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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사물 / 미셸푸코 / 2장 세계의 산문 / 2017.5.28.() / 닥홍

 

1. 네 가지 유사성

 

170528 말과사물 2장 푸코 발제닥홍.hwp

 

16세기 말엽까지 서양 문화에서 닮음의 역할은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대부분 이끈 것은 바로 닮음이다. 재현은 모든 언어의 호칭, 언어가 말해지고 언어의 말할 권리가 표명되는 방식이었다. 이제 우리는 닮음이 지식에 속하지 않게 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인식의 지평에서 사라지게 되는 시기에 어느 정도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말 유사성은 어떻게 사유되었을까? 유사성은 지식의 형상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가? 닮은 사물들의 수가 무한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유사한 양상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닮음과 지식의 맞물림을 결정하는 주요한 네 가지 형상을 검토해보자.

우선 콘베니엔티아(Convenientia), 장소들의 인접을 의미한다. 닮음은 사물들의 이 연결지점에서 출발한다. 닮음은 불가피하게 인접을 야기하고 인접은 닮음을 보장해둔다. 콘베니엔티아는 점진적 근접의 양상으로 인해 공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러한 관련은 매우 엄밀하게 맺어져서, 최초의 원인에서부터 가장 빈약하고 미미한 사물까지 상호적이고 연속적인 방식으로 팽팽하게 연결된 끈처럼 보인다. 따라서 빛을 발산하는 탁월한 미덕은 끄트머리만 건드려도 전체가 자극을 받아 진동하게 된다.” (48)

유사성의 두 번째 형태는 일종의 부합이지만, 장소의 법칙에서 풀려나 부동의 상태로 거리를 두고 작용할 아이물라티오Aemulatio이다. 어느 정도는 공간적 부합이 깨지고, 사슬의 고리들이 제각기 떨어져 나가고는 멀리 떨어진 채로 어떤 접촉도 필요로 하지 않는 닮음에 따라 재생되기라도 하는 듯하다. 경합(아에물라티오)으로 인해 사물들은 우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연쇄도 근접도 없이 서로 닮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세계의 각 사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를 넘어선다. 공간에 퍼지는 이 반영들 중에서 최초의 것은 무엇일까? 실재는 어디에 있고, 투사된 이미지는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기란 불가능하다. 경합은 사물이 갖는 일정의 자연적 상사성이기 때문이다. 경합을 통해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감싸고, 이 과정은 아마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중복에 의해 반복될 것이다. 경합의 고리는 부합의 요소와는 달리 사슬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호적 반영 및 경쟁의 동심원을 형성한다.

세 번째 형태의 유사성은 유비이다. 유비 속에서 콘베니엔티아(부합)와 아이물라티오(경합)이 겹친다. 유비의 가역성과 다면성 때문에 보편적인 적용 범위를 부여받는다. 세계의 모든 형상은 유비에 의해 서로 연관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이 공간에도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존재한다. 이 지점은 유비로 포화되어 있고, 관계들은 이 지점을 거치면서 방향이 거꾸로 바뀌지만 변질되지는 않는다. 이 지점이 바로 인간이다. 닮음의 형상을 우리의 지식에 포함되게 해 주는 격자와 16세기의 지식이 사물에 부과한 격자는 이 지점에서만 일치한다. 인간은 비례의 중요한 지렛대, 이를테면 관계의 근거인 동시에 관계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는 중심이다.

네 번째 형태의 닮음은 감응이다. 감응은 운동성의 원리이다. 감응은 동일자의 몹시 강하고 집요한 심급이기 때문에, 유사성의 형태들 중의 하나로 그치지 않고, 사물들을 서로 동일하게 하고 뒤섞고 사물의 개체성을 사라지게 하고, 따라서 사물을 이전의 상태와 무관하게 만드는 위험한 동화의 힘을 지니고 있다. 감응은 변형시킨다. 그래서 감응의 쌍둥이 형상, 즉 반감에 의해 감응이 보완된다. 반감은 사물을 고립된 상태로 유지하고 동화를 방해한다.

감응-반감이라는 짝패의 절대적인 힘, 이 짝패에 의해 촉발되는 움직임과 분산은 모든 형태의 닮음을 야기한다. 앞의 세 가지 유사성은 이 짝패에 의해 재검토되고 설명된다. 이 상호 작용 때문에 세계는 동일한 모습을 유지한다.

 

2. 표징

 

그렇지만 체계는 닫혀 있지 않다. 어떤 열린 부분이 남아있다. 유사성의 네 가지는 우리에가 유사성의 경로와 이 경로가 어디를 통과하는지에 관해 말해 주지만, 유사성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유사성을 알아볼 수 있는지, 어떤 표지로 유사성을 식별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말해 주지 않는다. 비가시적 유비에 대한 가시적 표지가 있어야 한다. 표징 없는 닮음은 없다. 유사한 것들의 세계는 표시가 있는 세계이다. 표징들의 체계는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가시적인 것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다. 닮음은 세계의 깊은 곳으로부터 사물을 가시화하는 것의 비가시적 형태였다. 그러나 이 비가시적인 형태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깊은 비가시성에서 끌어낼 가시적 형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의 모습은 문장, 특징, 지표 등 상형문자로 뒤덮여 있다.

표징이 해독될 수 있도록 표지되지 않는다면, 어떤 닮음도 관찰될 수 없다. 비밀스럽고 본질적인 닮음을 가리키는 기호는 무엇일까? 어떤 형태의 기호의 독특한 기호 가치일까? 그것은 닮음이다. 기호는 또 다른 닮음이다.

기호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기호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인식과 기법 전체를 해석학이라 부르고, 기호가 어디에 있는가를 판별하고 기호를 기호로 성립시키는 것을 규정하며 기호들 사이의 관계와 기호들의 연쇄 법칙을 알게 하는 인식과 기법 전체를 기호학이라고 하자.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서로 닮은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본성, 사물들의 공존, 사물들을 연결하고 서로 소통하게 하는 연쇄는 사물들의 닮음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닮음은 세계를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는 기호들의 망 속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자연은 기호학과 해석학이 겹쳐 있는 얇은 두께사이에 붙들려 있다. 격자는 분명하지 않고 투명성은 처음부터 흐려져 있다. 점차적으로 밝혀야 할 어두운 공간이 출현한다. 자연은 바로 그곳에 존재하고, 인식하고자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만일 닮음의 해석학과 표징의 기호학이 그야말로 정확히 일치한다면 모든 것은 직접적이고 명백할 것이다. 그러나 표기 기호를 형성하는 유사성과 담론을 형성하는 유사성 사이에 골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무한하고 고된 지식의 작업은 고유의 공간을 부여받는다.

 

3. 세계의 한계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개괄한 16세기의 에피스테메이다. 이 지형은 몇 가지 결과를 수반한다.

우성 이러한 지식이 과다하고 동시에 절대적으로 궁핍한 성격이 있다. 무한하므로 과다하다. 닮음은 안정적이지 않고, 스스로 또 다른 유사성을 계속해서 불러들인다. 기초가 불안정하다. 16세기의 지식은 닮음을 기호와 기호에 의해 지시되는 것 사이의 연결 고리로 설정함으로써, 언제나 동일한 사물만을 인식하게끔, 특히 한없는 행로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끝에서만 인식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소우주라는 범주가 작용한다. 세계관과 비슷하다. 이 개념은 사유의 범주로서, 이중화된 닮음의 작용이 자연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도록 하고, 탐구를 통해 각 사물의 거울과 거시적 정당성이 더 넓은 차원에서 발견되리라는 것을 보장하며, 역으로 가장 높은 창공의 가시적 질서가 대지의 가장 어두운 심층에 반영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내보인다. 이 개념은 자연의 일반적 지형으로 이해될 경우, 서로 교대하는 유사성들의 수그러들지 않는 전진에 실제적이고 말하자면 촉지 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한다. 완벽하게 닫힌 공간 안에서 유사성들은 서로 의존하고 상호적으로 강화된다.

그러나 대우주와 소우주의 관계가 단순한 표면 효과인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모든 유비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이 관계가 신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16세기 지식의 핵심에는 어떤 필요가 자리하고 있었다. 닮음의 무한한 풍요로움과 닮음과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부과하는 단조로움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기호와 유사성이 끝없는 나선을 따라 상호적으로 휘감기는 에피스테메에서, 소우주와 대우주의 관계는 지식의 보증으로 생각됨과 동시에 지식의 확장에 대한 한계로 이해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동일한 필요 때문에, 16세기의 지식은 마법과 동시에 박학을 동일한 차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의 지식에 타격을 주는 것은 구조의 결핍이 아니다. 16세기 지식에서 마법과 박학은 이를테면 수용된 내용이 아니라 요구되는 형식이다. 세계는 해독해야 할 기호로 뒤덮여 있고, 닮음과 친화력을 드러내는 기호 자체는 단지 유사성의 형태일 뿐이다. 인식은 해석된다. 디비나티오(점술)과 에루디티오(학식)은 하나의 동일한 해석학이다.

인저된 권위와 관찰, 또는 전승된 것과 검증 가능한 것 사이와는 달리 표지와 말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도처에 하나의 동일한 작용, 기호 및 유사한 것의 작용만이 있을 뿐이고, 따라서 자연과 언어는 한없이 교차하면서 읽을 줄 아는 사람을 위한 단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 같은 것을 형성한다.

 

4. 사물의 문자

 

16세기의 실제의 언어는 거울처럼 사물을 반영하여 특이한 진실을 하나씩 표현할 독립적이고 획일적이고 매끈한 기호들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불투명하고 불가해하고 자체적으로 닫힌 사물, 즉 철저하게 수수께끼처럼 파편화된 덩어리로서, 여기저기에서 세계의 형상들과 섞이고 뒤얽힌다. 언어는 유사성과 표징의 광범위한 배치 가운데 일부를 이룬다. 언어는 자연물처럼 연구되어야 한다. 언어들은 세계에 대해 의미 관계보다는 오히려 유비 관계를 맺고 있으며, 더 정확히 말해 기호 가치와 이중화 기능이 서로 겹쳐 있으며, 하늘과 대지의 이미지이면서 하늘과 대지를 말하며, 성서와 말씀에 의해 확증되는 십자가의 도래를 공표하면서 십자가의 가장 물질적인 구조를 내타낸다. 언어에는 상징적인 기능이 있다.

백과사전의 기획은 알고 있는 것을 언어라는 중립적 요소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 자체를 말의 연쇄와 그 공간적 배치로 재구성하려는 기획에 해당한다. 언어와 사물에 공통되는 듯한 공간에서 언어와 사물이 그토록 서로 얽히는 현상은 문자의 절대적인 특권을 전제한다. 16세기에 비의적 지식은 말의 현상이 아니라 문자의 현상이다.

글의 우월성은 16세기의 지식에서 명백하게 대립하지만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형태가 쌍둥이처럼 현존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데, 보이는 것과 읽히는 것, 관찰된 것과 이야기된 것 사이의 비구별이고, 따라서 시선과 언어가 한없이 교차하는 단일하고 매끈한 닫힌 표면의 구성이며, 역으로 다른 하나는 확실한 어떤 용어도 없이 주석의 부단한 반복에 의해 이분화되는 모든 언어의 즉각적 분열이다.

지식은 모든 표지 위로 주석이라는 이차적 담론을 생겨나게 한다. 지식의 속성은 보는 것이나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주석 작업은 완결될 수 없다.

 

5. 언어의 존재

 

서양 세계에서 기호들의 체계는 스토아 철학 이래 3원적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기호들의 체계에서 의미하는 것, 의미되는 것, 상황을 가려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17세기부터 기호들의 배치는 2원적이게 된다. 왜냐하면 포르루아얄에 힘입어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결합에 의해 기호들의 배치가 정의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조직이 다르고 훨씬 더 복잡하며, 표지의 형식적 영역, 표지에 의해 지시되는 내용, 그리고 지칭된 사물에 표지를 연결하는 유사성을 요구하므로 3원적이다. 그러나 닮음의 기호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기호의 형식이므로, 이 배치의 세 가지 개별적 요소는 단일한 형상을 흡수된다.

이 새로운 배치로 말미암아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16세기까지는 실제로 하나의 기호가 의미하는 바를 그 기호가 가리킨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가 문제였으나, 17세기부터 문제시 되는 것은 어떻게 기호가 스스로 의미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 문제에 고전주의 시대는 재현의 분석을 통해 대답하게 되고, 근대적 사유는 의미와 의미 작용의 분석을 통해 대답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언어는 재현 또는 의미 작용의 특별한 경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로써 언어와 세계의 깊은 귀속 관계가 흐트러지고, 문자의 우위가 유보된다. 보이는 것과 읽히는 것, 사시적인 것과 언술할 수 있는 것이 무한히 교차하는 균일한 지층도 사라진다. 사물과 말이 서로 떨어지게 된다. 눈은 보는 것, 오직 보는 데에만 쓰이고 귀는 오직 듣는 데에만 쓰이게 된다. 담론의 임무는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있게 되지만, 담론은 자신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근대의 문턱에서 성립되고 지칭된 것과 같은 문학은 뜻밖에도 언어의 존재가 선명하게 재출현하는 현상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언어의 고유한 존재 방식, 즉 세계에 새겨지는 유구하고 견고한 사물로서의 언어가 재현의 기능 속으로 사라졌고 모든 언어가 담론으로서만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언어의 기술은 알리는 방식, 이를테면 어떤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기호를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서 오늘날까지 문학은 자율적으로 존재했으며, 일종의 대항담론을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의 재현하는 기능 또는 의미하는 기능에서 16세기 이래로 잊힌 순수한 언어의 존재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만 깊은 균열에 의해 다른 모든 언어와 분리되었다.

19세기부터는 문학이 언어의 존재를 다시 드러나게 한다. 끝없는 담론의 움직임을 정당화하고 제한했던, 그 절대적으로 최초인 본래의 말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언어는 오래지 않아 시작도 끝도 약속도 없이 증식하게 된다. 문학 텍스트가 나날이 더듬는 것은 바로 이 공허하고 근본적인 공간의 행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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