단하고 조합하고 말의 투명성 속에서 사물들을 알아보게 하면서 그 매듭을 맺고 끊는 것은 언어의 힘이었다. 이에 따라 언어가 지각들의 연쇄를 도표로 변화시키고, 존재물들의 연속을 ‘특징’으로 마름질했다. 담론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재현들은 펼쳐지고 나란히 놓이며, 사물들은 모이고 맞물렸다. 고전주의적 언어의 소명은 언제나 ‘도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3. 유한성의 분석론
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경제학으로, 언어에 관한 성찰이 문헌학으로 바뀌면서 고전주의적 담론은 사라졌다. 이로써 지식의 대상이자 동시에 인식의 주체라는 모순적 위치의 ‘인간’이 출현한다.
이 새로운 현존의 동기는 이제 명백히 밝혀질 수 있다. 퀴비에는 생명의 심층에서 생물의 가능 조건이 규정하려 했고, 리카도는 노동에서 교환, 이윤, 생산의 가능 조건을 찾았으며, 최초의 문헌학자들은 심층적 언어의 역사에서 담론과 문법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로 인해 재현은 생물, 필요, 말에 대해 진실의 근원 소재지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효과, 생물과 필요와 말을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의식 속에 자리하는 다소 흐릿한 대응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생물, 교환의 대상, 말은 재현을 떠나 사물의 심층 속으로 물러난다. 이제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함께, ‘재현의 능력을 지니고서’, 생물과 교환의 대상 그리고 말이 떠나 버린 빈 공간에서 솟아오른다.
어떤 관점에서 인간은 노동, 생명,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이 제조하는 물건, 인간의 육체, 인간이 하는 말에 그 자체로 진실이 들어 있듯이, 인간에 선행하는 노동과 생명과 언어라는 매개 수단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드러난다. 즉 인간은 이들에 견줄 때 유한하다.
그러나 유한성에 대한 이 최초의 발견은 불안정하다. 어떤 것도 유한성을 그 자체로 포착하게 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유한성은 무한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약속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경험에는 인간의 육체(사물의 공간과 맞물리는, 일부분의 공간으로서 육체)가 주어지고, 욕망(모든 사물의 가치, 그것도 상대적 가치를 띠는 데 근거가 되는 근본적 욕구로서 욕망)이 주어지며, 언어(모든 시대의 모든 담론과 연속과 동시성을 꿸 수 있는 언어)가 주어진다. 이 실증적 형태들 각각에서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터득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이들 각각은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배경으로 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은 실증성이 나타날 수 있는 출발점으로 기능한다. 이로부터 ‘유한성의 분석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등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9세기 초에 유한성은 무한에 관한 사유의 한 부분이 아니라, 유한한 지식에 의해 유한한 삶의 구체적 형태로 제시되는 경험의 핵심에 자리잡는다. 이로부터 이중화된 준거의 끝없는 작용이 유래한다. 요컨대 인간의 지식이 유한한 것은 인간이 언어, 노동, 생명의 실증적 내용 속에 갇혀 해방될 가능성이 갖지 못하기 때문이고, 역으로 생명과 노동과 언어가 실증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인식이 유한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사유에서 유한성은 육체, 욕구, 언어, 그리고 이것들에 관한 가능하고 한정된 인식인 부정적 형태들을 설명해 주는 반면, 근대적 사유에서 생명, 생산, 노동의 실증성은 인식의 제한된 성격을 생명, 생산, 노동 사이의 부정적 상관관계로 정당화한다. 또한 역으로 인식의 한계는 비록 언제나 한정된 경험 속에서이지만 생명, 노동, 언어가 무언인가를 알 가능성에 근거를 제공한다.
요컨대 근대인, 즉 육체를 지니고서 노동하고 말하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유한성의 형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근대 문화는 유한한 것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사유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유할 수 있다. 반대로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와 고전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에서 인간은 세계의 질서에 따라 특권적 자리를 할당받을 수는 있었으나, 사유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4.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유한성의 분석론에서 인간은 기묘한 ‘경험적-선험적’ 쌍을 이룬다.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분석이 발생한다. 첫째, 인식이 해부생리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식 자체가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분석. 둘째, 인식에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있으므로 그 인식의 역사를 밝히는 분석.
이 두 가지 선험적 반성에서 두 가지 경향이 등장한다. 한편으로 경험적 진실에서 참된 담론의 근거와 본보기를 발견하려 하고(대상의 진실은 대상의 형성을 묘사하는 담론의 진실을 결정한다), 이로써 실증주의적 유형의 분석이 행해진다. 한편으로는 참된 담론에 의해 진실의 본질과 역사를 규명하려는, 종말론적 유형의 담론이 등장한다(철학 담론의 진실은 형성 중인 진실이다). 이 둘은 양자택일적 경향이라기보다는 선험적인 것의 차원에서 경험적인 것을 강조하는 모든 분석에 내재하는 것이다. 콩트와 마르크스는 바로 (인간에 관한 담론의 다가올 객관적 진실로서) 종말론과 (대상의 진실을 토대로 명시되는 담론의 진실로서의) 실증주의가 고고학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경험적인 동시에 비판적이고자 하는 담론은 실증주의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고, 이때 인간은 축소되고 약속된 진실로서 출현한다.
이 결과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분리 상태로 유지하려 하지만 이 양자를 동시에 지향하게 되는 담론이 출현한다. 바로 ‘체험의 분석’이다. 사실상 체험은 모든 경험 내용이 경험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공간이자 또한 경험 내용을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경험 내용의 근본적 정착 형태를 가리키는 최초의 형태다.
근대적 반성에서 체험의 분석은 실증주의와 종말론의 철저한 부인으로서 확립되었고, 선험적인 것의 차원을 복원하고자 했으며, 경험적인 것으로 축소된 진실의 담론과 예언적 담론을 물리치고자 했다. 체험의 분석은 육체를 통해 윤곽이 잡히는 본래의 경험과 자연에 대한 인식의 가능한 객관성을, 또 실제의 경험을 통해 감추어지고 동시에 밝혀지는 의미의 밀도와 가능한 문화의 역사를 서로 맞물리게 하고자 한다. 현상학적 성찰이 실증주의적이거나 종말론적 유형의 사유들에 접근하려 한 것은 뒤늦은 화해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경험적-선험적 쌍으로 출현한 순간부터 이 둘을 서로를 필요로 했다.
5. 코기토와 사유되지 않는 것
인간이 세계에서 정말로 경험적-선험적 이중화의 장소라면, 인간은 코기토의 직접적이고 지고한 투명성 속에 자리할 수 없다. 언제나 열려 있고 결코 결정적으로 경계가 정재지지 않고 한없는 횡단이 이루어지는 차원을 수용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이제는 어떻게 자연의 경험이 필연적 판단을 야기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 것을 사유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에 말없는 점유의 방식으로 자리하며, 완강한 외재성의 형태를 띠는 자신의 이 형상에 거의 완강할 정도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가가 문제다.
예컨대 생명은 인간에게 직접 주어지는 경험을 생리 조직망, 박동, 감춰진 힘으로 한없이 넘어서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이 생명일 수 있겠는가? 노동은 인간에게 요구와 법칙을 생소한 가혹 행위처럼 부과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이 노동일 수 있겠는가? 언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 없이 형성되어 왔고, 그 체계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며 그 의미는 인간의 담론이 한순간 반짝이게 하는 말에서조차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듯이 잠들어 있고, 인간의 말과 사유는 마치 그 수많은 가능성의 망에서 한 부분을 잠깐 동안 자극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인간이 언어의 주체일 수 있겠는가?
즉 근대적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다르다. 근대적 코기코에서 관건은 어떻게 사유가 여기와는 다른 곳에, 그렇지만 스스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는가, 어떻게 사유가 비사유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알는 것이 된다. 내가 나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이라면, 나의 사유가 나 아닌 것이려면, 사유하는 나, 나의 사유인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이러한 의문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째는 부정적인 것으로, 전적으로 역사에 영역에 속한다. ‘현상학’은 생명, 노동, 언어의 발견, 인간이라는 새로운 형상, 인간의 존재 방식 및 사유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문제시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즉 현상학은 ‘전형적인’ 존재론의 물음으로 이끌린다.
둘째는 긍정적인 것으로, ‘사유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인간의 관계, 서양 문화에서 인간이 사유되지 않는 것과 쌍둥이처럼 출현하는 현상과 관련된다. 예컨대 ‘무의식’은 인간이 더 이상 반성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유하지 않을 때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과학적 사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아닐까? 헤겔의 현상학에서 대자와 마주하는 즉자,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인 것,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된 인간, 후설의 분석에서는 암묵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 침전된 것, 실행되지 않는 것이 이와 관련된다.
사유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는 투영으로서 기능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진실에 이르기까지 생각을 집중하고 자기 자신을 상기해야 하는 일에서 출발점 역할을 한다. 사유의 역할, 사유의 고유한 자발성은 이 분신을 사유 자체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시키는 것이 된다. 근대적 사유 전체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할 필요성, 즉 대자의 형식을 통해 즉자의 내용을 숙고할, 인간을 인간 자신의 본질과 화해시킴으로써 인간을 소외로부터 해방할 필요성 등이 스며든다.
사유는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움직이게 한다. 사유는 사유되지 않는 것을 자기에게로 접근시키거나 더 멀리 밀어내지 않는 한, 그 간격 속에서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사유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거나 그 쪽으로 움직일 수 없다. 여기에 우리의 근대성과 깊이 관련된 뭔가가 있다. 서양에는 (종교상의 도덕을 별개로 한다면) 두 가지 형태의 윤리가 있다. 옛 형태의 윤리는 세계의 질서와 긴밀히 관련돼 있다. 세계의 법칙을 찾아냄으로써 지혜 또는 도시 국가의 구상으로부터 세계의 원리를 연역하는 것이다. 반면 근대적 형태의 윤리는 사유되지 않은 것을 되찾기 위한 사유의 움직임 속에 자리하므로 어떤 도덕도 표명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것의 내용과 형식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반성, 의식화, 말, 침묵하는 것의 해명, 말없는 것에 회복된 말,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놓는 어두운 부분에 대한 조명, 활기 없는 것의 소생 등이다. 즉 근대적 사유는 도덕을 제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근대적 사유가 순수한 사변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근대적 사유가 처음부터 어떤 행위 방식이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사유는 자체의 고유한 존재로 인해 스스로로부터 ‘나갔고’ 이제 이론이 아니다. 사유는 작동하자마자 손상시키거나 화해시키고 접근시키거나 멀어지게 하고 단절시키고 분리하고 잇거나 다시 잇고 해방시키거나 예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 사유는 본질적으로 행위, 위험한 행위다. 사드, 니체, 아르토, 바타유는 이를 이해했으며,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도 이를 알고 있었다.
6. 기원의 후퇴와 회귀
인간 존재 방식과 그 성찰을 특징짓는 마지막 요소는 ‘기원’에 대한 이해 방식이다. 18세기에 기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재현의 순수한 이중화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연대순의 발전은 도표의 내부에 자리하고 하나의 경로만을 구성했다.
반면 근대적 사유에서 노동과 생명과 언어의 역사 전체가 그 내부에서 기원 쪽으로 향할지라도, 그 기원은 결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없었다. 기원은 모든 차이, 분산, 불연속이 빠짐없이 모여 들어 동일성의 단일한 지점을 형성하면서도, 스스로 폭발하여 타자가 될 힘을 지니고 있는 원뿔의 가상 꼭짓점 같은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물로 정의하려고 시도할 때 자신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된 생명을 배경으로 해서만 자신의 시초를 찾아낼 수 있다. 또 자신을 노동하는 존재로 파악하려고 할 때 사회에 의해 이미 제도화되고 제어된 인간의 시간과 공간 내부에서만 그 기초적 형태를 밝힐 수 있다. 말하는 주체를 자신의 본질로 규정하려고 할 때는 모든 언어와 활동 자체를 존재할 수 있게 한 바탕으로서의 더듬거리는 소리, 즉 최초의 말이 아니라 이미 전개된 언어 활동의 가능성만을 발견할 뿐이다.
즉 인간에게서 기원적인 것은 동일성의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정점으로 이르게 하기는커녕, 타자의 분리가 아직 작용하지 않는 동일자의 계기를 보여 주기는커녕, 처음부터 인간 자신과 다른 것에 인간을 관련짓는 것이다. 인간보다 더 오래되고 인간이 제어하지 못하는 내용과 형식을 인간의 경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며, 교차되어 있고 때로는 상호 대체될 수 없는 연대기들에 인간을 연결함으로써 시간을 가로질러 인간을 분산시키고 사물의 지속 한가운데에 인간을 붙들어 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사물과 대조적으로 ‘기원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시간 속에서 생겨나고 시간 속으로 사라질 모든 사물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은 모든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이미 현존한다. 그래서 사물의 시초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즉 인간은 어느 순간에 절단된 지속의 부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간 일반이 재구성될 수 있고 지속이 가능해지고 사물이 적절한 시기에 출현할 수 있는 통로다.
이 때문에 사유에 책무가 주어진다. 사물의 기원에 이의를 제기할, 그러나 시간의 가능성이 구성되는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모든 것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지만 기원도 시초도 없는 사물의 기원에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사물의 기원에 이의를 제기할 책무다. 이는 우리의 시간 경험에 토대 구실을 했다. 19세기부터 인간의 영역에서 시작과 재시작, 시초의 부재와 현존, 재래와 종말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7. 담론과 인간의 존재
네 가지 이론적 선분(유한성, 경험적-선험적 반복, 사유되지 않는 것, 기원의 분석)은 고전주의 시대 언어의 일반 이론을 구성한 네 영역과 상응한다.
‘동사’의 이론은 언어가 자체의 경계 밖으로 넘쳐나 존재를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는데, 마찬가지로 ‘유한성’의 분석은 어떻게 외부적인 실증성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분절’의 이론이 말과 말에 의해 재현되는 사물의 마름질이 어떻게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보여 준 반면, ‘경험적-선험적 이중화’는 경험에 주어지는 것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끝없는 흔들림 속에서 어떻게 서로 상응하는지 보여 준다. ‘지칭’에 대한 탐구는 재현을 낱말, 음절, 소리 자체의 가장 은밀한 중심에서 끌어내는 것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사유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반쯤 잠들어 있는 사유를 다시 북돋는다. ‘파생’은 어떻게 언어가 자기 자신의 공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스스로를 축으로 도는지를 보여 주었는데, 이는 ‘기원’을 사유하려는 노력, 즉 인간 자신에 대해 인간의 존재가 언제나 유지되는 방향 쪽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간격과 거리 안으로 나아가려는 노력과 상응한다.
그러나 이 상응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대상만 바뀌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재현의 이론이 사라졌을 때, 일반 문법의 네 가지 이론은 서로 분리되었고 기능과 층위가 바뀌었으며 타당성의 전 영역이 변모되었다. 일반 문법의 기능은 어떻게 언어가 연속적인 재현들의 연쇄 내부에 끼어들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언어는 담론이라는 단순하고 완전히 박약한 선으로 표면화하면서도 동시성의 형태들을 전제로 했다.
반면 19세기부터 전개된 분석은 재현 이론 안에 자리를 잡지 않는다. 여기서 과업은 어떻게 사물 일반이 재현에 주어질 수 있는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근거에서, 어떤 한계 내에서 사물이 지각의 다양한 양상보다 더 깊은 실증성을 띠고서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인간과 사물의 이 공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 유한성, 인간을 기원에서 떼어 놓고 동시에 인간에게 기원을 약속하는 분리, 시간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다. 이로써 고전주의적 담론 분석은 둘로 쪼개진 듯했다. 한편으로는 문법 형태들의 경험적 인식으로 빠져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성의 분석론이 생겨났다.
담론의 분석이 유한성의 분석론으로 바뀐 것은 또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 유한성의 분석론에서 관건은 어떻게 타자 또는 먼 것이 가장 가까운 것이자 동일자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근대적 사유는 결코 완결되지 않을 차이의 형성 쪽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실현되어야 할 동일자를 드러내는 쪽으로 나아가는 사유다. 그런데 분신의 동시적 출현, 후퇴와 회귀, 사유와 사유되지 않는 것,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실증성과 근거에서 ‘와’ 또는 ‘과’라는 조사가 내포하는 미세하나 반박할 수 없는 간격이 없다면, 이 드러냄은 실현될 수 없다. 사물의 역사 및 인간의 고유한 역사성의 토대에서 드러나는 것은 동일자의 내부에 빈틈을 초래하는 간격, 동일자를 내부의 양 끝으로 분산시키고 결집시키는 간격이다. 근대적 사유가 여전히 시간을 사유할 수 있는 것, 시간을 연속으로 인식하고 시간을 완결이나 기원 또는 회귀의 약속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이 깊은 공간성 덕분이다.
8. 인간학의 잠
인간학은 인간의 분석론으로서 근대적 사유를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19세기 초부터 사유에 스며드는데, 이는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의 혼동을 이 물음이 사전에 은밀히 야기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선험적 이중화의 주름 속에서 선험적 기능은 경험성의 무기력한 잿빛 공간을 강압적 망으로 덮지만, 역으로 경험 내용은 활기를 띠고 점차로 다시 곧추서며 경험 내용의 선험적 가정을 멀리 나르는 담론에 곧장 포섭된다. 철학은 이 주름 속에서 새로운 잠에, 독단론의 잠이 아니라 인간학의 잠에 빠져들었다.
이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인간학의 ‘사변형’을 철저하게 허물어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최초의 노력은 아마 니체의 경험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문헌학적 비판을 통해, 어떤 형태의 생물학주의를 통해 니체는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속하고 신의 죽음이 인간의 사라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약속된 초인의 출현이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임박한 죽음을 온전히 의미하는 지점을 발견했다. 이 점에서 니체는 이 미래를 우리에게 약속과 동시에 책무로 제시하면서, 현대 철학이 다시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는 문턱을 가리키며,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철학의 진적을 계속해서 지배하게 될 것이다.
회귀의 발견이 철학의 종언이라면, 인간의 종말은 철학의 새로운 시작이다. 오늘날 인간의 사라짐에 의해 남겨진 공백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학은 칸트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철학적 사유를 지배하고 이끈 기본적 경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경향을 가능하게 만든 통로의 망각과 동시에 곧 다가올 사유를 끈질기게 가로막는 장애물을 알아보고 비판적으로 고발하기 시작한 만큼, 이는 우리 눈앞에서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나 인간의 지배 또는 인간의 해방에 관해 여전히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는 사유하려고 들지 않는 모든 이에 대해, 우리는 철학적 웃음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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