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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사물 / 미셸푸코 / 7장 재현의 한계 / 2017.7.9.() / 닥홍

 

170709 말과사물 7장 푸코 발제닥홍.hwp

1. 역사의 시대

 

18세기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단절을 초래한 불연속성은 17세기 초 르네상스 시대의 사유를 무너뜨린 불연속성과 대칭을 이루는데, 그때에는 유사성을 내포한 주요한 순환 형상들이 흐트러지고 열려서 동일성들의 도표가 전개될 수 있게 된 반면, 이번에는 이 도표가 이제 곧 해체되고 지식이 새로운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

인식론적 배치의 느닷없는 유동성, 실증성들의 상호적 변동은 어디서 기인한 것이며, 이제는 부, 생물, 담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물들을, 말의 틈에서나 투명성 아래에서, 지식의 대상이 되게끔 하는 이 변동은 어떤 사건이나 법칙을 따르는 것일까? 이 사건의 황량한 진실이 본질적으로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사유 자체의 역사적 연원을 파악하는 사유만이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전주의적 사유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제시하는 도표의 선결되어야 할 더 근본적인 공간을 연대기의 연쇄가 가로지르기만 한 반면, 이제부터 공간 안에서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동시대의 닮음은 유비에서 유비로 진행되는 연속의 침전되고 고정된 형태일 뿐이게 된다. 고전주의적 질서는 사물들을 분리하고 통합하는 양적이지 않은 동일성과 차이를 영속적인 공간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19세기부터의 역사는 상이한 유기적 구조들을 서로 연결하는 유비를 시간적 배열에 따라 늘어놓게 된다. 질서가 연이는 동일성과 차이의 길을 열었던 것처럼, 역사는 유비에 근거한 유기적 구조에 자리를 마련한다.

근본적인 변화가 무엇이었는지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경험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그 방식들, 담론, 도표, 교환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우리가 19세기부터 문헌학, 생물학, 정치경제학이라 부르는 이제는 친숙한 지식들이 몇 년 지나지 않아 출현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가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또 다른 실증성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 서양 문화에서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가 분명히 필요했다.

우리는 1795년부터 1800년까지를 중심으로 윤곽이 뚜렷해지는 두 가지 연이는 단계를 알아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실증성들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 변하지 않고, 인간의 부, 자연의 종, 언어들에 정착되어 있는 말이 여전히 고전주의 시대에서의 모습 그대로이다. 즉 그것들은 아직도 이중화된 재현이다. 재현들에 관한 동일성과 차이의 체계와 함께 질서의 일반 원칙이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 재현들을 지칭하고 분석하고 구성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하는 재현이다. 각 실증성 내에서 재현의 요소들이 상호적으로 기능하고 지칭과 분절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실행하며 비교의 작용에 의해 질서를 확립하기에 이르는 방식이 변한다.

 

2. 노동의 척도

 

애덤 스미스는 노동의 개념이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성찰의 영역에 노동의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단순히 경제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근대 정치경제학의 기초를 다졌다고 누구나 기꺼이 단언한다.

애덤 스미스의 분석에서는 교환의 근거와 교환 가능한 것의 척도, 교환되는 것의 성격과 교환되는 것의 해체를 가능하게 하는 단위가 구분된다. 누구나 필요하기 때문에, 정확히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교환하지만, 교환의 순서, 교환의 위계는 물건에 투입된 노동의 단위에 의해 확정된다.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심리라 부르게 되는 것의 차원에서는 인가에게 필수적이거나 편리하거나 쾌적한 것이 교환되지만 경제학자의 관점에서는 노동이 물건의 형태로 유통된다. 인간은 필요와 욕망을 느끼기 때문에 교환하지만, 인간이 교환할 수 있고 교환의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시간과 외부의 커다란 필연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성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개인의 솜씨나 이득의 계산에 기인한다기보다는 노동의 재현과는 무관한 조건, 가령 산업의 발전, 분업의 증가, 자본의 축적, 생산적인 노동과 비생산적인 노동의 분할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부에 관한 성찰이 관념학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 부에 관한 성찰은 관념 분석의 형식과 법칙을 다 같이 벗어나는 두 영영과 대략 비스듬히 관련된다. 즉 부의 분석은 이제 한편으로 인간의 본질(인간의 유한성, 시간에 대한 인간 관계, 임박한 죽음)을 검토하고 인간이 직접적인 필요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나날이 시간과 노고를 투입하는 대상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인간학 쪽으로 벌써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부의 교환이 아니라 실제적인 부의 생산, 즉 노동과 자본의 형태를 대상으로 하게 되는 정치경제학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넌지시 가리킨다.

 

3. 생물의 유기적 구조

 

자연사의 영역에서의 변화는 구조가 특징으로 변모하는 현상이 가시적인 것의 영역과는 무관한 원리에, 즉 재현들의 상호 작용으로 축소할 수 없는 내적 원리에 바탕을 두게 된다. 이 원리가 바로 유기적 구조이다. 유기적 구조는 분류학의 토대로서, 서로 다른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1. 식물의 특징은 더 이상 가시적인 구조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지 않고, 특징의 실재 여부 이외의 다른 기준을 갖지 않으며, 생물에 특유한 기능의 실재, 그리고 이제는 묘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중요한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2. 그러므로 특징은 기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관점에서보자면, 생물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의 징후는 표면의 가장 가시적인 지점에 놓여 있다고 추정하는 낡은 표징 또는 표지의 이론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관계는 기능상의 종속 관계이다.

3. 어떻게 생명의 관념이 자연물의 정돈에 불가결한 것이 될 수 있었는가는 이러한 조건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존재하고 감추어진 형태를 갖추고 있음으로써 본질적인 기능을 실행하는 기관과 표면의 기관이 연결되는 관계를 유기체의 심층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발의 중요성과 혈액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류하기는 이제 가시적인 것의 요소들 중 하나가 다른 요소들을 나타내는 식으로, 가시적인 것의 기준을 가시적인 것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분석의 방향을 바뀌게 하는 동향에 따라 가시적인 것을 그것의 깊은 근거로 간주되는 비가시적인 것과 관련짓고, 그런 다음 이 은밀한 구조에서 유기체의 표면에 나타나는 명백한 징후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된다. 최종적인 유기적인 구조의 독특한 짜임에 따라 가시적인 것도 비가시적인 것도 검토된다.

4. 분류법과 명명법 사이의 병행 관계는 끊어진다. 고전주의 시대에 자연사의 근거였고 구조를 특징으로, 재현을 이름으로 가시적인 개체를 추상적인 속으로 이르게 했던 말과 존재물의 오랜 친화력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비지다르크는 1786년에 자연에는 두 가지 계만 있을 뿐인데, 하나는 생명이 있고, 다른 하나는 생명이 없다.”라고 말한다. 유기적인 것은 생물이 되고, 생물은 성장하고 번식하지도 않으며, 생명의 한계에서 움직임도 생식력도 없는 것, 죽음이다.

 

4. 말의 굴절

 

이 사건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 언어의 분석 쪽에서도 발견된다. 언어는 이제 재현과 소리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배합되어 체계를 이루고 음성, 음절, 어근에 재현의 틀이 아닌 틀을 부과하는 형식적인 요소로도 구성된다. 이처럼(노동이 교환의 분석에, 유기적 조직이 특징의 분석에 도입되었듯이) 재현의 틀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가 언어의 분석에 도입된 것이다.

언어가 담론으로 규정된 이상, 언어에는 재현들의 역사 이외의 다른 역사가 있을 수 있었다. 즉 관념, 사물, 인식, 감정이 우연히 변할 때, 오직 그때만 이 변화에 정확히 비례하여 언어가 변모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각 언어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각 언어와 다른 언어들 사이의 닮음을 결정하는 언어 내부의 메커니즘이 있다. 동일성과 차이의 매개물, 인접성의 징후, 친근성의 표지로서 역사의 구체적인 실현 매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메커니즘이다. 이 메커니즘에 의해 역사성이 말 자체의 밀도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다.

 

5. 관념학과 비판론

 

따라서 18세기의 마지막 몇 년 무렵에 일반 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에서는 동일한 유형의 사건이 일어났다. 재현에 달라붙는 기호, 그 시기에 확립될 수 있었던 동일성과 차이의 분석, 우글거리는 유사성에 따라 작성된 연속적이고 동시에 분절된 도표, 다양한 경험 사이에서 명확하게 규정된 질서는 이제 재현 자체에 대한 재현의 이중화에만 의거할 수 없다. 욕망의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제 욕망에 의해 재현될 수 있는 다른 대상들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재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 즉 노동이며, 자연물을 특징짓게 해 주는 것은 이제 누구나 그것 및 다른 것들에 대해 만들어 갖는 재현에 의거하여 분석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그 존재물에 내재하고 그것의 유기적 구조라 불리는 어떤 관계이며, 하나의 언어를 규정하게 해주는 것은 그것이 재현을 나타내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내적 구성, 낱말들이 서로 차지하는 문법상의 위치에 따라 낱말들 자체를 변화시키는 어떤 방식, 다시 말해 언어의 굴절 체계이다.

18세기 말에 관념학과 비판철학의 공존은 오래지 않아 해체될 것이 분명한 단일성 속에서 과학에 관한 성찰이 유지해 온 것을 서로 무관하지만 동시적인 두 가지 사유의 형태로 분할한다. 관념학은 대상이 관념들, 다시 말해 관념들이 말로 표현되고 추론의 과정에서 서로 연관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관념학은 모든 가능한 학문의 문법 겸 논리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관념학은 모든 지식을 재현의 공간에 위치시키고, 이 공간을 전반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이 공간을 조직하는 법칙에 관한 지식을 표명한다. 그러나 관념학의 토대가 되는 이 이중화는 관념학을 재현의 장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지 못한다. 이 이중화의 목적은 모든 지식을 누구도 벌어날 수 없는 직접적인 재현에 포개 놓는 것이다.

18세기 말에 유럽의 문화에서 일어난 사건, 즉 지식과 사유가 재현의 공간 밖으로 물러난 사건은 칸트의 비판론에서 확인된다. 그 때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재현의 공간이 갖는 토대, 기원, 한계이다. 고전주의적 사유가 정립했고 관념학이 추론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에 따라 단계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던 재현의 한없는 영역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형이상학인 것으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비판론은 재현의 원친이자 기원인 것 전체를 재현의 바깥에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또 다른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19세기가 이 비판론의 선례를 따라 전개하게 되는 생의 철학, 의지의 철학, 계시의 철학을 가능하게 한다

 

6. 객관적 종합

 

18세기 말경에 서양의 에피스테메에서 돌발한 근본적인 사건의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장 회피하기 어려운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부정적으로는 인식의 순수 형식이라는 영역이 고립되어, 모든 경험적 지식에 대해 자율성과 지배력을 확보하며, 구체적인 것을 형식화하고 최대한 순수 과학을 구성하려는 기획을 한없이 생겨나고 또 생겨나게 하는 반면, 긍정적으로는 경험의 영역들이 철학의 축소 또는 반철학의 가치와 기능 만큼 철학의 가치와 기능도 떠맡으면서 주체성, 인간, 유한성에 대한 성찰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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