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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4. 기레민
4 말하기
1.비평과 주석
고전주의 시대에는 언어가 사유를 재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언어의 재현 작용이 없었다면 어떤 기호도 솟아오를 수 없었다. 이러한 재현은 세계로부터 의미를 끌어오지만 세계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으며, 자체의 고유한 공간으로 통해 있는데, 이 공간 내부의 망상 조직이 의미를 야기한다. 공간 내부의 망상 조직이라함은 사유 전개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는 사유의 외부적 결과가 아니라 사유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는 비가시적이거나 거의 비가시적인 것이 된다. 이렇듯 언어는 재현에 대해 매우 투명했다. 반면 르네상스의 언어는 표기 기호와 세계의 두께 안에서 사물과 뒤섞였기 때문에 언어를 말하게 만들고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이차 언어(주석, 해석, 박학의 언어)가 요구되었고, 언어를 울리게 하는 말보다 언어가 먼저 존재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언어가 재현하는 역할에 온전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16세기(르네상스)의 언어는 반드시 언어가 먼저 있을 경우에만 주석이 실행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말없는 언어(텍스트)가 먼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부터는 텍스트가 사라지고, 말의 바탕 전체도 사라진다. 이전에는 말없이 존재하는 말이 사물에 새겨져 있었다. 재현만 남는데, 재현은 재현을 드러내는 언어 기호에 따라 전개되고 이런 식으로 담론이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언어가 주석과의 관련을 맺는 것이었다면 고전주의 시대에서는 언어가 작동 방식에 대해 질문을 계속 내놓는 비평으로 대체된다.
고전주의 시대부터 주석과 비평은 대립한다. 비평은 재현과 진실의 견지에서 언어에 관해 말하면서 언어를 판단하고 더럽힌다. 반면 주석은 자신의 비밀에 의문을 제기하며 선결되어야 할 텍스트라는 벼랑 앞에서 멈추고, 텍스트의 탄생을 반복해야 하는 불가능하고 무한한 임무를 맡으며 텍스트를 신성화한다. 비평과 주석의 경쟁 관계는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주해가 어느 정도 비평의 방법을 떠맡았듯이, 19세기부터 모든 비평의 언어는 실제로주해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언어가 재현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이차 언어는 비평이냐 주석이냐 하는 양자택일에 직면한다.
2 일반문법
언어의 실재가 일단 생략되자(르네상스의 주석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 이전에 있던 말이라는 실재가 있었는데 고전주의에서는 그 전제가 생략되었다는 뜻) 언어에는 재현에서의 기능, 즉 담론으로서의 성격과 효력만이 존속한다. 담론은 언어 기호에 의해 재현되는 재현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의 표지에 의해 개인은 재현들을 상기하고 서로 연결하고 서로 떼어 놓고 조작할 수 있다. 언어는 단선적 순서에 따라 사유를 부분별로 배치하게 마련이다. 각각의 사유는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며 배치되고 그런 한에서 명제 안에는 재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게 된다.
언어는 사유의 분석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공간에 질서를 정립하는 활동이다. 일반 문법은 어순을 동시성에 대한 어순의 관계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분야인데, 이 분야의 과제는 동시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문법의 고유한 대상은 사유나 언어가 아니라, 언어 기호들의 연쇄로 이해된 담론이다.
언어는 재현과 반성 사이의 구체적인 연결 고리이며, 재현이 필연적으로 반성과 소통하는 경로이다. 그래서 일반 문법은 18세기 동안 철학에 매우 중요했다. 일반 문법은 과학의 자연 발생적인 형태, 정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논리학 같은 것이었고, 이와 동시에 사유에 대한 최초의 숙고된 분석, 즉 직접적인 것과의 가장 기본적인 단절 현상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일반 문법의 대상은 바로 재현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호한 것이었다.
1) 일반 문법은 언어의 문채와 비유를 다루는 수사학과(언어 기호에 의해 공간성이 언어에 부여되는 방식) 분절과 순서를 다루는 문법(재현의 분석이 연속적 계열을 따라 배열되는 방식)이 있다.
2) 문법은 언어 일반에 관한 성찰로서 언어가 보편성과 맺는 관계를 드러낸다. 이 관계는 보편 언어의 가능성이 고려되느냐, 보편 담론의 가능성이 고려되느냐에 따라 두 가지 형태를 부여받는다. 보편 언어는 기호, 통사법,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순서가 제자리에 놓이기 마련인 문법을 창안한다. 보편 담론은 재현으로부터 인식의 가능성을 솟아나게 하기 위해, 인식의 탄생을 보여주고 보편적인 인식의 연결 고리를 드러내려고 한다.
언어는 재현을 나타낼 수 있는 한, 보편적인 것의 조건이다. 따라서 세계 전체를 말로 담아내는 언어가 존재해야 하며 역으로 재현 가능한 것 전체로서의 세계는 백과사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알파벳 순서의 백과사전, 만국 표기법, 다국어사전, 인식의 백과사전 등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과 보편의 에피스테메가 있었기 때문이다.
3) 인식과 언어는 서로 긴밀하게 얽힌다. 재현에서 인식과 언어는 동일한 기원과 작용 원리를 지니고 있다. 인식과 언어는 서로 근거가 되고 서로 보완하며 끊임없이 서로 비판한다. 또한 재현을 동시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사실 인식과 언어는 서로 다른 원리에 속한다. 인식한다는 것은 정신의 확실한 전개 과정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대로 정확히 말한다는 것이고, 말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동일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강요하는 전범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일신되어야 하며 특히 인식의 연쇄가 모호함도 빈틈도 없이 나타날 수 있도록 재조정되어야 한다. 말하기의 근본적 가능성이 문법에 의한 재현의 정돈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문법에 의해서 언어는 지식에 속하게 되고 이 지식이라는 특징은 언어들의 역사를 담게 되는 것이자 담론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백과사전의 기획은 인식들 자체의 연쇄에 따르지 않고, 언어의 형식 속에, 말을 통해 열린 공간의 내부에 놓이게 된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그것은 언어라는 순수한 요소에 대한 이해 방식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은 말없는 기호의 형태를 알아보며 주석을 달아주는 것이었다면 고전주의 시대에는 인식하기와 말하기가 동일한 배치 속에서 서로 얽힌다. 지식과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재현에 기호를 부여하는 일인데, 재현은 기호에 의해 필연적이고 가시적인 순서에 따라 펼쳐질 수 있다.
4) 언어는 분석 겸 순서가 되었기 때문에, 시간과 여태까지 전례가 없는 관계를 맺는다. 16세기에는 언어들이 역사 속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서로를 생성할 수 있다고 인정되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시간에 대한 언어의 관계가 역전된다. 이제는 방언들이 시간에 따라 차례로 세계의 역사에 퇴적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해 시간은 내부적 분석의 방식이지, 탄생의 현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언어에 내재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들의 역사 자체로 말하자면 그것은 점진적인 쇠락이나 우연한 사건, 다양한 요소의 이입과 마주침 그리고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들의 역사는 고유한 법칙도 움직임도 필연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언어들은 결코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 역사성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주나 승리와 패배 또는 유행이나 교역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하는 것이다. 언어들에 실증적인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외부나 역사 쪽에서가 아니라 말의 배열에서, 담론의 빈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17세기에 나타났던 (포르루아얄 문법) 일반 문법은 결코 비교 문법이 아니다. 일반 문법에서는 언어들 사이의 비교가 목적으로 간주되지도, 방법으로 이용되지도 않는다. 일반 문법이 일반적인 것은 담론의 재현하는 기능을 문법 규칙 아래, 그러나 문법 규칙의 바탕과 동일한 층위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일반 문법의 요구임에 따라서이다. 일반 문법에 의하면 언어는 또 다른 재현을 분절하는 재현처럼 보이므로, 일반 문법은 당연히 ‘일반적’이다.
3 동사의 이론
언어에 대한 명제의 관계는 사유에 대한 재현의 관계와 같다. 명제가 분해되자 담론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만큼, 명제는 언어의 가장 일반적이며 동시에 가장 기초적인 형태이다. 낱말을 낱말로 승격시키고 낱말을 외침과 소음과 분리하는 것은 낱말에 감춰진 ‘명제’이다. 실제로 음성 기호에서 직접적 표현 가치를 떼어 내고 음성 기호의 언어적 가능성을 최종적으로 정립하는 것도 명제이다.
동사는 모든 담론의 필수 조건이며, 잠재적일지라도 동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동사는 단언한다. 언어의 문턱은 동사가 솟아오르는 바로 거기에 있으며 동사는 낱말로 다루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에트르’라는 동사는 언어의 온전한 본질의 낱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고전주의 시대에는 순수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와 존재 사이에는 낱말이 중요하다. 언어는 내부로부터 존재를 단언한다고 하지만 기실 낱말이 단독으로 모든 가능한 담론을 사전에 밑받침하지 않는다면, 언어는 언어로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낱말은 언어로 표시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언어를 나타내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낱말은 어떤 기호와도 다르다. 기호는 지칭하는 것에 일치하고 충실하는 것이지만 낱말은 기호의 체계를 뛰어넘어 의미되는 것의 존재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앞서 다루었던 동사, 그것은 관념을 단언한다. 이 관념을 다루면서 동사에는 두 가지 재현이 공존한다. 이를테면 초록과 나무(ex-나무는 초록색이다), 인간과 삶 또는 죽음의 공존과 같은 것. 동사가 단언하는 공존은 사물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동시에 하는 두 가지 재현의 형태라고 봐야한다. 그래서 에트르 동사의 본질적인 기능은 모든 언어를 이 동사가 지정하는 재현과 관련짓는 것이다. 이러한 동사가 가리키는 것은 언어의 전형적인 특징 즉 사유가 언어의 장소라는 사실, 그리고 기호의 한계를 넘어 실제로 기호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낱말만이 재현 자체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사의 기능은 언어의 존재 방식과 동일시된다. 그런데 일반 문법이라는 단일한 영역이 사라지자마자 동사의 기능이 이러한 일반성의 지점에 이르러 해체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하여 19세기 전체를 가로질러 줄곧 검토되는 것은 언어가 갖는 동사로서의 불가사의한 성격이다. 언어가 존재와 가장 가까운 바로 거기에서, 언어가 가장 효과적으로 존재를 명명하고 존재의 근본 의미를 전달하거나 반짝거리게 하며 존재를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바로 거기에서 언어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다.
4 분절
낱말은 지칭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명사이다. 언제나 어느 특정한 재현 쪽으로 뻗어나갈 뿐 어떤 다른 재현도 지향하지 않으므로 고유 명사이다. 그래서 명사는 동사와는 대조적으로 무한히 급증한다. 명사는 수평 분절(종-속-강을 만들어내는 일반성)과 수직 분절(실체와 표층의 구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언어의 기본적 분절은 직각을 이루는 두 축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하나의 축은 단독적인 개체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의 축은 실체에서 표층이라는 특성으로 이어진다. 이 두 축의 교차 지점에는 보통 명사 한 극단(수평분절)에는 고유 명사, 다른 극단에는 형용사(수직분절)가 있다. 그렇게 보면 언어(고유명사)는 한꺼번에 둘로 분할된 재현인 것 같다. 그런데 재현의 요소들은 복잡한 관계망 전체에 따라 분절되는 만큼, 언어가 실제로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 관계망 전체를 언어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낱말에는 더 낮은 수준의 분절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그것이 그 자체로 재현의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지만 재현이 분석되는 과정에서 내부 관계들의 조직망이 재현에 의해 보이게 됨에 따라 일부분으로 가치를 가진다.
언어의 재현하는 기능은 언어 자체의 두께 전체에, 그리고 최초로 외침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의 가장 근원적인 소리에도 간직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언어는 각가의 분절을 통해 언제나 명명해 왔다.(생략한 발제 부분이 아마도 이 내용을 실증했던 것 같다) 문장의 내부에는 즉 하찮은 음절에 의미가 말없이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러한 심층에는 수면 상태의 명명, 즉 비가시적이지만 지워지지 않는 재현의 반영을 소리의 벽들 사이에 붙잡아 놓는 형태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19세기 문헌학에서 이와 같은 분석은 죽은 부분이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이것이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다뤄지고 경험될 수 있는 영역이다.
말라르메, 루셀, 레리스, 퐁주에 의해 말이 파괴되면서 되찾아지는 것은 소리나 순수한 추상적 요소가 아니라 분쇄된 상태로 또 다른 말을 해방하는 다른 말이라는 관념, 이 관념은 근대적 언어 과학 전체의 음화이자 동시에 언어의 가장 모호하고 가장 실질적인 힘이 전사되는 신화이다. 언어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 언어가 자의적이고 어떤 조건에서 언어는 의미하는 것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포르루아얄의 의의랄까?)
5 지칭
언어의 기능이 명명하는 것, 다시 말해 재현을 일으켜 세우거나 손가락으로 지적하는 것이라면, 언어는 판단이 아니라 지시이다. 언어는 표지, 표기, 결합된 형상, 가리키는 행위에 의해, 즉 술어 형성의 관계로 축소될 수 있는 사소한 것에 의해 사물과 연결된다.
기원은 지시되는 것을 기호로 대체할 수 있게 해 주고, 존재는 내용을 다른 내용과 관련지을 수 있게 해준다. 언어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언어가 순수한 지칭이었던 최초의 계기, 그것도 언어의 자의성과 동시에 언어에 의해 명명되는 것에 대한 언어의 깊은 관계가 설명되어야 하는 바로 거기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에 의해서 소란을 피우는 육체의 기관이 띠는 형태에 좌우되어 보편적인 동일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몸짓이나 표정을 다른 사람이 지닌 생각의 표시와 대체물로 즉 기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로부터 이해가 시작된다. 이처럼 합의된 표현인 기호의 사용에 힘입어 언어 같은 것이 탄생할 수 있다.
행위는 언어가 아니지만 간계들의 유비와 묘사 시간의 역류에 의한 기호가 가리키는 재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리고 사람에게서 외침이나 몸짓에 상응하는 재현을 생겨나게 할 수 있어서 언어적이다. 이처럼 언어는 이해나 표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기호와 재현의 가역적이고 분석 가능한 관계에 토대를 둔다. 외침은 공포와 유사하지 않고 내민 손은 배고픔의 감각과 유사하지 않지만 합의되면 이것은 기호로서 자연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립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본질은 표현하지 않는다. 이 기호들이 결코 지칭 대상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한계가 있어 관습 언어가 확립될 수 있다.
이제 사물을 표시하는 충분히 많은 기호가 자유롭게 이용되고, 따라서 최초의 기호를 분석하고 조합하는 새로운 기호가 결정된다. (루소는 이걸 합의라고 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했다) 행위 언어로 설명되는 언어의 발생은 일정 부분 자연의 모방과 자의적 관습 사이의 양자택일에 얽매어 있다. 자연이 존재하는 바로 거기에는 우리의 육체를 가로질러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기호에는 어떤 닮음도 없고 거기에는 자발적 합의에 의해 유사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째서 어근 이론이 행위 언어의 분석과 전혀 모순되지 않고 행위 언어의 분석에서 발견되는가. 어근들은 많은 언어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기초적인 낱말로서 자연에 의해 무의지적 외침으로 부과되었고 행위 언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사용되어 관습 언어에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근을 정의하는 것은 어원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주의시대의 언어가 시대와 인간의 지식이 전개되는 분석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18세기에 어원이 탐구된 방식과 어근의 관련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6 파생
진정한 문자는 더 이상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 관례적으로 사물에 따라붙는 상황의 하나, 또는 유사한 다른 사물을 나타내려는 시도가 행해질 떄 비로소 등장했다. 이로부터 제유적인 문자/“전의적인” 상형문자/상징적인 문자가 등장한다. 이는 수사학의 제유, 환유, 비유적 전용을 보여준다.
상형문자를 지닌 언어의 역사는 오래지 않아 끝난다. 그런 언어는 진전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형 형태의 문자만을 지니고 있는 민족의 경우에는 정치에 의해 역사가 배제되게 마련이다. 적어도 순수하고 단순한 보존이 아닌 역사는 전부 배제될 것이 틀림없다. 이에 따르면 언어의 공간적 배치가 시간의 법칙을 규정하는 듯하고, 민족들의 운명이 말없이 형성되는 것은 바로 재현, 말, 공간의 분기점에서이다.
알파벳 문자의 등장은 인간은 소리를 공간에 옮겨 적고 기호들의 조합으로 가능한 말이 많아진다. 알파벳은 구성 요소의 수가 적어서 학습이 매우 용이하고 다른 민족들이 문자를 배우는 데 낭비하는 시간을 반성과 관념의 분석에 할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18세기에 정의되는 그러한 진보는 본질적으로 역사의 내부적 움직임이 아니라, 공간과 언어의 근본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결과이다.
언어는 기본적인 지칭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기를 계속하면서 애초의 고유하거나 개별적인 이름이 그 이름의 사물의 유일한 요소를 내포하는 다른 모든 개별 사물들에 적용되었다. (밤은 이날의 끝이 아니라 모든 석양과 모든 새벽을 갈라놓는 어둠의 부분을 지칭했다) 이렇게 여러 사물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의 점진적 분석과 더욱 진전된 분절은 제유, 환유, 비유적 전용의 맥락을 따라 이루어졌다. 사실 이는 모든 언어가 자연적으로 새겨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고유한 유동성이다.
오늘날은 분석이 매우 정교하고 격자가 매우 촘촘하며 등위와 종속의 관계가 매우 분명히 확립되어 있지만 맨 처음의 언어는 지금보다 유동성이 강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 언어들이 다양성을 갖는 것,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아마도 공통적이었을 기본적인 지칭으로부터 언어들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 안에서 생겨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관찰 가능한 것이다. 이 공간은 전의법의 공간이다. 이 전의법의 공간이 없다면, 귀속 관계를 확립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보통 명사로는 언어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말의 분석이 없다면 문채들은 말이 업속 일시적이며 순간의 작열 속에서 감지될 뿐 시간조차 없는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을 것이다. (장소성의 강조인 듯)
7 언어의 사변형
명제/분절/지칭/파생 네 가지 이론은 사변형의 선분 같은 것을 형성한다.
분절: 명제의 아직 비어 있는 순수한 언어 형태에 내용을 부여할 수 있다.
지칭: 분절이 구획해내는 모든 명사 형태 사이의 부착점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이 구획선(마름질)에 맞선다.
파생: 재현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 어근과 재현 사이의 독특하고 안정적인 관계와 맞선다. 파생이 없다면 지칭은 자기 안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고 귀속 관계를 통한 일반성을 획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생은 명제로 회귀한다.
분절과 파생 사이의 관계
: 분절 언어의 낱말들이 애초의 의미로부터 파생 과정에 의해 가변적 외연을 획득하면서, 그렇게 끊임없이 점점 더 멀리 움직이면서 언어의 사변형 전체를 가로지르는 축이 유래한다. 말이 재현하는 것에 대한 말의 관계가 확립되는 것은 바로 이 축을 따라서이다. 사변형은 두 개의 대각선을 가지는데 첫 번째 대각선은 언어의 명시 역량을 가리키고 두 번째는 재현을 나타내게 만드는 이분화를 표시한다. 이 대각선의 교차 지점에는 재현의 이분화 과정이 분석으로 드러나고 대체물이 분배의 역량을 갖는, 따라서 재현의 일반적인 분류의 가능성 및 원칙이 자리하는 바로 거기에 명사가 있다. *명명한다는 것은 재현의 언어적 재현을 제시함과 동시에 일람표 안에 배치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언어의 이론 전체는 명사를 중심으로 마련된다. 재현이 명제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실체에 의해서이며 언어의 모든 기능은 이 실체 안에서 서로 교차한다. 하나의 낱말이 아무리 추상적이고 일반적이고 공허할지라도 그것이 재현하는 것의 가능성을 단언하지 않고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사변형 가운데에서 명사는 언어의 모든 구조가 모이는 지점이자 언어의 참과 거짓에 대한 출발점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의 경험 전체는 여기서 시작된다. 사물 자체가 명확하게 명명될 완벽하게 투명한 언어의 위대한 이상향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래서 고전주의 시대의 모든 담론을 조직하는 것은 바로 명사이다. 명사라는 지고한 명명행위를 향해 나아가는 것, 사물과 말이 공통의 본질 속에서 서로 맺어지고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장소 쪽으로 언어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것이다.
고전주의 문학 전체는 명사에 도달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전주의 문학은 이전에 동일한 사물을 새로운 문채들로 또 다시 명명하는 작업에서는 명명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여 정확히 명명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사실 고전주의는 명명하기에 집착했다. 명사가 언어의 실현인 동시에 실체이고 약속이자 원료인 유일한 시기, 사드에 힘입어 명사의 범위 전체에 욕망이 물들었는데, 그때 명사는 욕망의 출현 장소와 충족 그리고 끝없는 되풀이였다. 우리의 문화에서 사드의 작품이 끊임없는 원초적 속삭임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면 앞서의 명사의 폭력성이 매력이 없어지게 되면서 언어는 ‘말씀’이라 불리게 되는 자신을 위해 언어의 존재를 해방하는 담론인 문학이 된다.
명제/분절/지칭/파생의 사변형은 내부의 모습을 제공한다기보다는 주변을 명시하고 언어에 대해 외적이고 불가결한 거소가 언어가 어떻게 뒤얽히는가를 보여 준다. 명제의 효력에 의해 언어는 주어질 수 있으며 명제의 형식은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말하기가 가능하다. 말이 파생/지칭/분절 되기 위해서 사실 사물로부터 올라오는 유비의 웅성거림이 감지되어야 하고 따라서 처음부터 닮음이 주어져야 한다. 모든 것이 절대적 다양성이라면, 사물들을 서로 비교하고 동일한 특성을 뚜렷이 규정하며 공통의 이름을 확정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특이성을 떨쳐내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며 기억도 상상도 반성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유사성은 17세기 초부터 지식에서 배제되지만, 변함없이 언어의 외부 가장자리, 즉 분석되고 정리되며 인식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둘러싸는 고리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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