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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_말과사물_1부 1장_시녀들_170521.hwp



1장 시녀들





1. 

<시녀들>에서 화가는 어떤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지점에는 바로 관람자인 우리 자신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주시하는 광경은 이중으로 비가시적이다. 그 광경이 그림의 공간에 표현되어 있지 않고, 우리가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는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지 뒷면만 보이는 캔버스만이 화가가 응시하는 곳, 우리가 있는 곳의 비가시성을 표면의 형태로 나타낼 뿐이다. 

우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그림 속 화가는 우리를 응시한다. 이 상호적 가시성에는 불확실성, 교환, 회피하는 시선의 복잡한 망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 화가의 시선은 우리가 그 작품 앞에 서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로 향한다. 화자의 시선은 관람자들이 오는 그 만큼 많은 모델을 받아들인다. 주체와 객체, 관람자와 모델의 역할은 한없이 뒤바뀐다. 이때 끈질기게 비가시적인 캔버스는 시선들의 관계가 발견되지도, 결정적으로 확립되지도 못하게 방해한다. 관람자는 자신의 비가시성이 화가에게 가시적이게 되고 자기 자신에게 영원히 비가시적인 이미지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거울에 비치듯 화가의 손에 의해 자신이 캔버스 위로 옮겨진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순간에도, 관람자는 단지 그 이면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방 깊숙한 안쪽의 벽에,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이 환한 거울이 비추는 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거울은 거울에 등을 돌리고 있는 화가도, 방의 중앙에 있는 인물들도 비추지 않는다. 거울은 재현의 영역을 비추기는커녕, 재현의 영역 전체를 가로질러 모든 시선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에 가시성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거울이 드러내는 이 비가시성은 숨겨진 것의 비가시성이 아니다. 한편으로 거울에 비치는 것은 유화 속 인물들이 응시하고 있는 것, 즉 그들 앞의 곧은 시선이다. 유화가 더 앞쪽으로 연장되고 밑단이 더 아래로 내려와 화가에게 모델 구실을 하는 인물들이 그림에 포함된다면, 누구나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와 그의 작업실만이 보이는 데서 유화가 끝나고, 또 유화가 그림인 한,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그림 바깥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 안에서 화가가 바라보는 얼굴’과 ‘그림 속 화가를 바라보는 얼굴’은 둘 다 접근 불가능하지만,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전자는 그림의 고유한 구성 효과 때문이고, 후자는 모든 그림 일반의 존재 자체를 주재하는 법칙 때문이다. 여기서 재현은 비가시성의 이 두 가지 형태를 불안정하게 중첩시키고, 재현의 극점인 거울에 이 두 비가시성을 되돌려 주는 것으로 기능한다. 거울은 가시성의 전환을 보장하는데, 이 전환은 그림 안에 재현된 공간, 그림이 재현으로서 갖는 성격을 잠식한다. 이 유화의 중심에서 거울은 그림에서 두 번에 걸쳐 필연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보게 한다.

거울은 캔버스의 이면, 혹은 표면이다. 거울은 응시되지만 가시적이진 않은 것을 찾게 하고 또 이것을 모든 시선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2.

그림의 전경과 중경을 차지하는 마루판에는 화가를 포함해 여덟 명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 인물의 집합은 그림에 대한 관심이나 선택된 중심 기준에 따라 두 가지 도형을 구성한다. 하나는 커다란 X자 모양으로, 왼쪽 상부에는 화가의 시선이, 오른쪽에는 궁정 신하의 시선이 있다. 왼쪽 하부에는 캔버스의 구석이, 오른쪽에는 소년이 있다. 이 X자 모양의 중심에 공주의 눈이 있다. 또 다른 도형은 긴 곡선으로, 중경에서 왼쪽의 화가와 오른쪽의 궁정 신하를 끝단으로 하고 전경에서 공주와 수행 시녀의 시선을 지나가는 수반 모양의 선이다. 이 모양은 후경의 거울을 에워싸면서 돋보이게 한다.

이처럼 그림을 조직할 수 있는 두 개의 중심이 있는데, 그림은 관람자의 관심이 이리저리 유동하다가 이곳과 저곳 중 어디로 쏠리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다. 깊이의 방향에서 공주는 거울과 겹치고, 높이의 방향에서 공주의 얼굴은 바로 거울 속의 반영과 겹친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근법 때문에 매우 가까이 인접하게 된다. 여기서 어떤 선들이 필연적으로 솟아난다. 거울에서 나오는 선은 그림의 깊이 전체를 가로지르고, 이보다 짧은 다른 선은 어린 공주의 시선에서 시작되어 전경만을 가로지른다. 이 두 선은 매우 좁은 각을 이루면서 한 점으로 모이고, 이 두 선이 만나는 지점은 그림의 전방,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의 위치와 거의 동일한 부분에 고정된다. 

이 위치, 즉 그림의 외부에 있으므로 완전히 접근이 불가능하지만 또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선에 의해 결정되는 이 장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그 광경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안다. 그것은 두 군주다. 

왕과 왕비는 가장 흐릿하고 가장 비현실적이며 가장 손상되기 쉬운 이미지다. 한 번의 움직임, 약간의 빛만으로도 그들은 쉽게 사라진다. 그들은 그림 안의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자들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 뒤의 공간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는 그 반영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왕과 왕비는 그림의 외부에, 즉 본질적 비가시성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재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심이 된다. 

이 중심은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그려지는 모델의 시선,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시점의 화가의 시선이 이 중심에서 정확히 겹친다. 이 세 가지 ‘바라보는’ 기능은 그림 외부 지점에서, 즉 재현되는 것들에 비해 관념적이지만 또 재현이 가능해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라는 전적으로 실재적인 지점에서 합쳐진다.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것을 어렴풋한 형체로 보여 주는 거울의 반영은, 각 시선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되찾게 해 준다. 즉 화가의 시선에서는 화가의 재현된 분신이 그림 속에서 그리고 있는 모델을, 국왕의 시선에서는 그가 볼 수 없는 캔버스에 완성되어 가는 자신의 초상을, 관람자의 시선에서는 자신이 일종의 불청객으로서 차지하고 서 있는 장면의 실재적 중심을, 요술처럼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의 이러한 기능은 완전히 허위일 수도 있고, 어쩌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출 수도 있다. 국왕과 왕비가 자리하고 있는 장소는 미술가와 관람자의 자리이기도 하다. 거울 안쪽에는 벨라스케스와 익명의 과객의 얼굴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즉 이 반영은 그림을 구상한 시선과 그림의 전개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림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미술가와 방문자는  거울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이 그림에서 화가의 인위적인 기교는 관람자와 화가의 공석을 가리키면서도 동시에 감춘다. 누군가가 보는 것의 비가시성은 보는 이의 비가시성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재현의 모델과 재현의 지배자에 대한, 재현의 대상이 되는 사람뿐 아니라 재현하는 작가에 대한 재현의 이중 관계는 필연적으로 끊어진다. 설령 하나의 광경으로 제시될 재현 내에서도 이 관계는 온전히 현존할 수 없다.


3.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고전주의적 재현’의 재현, 그리고 고전주의적 재현에 의해 열리는 공간의 정의를 내포한다. 이 재현은 자체의 모든 요소와 자체의 이미지들, 가령 재현이 제공되는 시선들, 재현에 의해 가시적이게 되는 얼굴들, 재현을 탄생시키는 몸짓들로 스스로를 재현하려 한다. 그러나 재현이 모으고 동시에 펼쳐놓는 분산들로 인해, 여기에는 본질적인 공백이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재현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들, 즉 재현과 닮은 사람과 재현이 닮음으로만 비치는 사람은 여기서 자취를 감춘다. 이 주체 자체, 즉 동일 존재는 사라졌다. 그 결과 재현은 자신이 얽매여 있던 이해 방식에서 풀려나 마침내 순수 재현으로 주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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