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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사물 / 미셸푸코 / 8장 노동, 생명, 언어 / 2017.7.16.() / 닥홍

 

170716 말과사물 8장 1-2절 푸코 발제닥홍.hwp

1. 새로운 경험성들

 

서양에서 지식의 공간은 이제 균형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예전에는 탁시노미아의 광범위 하고 보편적인 층이 마테시스의 가능성과 상관 관계를 맺고서 넓어지고, 탁시노미아가 지식의 가장 중요한 계기, 즉 지식의 본래적인 가능성과 동시에 지식의 최종적인 완벽성을 구성한 반면, 이제는 탁시노미아가 막연한 수직성에 따라 정돈되기에 이르는데, 이 수직성은 닮음의 법칙을 결정하고, 인접과 연속을 규정하고, 인식 가능한 배치에 근거를 제공하고, 약간 부수적인 결과의 영역 쪽으로 펼쳐지는 탁시노미아의 모든 광범위한 수평적 전개를 바꾸어 놓게 된다. 이런 식으로 유럽 문화는 깊이를 발견하는데,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동일성, 차이를 나타내는 특징, 갖가지 경로와 행로를 갖춘 연속적인 도표가 아니라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핵으로부터 발견하는 주요한 숨겨진 힘들, 즉 기원, 인과 관계, 역사이다.

생산, 생명, 언어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마치 그 자체로 중요하기 때문인 듯이 어떤 자율적인 압력의 영향 아래 외부로부터 인식에 부과되었을 대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또한 이것들을 과학이 고유한 합리성을 향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법에 힘입어 점차로 구축된 개념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생산, 생명, 언어는 새로운 대상에 대한 과학 및 기술의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상관 관계를 온전한 단일성 속에서 떠받치는 지식의 기본적인 방식들이다.

 

2. 리카도

 

재현에 부여된 우선권 때문에 애덤스미스의 항구적인 척도로서의 노동 개념에 혼란이 온다. 리카도의 분석을 통해서 구입되고 팔리는 노동자의 체력, 노고, 시간과 물건의 가치를 낳는 활동이 역사상 처음으로 철저하게 구별된다. 라카도의 경우에는 물건이 노동의 단위로 표시될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산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기본적으로 모든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에 물건의 가치가 노동량에 이해 정해진다. 가치는이제 기호가 아니라 생산물이 되었다. 시장에서 유통되고 서로 교환되는 가치들은 여전히 재현의 역량을 갖는다. 그러나 가치들의 이 역량은 다른 데에서, 모든 재현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근본적이며 따라서 교환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그러한 노동에서 비롯된다. 리카도 이후로는 노동이 교환 가능성의 기반이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 생산의 이론은 언제나 유통의 이론보다 선행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이후 다음의 결과가 파생된다.

첫 째, 사유의 가능 조건이라는 차원에서 리카도는 가치의 형성을 가치의 재현성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경제학과 역사의 맞물림을 가능하게 했다. 경제학의 존재 방식은 이제 차이와 동일성의 동시적인 공간이 아니라 연속적인 생산의 시간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두 번째로 희소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희소성의 필요와 관련하여 규정되었다. 이후의 경제학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결핍의 상황이다. , 가만히 내버려두면 무기력해지고 아주 적은 부분을 제외하면 점차 고갈되는 자연에 직면하여 인간은 목숨을 건다. 경제학의 원리는 이제 재현의 작용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죽음에 직면하는 위험한 영역 근처에 자리하는 것이다. 리카도부터 경제학은 유한성에 구체적인 형태를 지정하는 경향이 있는 인간학에 기초를 둔다. 18세기의 경제학은 모든 가능한 질서의 일반 과학으로 간주되는 마테시스와 관계가 있고, 19세기의 경제학은 인간의 자연적인 유한성에 관한 담론인 인간학과 관련된다.

끝으로, 리카도는 자연의 본질적인 인색함을 갈수록 끈질기게 표시하는 것을 자연이 갖는 다산성의 징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토지 임대료는 다산의 자연이 아니라 인색한 토지에 기인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유한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인간학적 상황으로 인해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더 극화되고 더 위태롭게 되며 이를테면 갈수록 더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역사는 이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 멈춰 서고 축 위에서 잠시 흔들거리다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즉 역사는 스스로 변함없이 지향하는 것, 사실상 처음부터 줄곧 역사의 모습인 것을 무한한 시간 속에서 정당화하는 안정 상태로 점점 더 현저하게 느린 속도로 접어들거나, 반대로 여태까지 연속적으로 역사의 모습이었던 것을 제거하는 한에서만 부동하게 되는 반점의 지점에 도달한다.

(리카도의 비관론으로 대표되는) 첫 번째 해결책에서는 역사가 인간학적 한정에 대해 일종의 광범위한 보완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물론 역사는 인간의 유한성 안에 자리하지만, 거기에서 명확한 형상처럼 돋보이게 되고,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결핍을 인간으로 하여금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두 번째 해결책에서는 인간학적 유한성에 대한 역사의 관계가 반대 방향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에 역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필요의 압력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 결핍을 증가하게 하는 것, 이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가는 데 필수 불가격한 양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하고 때로는 그보다 덜 받는데도 갈수록 더 많이 일하고 생산하게끔 하는 것은 실제로 역사이다.

그러나 아마도 라카도의 비관론과 마르크스의 혁명적인 약속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리카도의 경우 역사는 인간학적 유한성에 의해 마련되고 영속적인 결핍에 의해 분명히 드러나는 빈틈을 경정적인 안정화의 지점에 이를 때까지 가득 채우고, 마르크스의 해석에 의하면 역사는 인간에게서 노동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이 갖는 긍정적인 형태를 뚜렷이 부각시킨다. 서양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의 깊은 층위에서 어떤 실제적인 불연속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서양의 인식론적 배치는 마르크스주의를 열렬히 받아들였으며, 반대급부로 마르크스주의는 이 배치에 전적으로 토대를 두고 있었던 만큼, 이 배치를 변화시킬 힘이 조금도 없었다.

핵심은 19세기 초에 지식의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인데, 이 배치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제학상의 역사성과 인생의 유한성 그리고 한없는 감속의 형태나 급진적인 반전의 형태를 띠는 역사의 종언이다. 19세기의 유토피아는 시간의 여명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마지막 붕괴와 관련된다. 이는 지식이 도표 방식으로가 아니라 계열, 연쇄, 발전의 방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배치는 오랫동안 사유를 지배했고, 19세기 말에 니체는 이 배치에 불을 지름으로써, 이 배치를 마지막으로 빛나게 했다. 우리는 마지막 대화재의 소생하는 불길인지 혹은 새벽의 징후인지 알지 못하는 빛 속에서 오늘날의 사유 공간일 수 있는 것의 출현을 본다. 아무튼 니체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변증법과 인간학의 뒤섞인 약속을 불태워 버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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