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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사물 / 미셸푸코 / 해설527-552 / 2017.5.14.() / 닥홍

 

170514 말과사물 해설 푸코 발제닥홍.hwp

1. 푸코의 언어

 

푸코는 결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는 현실의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유동적인 듯 하다. 사유의 차원에서 그는 고체적인 질서의 공간과 기체적인 무질서의 공간 사이를 파고든다. 이 액체적인 중간 지대를 지향하는 제3의 몸짓이 푸코의 사유 방식을 특징짓는다.

푸코의 사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소거가 필요하다.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기보다 무엇이 없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유용하다. 그곳은 장소라기보다는 비-장소에 가까운 추상의 공간, 익명의 공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때 과연 나는 말하는 주체일까? 말하는 주체에 대한 언어의 우선성,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말로 생각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말의 요구에 따른 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푸코의 탐구가 자리 잡는 공간은 그의 언어가 확립되는 과정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문학으로부터 비롯한다. 문학이 이제는 문학 자체에 관한 언표일 뿐일 정도의 극단적인 내면화나 자기성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바깥의 경험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말하는 주체와 언어의 존재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말하는 주체의 소멸이나 적어도 부차적 기능으로 격하되는 현상에 의해 언어의 존재가 가시적이게 된다.

푸코의 지적 노정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푸코가 자신의 탐구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공간에 무엇이 없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있는가이다. 거기에는 힘들이 있다. 정확히는 힘들의 관계이다. 힘은 다수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힘에는 반드시 다른 힘이 작용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형태가 없는 힘들의 저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바깥의 공간에서는 힘들의 관계가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관계이고 역사가 아니라 순수한 생성만이 일어날 뿐이다. 카오스적 공간,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비-장소와 유사하다. 거기에는 말도 사물도 없다.

푸코에게 힘들의 디아그람은 언어의 존재이고, 전투의 은은한 포성은 바로 푸코의 언어, 푸코의 말과 글 도처에서 울려오는 언어인데, 여기에서 전투는 본질적으로 힘들의 상호 작용에 기인한다. 푸코의 언어에서 전투는 결코 개인들이나 집단들 또는 계급들이나 국가들 사이에서 이념이나 시대정신 또는 세계관을 위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전투의 주체와 대상은 바깥으로부터 오는 힘들이다. 권력을 형성하는 힘들의 관계에서 개인, 집단, 계급, 국가, 이념, 시대정신, 세계관은 이 관계의 일시적인 매듭이나 입체 교차로 또는 전체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유 방식은 힘을 행사하는 편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어 회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실체의 지위를 낮춤으로써 힘의 행사에 따르는 책임을 더 확실하게 떠맡도록 하는 것이며, 탐구와 분석의 목표를 실체나 관념의 차원에서 무형 또는 무정형의 차원으로 옮김으로써 현실을 다르게 또는 새롭게 보자는 데 본래의 뜻이 있다.

 

2. 푸코의 방법

푸코의 사유 방식은 기본적으로 3원적이다. 우선 위로는 힘들의 저장소라 할 수 있는 무형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힘들의 관계 전체를 특이성들의 발현으로 제시하는 부정형의 디아그람, 다음으로 아래로는 역사 구성체의 지층, 달리 말하자면 위에서의 전투가 남기는 흔적들의 퇴적층, 그리고 이 지층의 양쪽을 이루는 서로 이질적인 두 형태, 즉 담론 구성체와 비-담론 구성체로, 즉 이 세 꼭짓점을 연결한 삼각형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푸코의 고고학은 지층들을 형성하는 역사 구성체의 탐색 방법이다.

감시와 처벌부터는 디아그램의 개념이 모든 실증성의 내재적 원인 같은 것으로, 그리고 바깥이 언어의 존재 공간을 넘어 언표가 전제로 하는 특이성들의 발원지로 확립되면서부터는 역사 구성체라는 밑변이 가시적인 것과 언술 가능한 것, 그림-묘사와 언표-곡선, 들뢰즈에 의하면 내용의 형태와 표현의 형태로 확실하게 구분되고, 이 두 형태를 포괄하는 용어로 역사 구성체가 아니라 장치가 사용된다.

사회의 장들 만큼 디아그람도 다수이고 언술 가능한 것도 다수이며 가시적인 것도 다수이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삼각형이 얻어질 수 있다. 어떤 요소들의 삼각형이건 표현의 형태와 내용의 형태, 언술 가능한 것과 가시적인 것 사이의 이질성과 자율성, 그리고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위로 인해 생겨나는 간극이 중요하다. ‘광기의 역사에서 구빈원에서 정신병원으로 이르는 내용의 형태와 정신의학의 담론이라는 표현의 형태는 상이한 역사를 따라 전개되었다. ‘감시와 처벌에서 형법의 담론과 감옥의 제도는 직접적인 상호 관계 없이 개별적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림과 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대위법적 3원성을 갖는 푸코의 방법은 고고학 시기의 저서들에서도 그 편린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온전히 확실되어 감시와 처벌로 구현되는 것은 푸코가 니체의 계보학을 끌어들여 자기 것으로 삼은 데에 힘입어서이다.

계보학은 먼저 유래의 분석이다. 계보학은 진전된 계몽의 방식이자 역사적 유산에 대한 회의와 풍자의 정신에서 비롯하는 비판이다. 두 번째 탐구 대상은 출현의 가능조건이다. 출현이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들의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출현의 무대는 힘들이 서로 맞서고 투쟁이 전개될 닫힌 장이자, 힘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비가시적 장소, -장소이다.

19세기 역사의 시대인 유럽을 비판한다. 역사의 시대라는 것은 사실상 위대한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위대한 시대는 이전 시대에 대한 호기심도 존경도 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대를 비판하는 이러한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푸코는 역사의 주인의 되는 길, 역사의 비판적 사용과 동시에 역사 감각의 해방을 위한 길을 찾아낸다.

비실체적인 권력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기능으로 저항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힘에, 힘들의 디아그람에 이미 저항의 잠재력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진실의 효과에 대해 외부적이고 이질적이면서도 이른바 공모 관계를 맺고 있는 지식뿐만 아니라, 권력 관계가 사회의 육체의 모세 혈관까지 속속들이 퍼지는 경로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주체화 또는 예속화 과정이 권력과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푸코의 방법과 관련한 마지막 삼각형, 지식-권력-자기의 삼각형이 구성된다. 이 삼각형의 바깥의 힘은 자기를 매개로 지식과 권력 사이의 벌어진 틈으로 들어와서는 양쪽으로 나뉘어 흘러든다. 이로부터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느냐, 즉 주체화 과정이다. 그래서 마지막 푸코의 지적 노력은 자기가 저항의 발생원일 수 있는 길의 제시에 집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자기에 대한 관계가 바깥과의 관계이자 바깥의 내면화이고 타자의 이중화라는 것을 예증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주체화 방식은 극단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세계화에 의해 거의 예속화에 가까운 것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저항의 발생원일 수 있겠는가. 과거를 참조할 수는 있어도 과거를 되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푸코의 뜻이 과거로의 회귀에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가 역설하는 것은 바깥과의 절대적인 관계에 의해 힘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점이다. 이를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는 지식-권력-자기의 삼각형에 말하기-보기-생각하기의 삼각형을 겹쳐 볼 때 드러나는데, 후자의 삼각형 역시 서로 이질적이고 외부적이지만 상관관계와 상호 전제가 없지 않은 말하기와 보기 사이의 틈으로 사유가 흘러드는 유동성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푸코의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류하고 있다. 그럴 경우 자기는 생각하기와 통할 것이고, 따라서 자기를 저항의 발생원으로 형성하기는 바깥의 사유가 귀착하는 저항의 사유 또는 다르게 생각하기에 의해 들뢰즈가 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차이와 반복에 의해 다시 말해서 차이의 반복에 의해 가능해질 것이다. 푸코에게 사유는 힘이 있는 위험한 행위이다. 그는 변화의 위험을 내포하는 힘찬 생각을 권하는 셈이다.

다르게 생각하기 또는 저항의 사유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으로 확립할 수 있어야, 달리 말해 사유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성립해야 비로소 푸코의 자기가 저항의 발생원이라는 주장은 온전한 설득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더 본질적인 다른 하나의 근거를 추론해 낼 수 있다. 들뢰즈는 푸코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자취를 감추고 확산되는 힘들의 관계는 역사 구성체의 지층 바깥에 있지 않지만 지층의 바깥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모순인 듯이 보이지만 이 과정에 의해 바깥은 안이 된다. 안의 바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바깥이 안으로 들어오면 안의 바깥은 안에 동화되어 버린다. 안이 바깥 자체에 의해, 바깥의 움직임에 의해 생겨나는 공간, 다시 말해 바깥의 작용으로 안이 존재하게 된다면, 바깥이 존재하는 한 안도 계속 존재할 것이고, 바깥으로부터 오는 힘은 바깥의 안을 통해 들어올 것이다.

말과 사물에서 더 정확하게는 근대적 지식의 영역에 인식의 주체 겸 대상으로 출현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달라붙은 인간의 분신들에 관한 대목에서 특히 그것들 중의 하나인 사유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유가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근대인의 사유에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고, 따라서 사유에 대해 바깥이지만 사유와 동떨어진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니다. ‘광기의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은 외부의 내부, 내부의 외부에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로의 수인이었다. 들뢰즈는 이러한 광인의 처지에서 사유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읽어 내고, 안이 바깥의 주름으로 형성되는 위상 공간의 주제가 푸코의 사유에서 줄 곧 지속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를 비추어 보아 사유되지 않은 것 또는 사유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사유가 비롯된다는 생각에 모순은 없는 듯하다.

사유는 본질적으로 바깥에 주름을 잡기, 바깥의 주름에 의해 바깥과 외연이 동일한 안을 생성하기, 이를테면 바깥의 처녀 생식이라는 점, 바깥에서 온다는 점에서 힘과 동등한 것이라는 점, 자기 실험이자 자기에 대한 문제화이고 자기 안의 타자에 대한 인정일 뿐만 아니라 사유 자체에 대한 문제화, 사유 주체 자신에 대한 사유 주체의 문제화라는 점, 자기의 함양은 자기로부터 벗어나기라는 점에 대해, 늘 안전한 행위로서의 사유만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삶을 바꾸고자 하거나 창조적 삶을 살고자 꿈꾸는 이라면 푸코만의 생각이라고 반박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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