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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 1부 5장, “분류하기”
역사가들이 말하는 것
사상사가나 과학사가는 17∼18세기 생명과학에 새로운 범위와 정확성이 부여되었다고 본다. 베이컨 이래 ‘관찰’이 방법론으로서 새로운 특권을 획득했고, 운동의 법칙이나 광선의 반사 법칙이 실험과 이론으로 분석 가능해졌다. 이로써 ‘생물’ 영역의 체계적 법칙 또한 실험과 관찰, 계산을 바탕으로 모색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갖가지 이론 아래 동일한 문제들이 매번 다르게 해결되었다. 가령 생물의 분류 가능성에 대해 린네는 자연 전체가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뷔퐁은 자연이 너무 다양하고 풍요로워서 경직된 틀에 끼워 맞출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들은 그 당시의 견해, 추론, 논쟁을 재구성한다. 역사가들은 그 당시 신학과 과학 간 갈등의 흔적, 낡은 과학과 새로운 과학의 모순, 린네와 보네 등의 대립을 짚는다. 예컨대 데카르트와 말브랑슈는 기계론과 신학에 각각 근거를 두고 서로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종교와 생명을 (보네처럼) 갈등상태, 또는 (디드로처럼) 공조 관계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역사가들은 19세기가 18세기의 이러한 모호하고 뒤얽힌 시도들을 넘어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생명과학이 실현된 시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18세기에 생물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150여 년 전부터 우리에게는 친숙해진 이 지식의 분할이 그 이전 시기에는 유효하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한다. 생물학은 미지의 분야였는데, ‘생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자연사’에 의해 구성된 지식의 격자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생물’만이 존재했다.
자연사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보통 데카르트의 기계론이 위축되면서 자연의 역사가 출현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자연사는 데카르트 철학의 좌절 이후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철학과 동시대의 것이었다. 데카르트에서 달랑베르까지의 역학과 투른포르에서 도방통까지의 자연사, 이 둘의 에피스테메는 동일했다.
우선 16세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것은 ‘역사’였다. 가령 블롱은 ≪새의 본성에 관한 역사≫를, 뒤페는 ≪식물에 간한 놀라운 역사≫를, 알드로반디는 ≪뱀과 용에 관한 역사≫를 썼다. 그러다가 1657년, 존스턴이 ≪네발짐승의 자연사≫를 펴낸다. 이 책은 역사(이야기)의 영역에서 두 가지 범주 인식이 갑자기 분리되었음을 예증한다. 그 이전까지 동식물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동식물의 기관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닮음, 효능, 관련 전설과 이야기, 문장학에서 차지하는 위치, 관련 약재, 음식, 고대의 기록, 여행자의 말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생물의 역사는 세계와의 연결망 내에서의 생물 자체를 쓰는 것이었다. 17세기 이전의 기호는 사물의 일부를 이루었다.
반면 존스턴의 ≪네발짐승의 역사≫는 말에 관한 장을 명칭, 해부학적 부위, 서식지, 연령, 생식, 울음소리, 동작, 호감과 반감, 이용 방법, 의료 관행 등 12가지 항목으로 나눈다. 그 이전의 ‘동물의 의미론’은 산산조각 난다. 린네의 자연사가 제안하는 서술 순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장은 이름, 속, 종, 특징, 용도 순으로 서술되고, 끝에 가서야 리테라리아(참고문헌)를 기술한다. 사물에 침전된 언어 전체, 발견, 전승, 믿음, 시적 수사의 담론은 맨 뒤로 밀려난다.
17세기 중엽까지 역사가의 임무는 자료와 기호를 대규모로 수집하는 것이었다. 파묻힌 모든 말을 언어로 되돌리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였다. 고전주의 시대에 역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사물 자체에 대한 세심한 ‘조사’를 떠맡아, 수집된 것을 매끄럽고 중성적이며 충실한 말로 옮겨 적는다. 이러한 ‘정화’의 시기에 최초로 성립된 역사의 형태가 자연사였다.
이 새로운 역사의 자료는 사물들이 병치되는 분명한 공간, 가령 식물도감, 표본실, 동·식물원이었다. 비시간적인 이 장소에서 존재물들은 모든 주석과 주변 언어를 박탕 당한 상태로 가시적인 표면을 드러내면서 공통 특징에 따라 서로 가까이 놓인다. 고전주의 시대에 설치된 자연사 전시실과 동·식물원은 ‘볼거리’의 순환적 행렬을 사물들의 ‘도표’식 진열로 대체했다. 무대의 시대와 목록의 시대 사이에 교모하게 끼어든 것은 지식의 욕망이 아니라, 사물을 시선과 담론에 동시에 결부시키는 새로운 방식, 곧 역사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구조
고전주의 시대는 더 분명히, 더 자세히 바라보려 했다기보다는 경험의 영역을 제한하려 한 시대다. 소문은 배제됐다. 취향과 입맛도 보편적이지 않고 뚜렷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없으므로 배제된다. 촉각은 매우 명백한 대립을 지칭할 때에만 쓰인다. 명증성과 넓이의 감각인 ‘시각’과 부분별 분석만이 절대적으로 중시된다.
관찰한다는 것은 보는 것, 사물을 체계적으로 보는 것, 재현의 다소 혼잡한 풍요로움에서 분석될 수 있고 모든 이에게 인정되며 각자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을 보는 데 그친다. 자연사의 관찰 대상은 네 가지 변수를 기준으로 선정된다. 요소들의 형태, 양, 공간 속에서 상관적으로 배치되는 방식, 상대적 크기가 그것이다. 예컨대 식물의 생식 기관을 연구할 경우, 수술과 암술을 하나하나 세고, 어떤 기하학적 형상에 따라 수술과 암술이 꽃 속에 배치되어 있는지, 수술과 암술의 크기가 다른 기관에 비해 어떠한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형태를 규명하는 것이 선결 문제가 된다. 이로써 누구나 동일한 개체와 마주쳐 동일한 묘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역으로 이런저런 묘사에서 이에 상응하는 개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언어와 사물의 첫 대면은 이제 불확실성의 여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확립된다.
이 네 가지 가치가 바로 식물학자들이 ‘구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구조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를, 서로 모순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은 방식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수와 크기는 언제나 계산과 측정에 의해 정해질 수 있고, 양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구조는 가시적인 것을 제한하고 걸러 내고, 이를 언어로 기록할 수 있게 한다. 혼란스럽고 동시적 형태를 띠는 재현은 구조에 의해 분석되고, 언어의 단선적 전개에 적합하게 된다. 자연사는 과학, 다시 말해 언어, 그러나 근거가 확실하고 잘 구축된 언어다.
이로써 자연사의 대상은 그 작용이나 비가시적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표면과 선에 의해 파악된다. 자연사는 계통 단위보다 기관들의 가시적 모양으로 식물과 동물을 관찰한다. 동물과 식물은 호흡이나 내부의 체액이기에 앞서 발과 발굽, 꽃과 열매다. 해부학이 식물학에 주도권을 뺐긴 것은, 해부학에 대한 호기심이 약화되거나 지식이 퇴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물보다 식물이 훨씬 덜 ‘모호한’ 격자로 구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원과 자연사 표본실이라는 제도는 이러한 마름질의 필연적 상관 변수다. 고전주의 문화에서 이들의 중요성은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 아니라 어떤 것을 감춘다는 점, 배제를 통해 또 다른 어떤 것을 솟아나게 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이들은 해부학적 구조와 기능을 감추고 유기체를 은폐한다. 그 대신 구성 요소, 분산 방식, 치수를 부각한다.
특징
앞서 자연 언어의 개별적 재현과 관련될 뿐인 최초의 ‘지칭’이 행위 언어와 본래의 어근에서 유래한 후, 파생의 힘에 의해 점차 일반적 의미를 회득하는 과정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자연사는 일상생활과 언어에 따로따로 속해 있는 것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즉 자연사는 모든 자연물을 ‘매우 정확하게 지칭’해야 하며, 이와 동시에 모든 자연물을 서로 접근시키고 다른 것과 구별하는 동일성과 차이의 체계에 모든 자연물을 위치시켜야 한다. 자연사는 ‘확실한 지칭’과 ‘제어된 파생’을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 구조의 이론이 분절과 명제를 하나의 동일한 것이 되도록 서로 겹쳐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징’의 이론도 지칭하는 가치와 이것이 파생하는 공간을 겹쳐 놓아야 한다.
특징의 확립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자연사는 묘사 과정에서 명칭 체계를 끌어낼 수 있으므로,,특징의 확립은 쉽다. 그러나 주요한 난점이 곧 드러난다. 모든 자연물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과 차이를 확립하려면 어떤 주어진 묘사에서 언급될 수 있는 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 난점을 풀기 위해 두 가지 기법이 등장했다. ① 닮은 점이 너무 많아서 차이점의 열거가 오래 걸리지 않은 경우, 완전한 비교를 통해 차츰 동일성과 구별을 확보하는 방식. ② 모든 개체에서 유한하고 상대적으로 제한된 특성들의 집합을 선택하여 그 항구성과 변이를 조사하는 방식. 여기서 후자는 ‘체계’, 전자는 ‘방법’이라고 불린다.
체계는 묘사를 통해 요소들을 병치하고 이들을 선별한다. 이로써 배타적 구조를 세운다. 예컨대 “결실(結實)에 관여하는 갖가지 부위가 모두” 특징의 표지로 선택된다면, 잎과 줄기와 뿌리나 잎자루의 차이는 무시된다. 선택된 요소와 관련되지 않는 다른 동일성은 이때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두 개체에서 선택된 요소들이 유사할 때, 그것에 공통의 명칭이 붙는다. 이것이 이른바 ‘특징’으로 불린다.
이처럼 체계는 자의적이다. 그럼에도 이 기법을 통해 언젠가는 자연적 체계가 발견될 수 있다. 또 체계는 상대적이다. 선택된 특징의 폭넓다면, 차이는 일찍 나타난다. 반면 그 범위가 제한된다면 차이는 드물 것이다. 투른포르는 속(屬)을 확립하기 위해 꽃과 열매의 조합을 특징을 선택했다. 꽃과 열매가 식물에서 가장 유용한 부위여서가 아니라, 수적으로 만족스러운 조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뿌리, 줄기, 잎의 요소들은 함께 다루기에는 너무 많았고 개별적으로 고찰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방법’은 동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기법이다. 방법은 특징으로 구실하는 요소에서 시작하지 않고 점진적 연역 방식을 취한다. 임의로 선택했거나 우연히 마주친 종에서 연역을 시작하여, 그 종에서 끌어낸 모든 값을 변수들로 설정하면서, 전체적으로 묘사한다. 이후 이 절차는 다음 종에서도 반복된다. 이때는 ‘차이’만이 언급된다. 세 번째 종도 이런 식으로 연역되고, 이후 계속 이런 연역이 이루어진다. 요컨대 첫 번째 묘사를 중심으로 이후 점차적으로 경감되는 묘사들을 모으면서, 처음의 혼돈 상태를 가로질러 친근성들의 일람표가 점점 명확해진다.
체계는 동식물 구조들 사이에서 등위 관계를 파악하게 해 준다. 방법은 가장 일반적인 동일성과 차이에서 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수직적 종속 관계를 나타낼 수 있다. 실제로 방법은 하나의 주어진 과에서 무엇이 결코 제외할 수 없는 특징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계와 방법의 인식론적 토대는 동일하다. 고전주의 시대의 지식에서 개체에 대한 경험적 인식은 모든 가능한 차이의 연속적이고 가지런하고 보편적인 도표에 의거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 16세기에 동식물의 동일성은 공통의 실증적 표지에 의해 확보되었다(어떤 종은 밤에 사냥하고 어떤 종은 물 위에 산다 등등). 각 종들은 저절로 식별되었다. 종의 구별 기준은 새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아니었다. 17세기부터 모든 지칭은 다른 모든 가능한 지칭과의 어떤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동식물은 다른 것이 아닌 것이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의 경계에서만 스스로 존재한다. 방법과 체계는 차이의 일반적 격자에 의해 동일성을 규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었다.
연속과 파국
자연사는 잘 구축된 언어가 되었지만, 문제가 없진 않았다. 구조가 결코 특징으로 변모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고유 명사에서 보통 명사가 생겨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연사는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흄이 품었던 철저한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이 의심을 피해 갈 수단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18세기에 자연의 연속성은 자연사의 필요조건이었다. 자연에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 일반적 범주를 발견하려는 노력에는 자연의 연속성이 전제되어 있다. 자연이 반복된다는 것, 따라서 구조는 특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연속성’만이 보장할 수 있다. 보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에는 비약이 없다. 자연에서 모든 것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이다. 어느 두 존재물 사이에 빈틈이 있다면, 한 존재물에서 또 다른 존재물로의 이행에 대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러나 자연의 연속은 있는 그대로 경험되지 않는다. 자연의 연속성은 잘게 끊어진 상태이고, 우연이나 무질서 또는 혼란에 불과한 순서로 뒤얽힌 것으로 드러나므로 불명료하다. 자연은 “우연에 의해 서로 가까워진 듯한 존재물들의 어수선한 혼합이다”(아당송).
자연사가 과학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① ‘생물의 연속적 망’. 이는 다양한 공간의 형태를 띨 수 있다. 가령 샤를 보네는 이 이 연속성을 한쪽 끝이 매우 단순하고 다른 쪽 끝이 매우 복잡하며 중심에 좁은 중간 영역, 즉 유일하게 우리 눈에 드러나는 영역이 자리하는 커다란 단선적 등급으로 생각했다. 뷔퐁은 이를 “넓은 망상 조직, 더 정확히 말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옆으로 가지를 뻗쳐 다른 범주의 다발들과 연결되는 다발로” 정의한다. ② ‘사건들의 계열’. 이는 불연속적이고 각각 서로 다른 국면들을 지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시간의 선’이라는 단순한 선으로 구성된다.
종과 속으로 짜인 망의 빈틈없는 지속성과 이 망을 혼란시킨 사건들의 계열은 동일한 인식론적 기반의 일부다. 고전주의 시대에 자연사의 가능 기반도 여기에 있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서로 보완적이며, 어느 한쪽으로 축소될 수 없다. 고전주의적 사유에는 진화론이나 생물변이설의 기미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시간’이 생물의 내부 조직 발달 원리로 이해되기는커녕 생물이 살아가는 외부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격변으로만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기형과 화석
진화론적 사유는 라마르크보다 훨씬 이전에 온전한 형태로 존재했으며, 18세기 중엽 퀴비에에 의해 중단될 때까지 대단히 중요했다고들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분석들은 오늘날 진화에 관한 사유라고 칭해지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 실제로 그 분석들의 의도는 동일성과 차이의 도표를 연속적 사건들의 계열에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 수단은 두 가지였다.
① 모든 생물은 완전한 동시성에 따라 배열되고, 시간에 종속된다. ‘진화’는 첫 번째 요소에서 마지막 요소까지 맞물려 있는 등급의 일반적 ‘변위’를 함축할 뿐이다. 이것이 샤를 보네의 체계다. 그는 진화가 서로 다른 종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한다고 전제한다. “인간이 능력의 탁월성에 더 잘 어울리는 자리로 일단 옮겨 가면, 이전에 우리 행성의 동물들 사이에서 차지한 그 서두의 지위를 원숭이와 코끼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 원승이들 사이에도 뉴턴 같은 존재가 있게 되고, 비버들 사이에도 보방 같은 존재가 있게 된다”(보네). 이러한 ‘진화론’은 생물의 순차적 출현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생물의 끊어지지 않는 평면을 형성하는 법칙을 일반화하는 방식이다.
② 요소들이 잇따라 이어지듯, 시간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특징을 표시하는 심급이다. 마예가 지적하듯, 물고기에 지느러미가 있듯 새에 날개가 있는 것은 최초의 바닷물이 대규모로 밀려가는 시기에 새가 건조해진 만새기였거나 영원히 공중으로 옮겨 가 살게 된 돌고래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의 출현이 지구의 이러저런 사건에 의해 연대순으로 결정된다 해도, 이는 생물의 모든 우연적 형태를 결정하는 변수들의 일람표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선택 논리가 있을 수 있다. ① 형태를 바꿀 생득적 능력이 생물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 ② 더 높은 단계의 복잡성과 완전성으로 향해 나가는 추구 성향이 생물에 있다고 보는 것.
첫 번째 체계의 예는 모페르튀의 체계다. 생물은 우리가 생물에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특징을 연속적 변이를 통해 점차 획득한다. 이를 시간의 차원에서 고찰한다면, 생물이 형성하는 치밀하고 견실한 ‘층’은 훨씬 더 조밀하고 섬세한 연속, 즉 잊혔거나 유산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차이로 짜인 연속의 단편적 결과다. 우리 분석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시적 종은 배경으로서 ‘기형’과 구분된 것이다.
두 번째 체계의 예는 로비네의 체계다. 자연은 단순한 요소들을 점차 조합하고 배열함으로써 복잡한 존재물 쪽으로 나아간다. 자연의 온전한 연속성은 절대적으로 시원적인 원형과 지극히 복잡한 형태 사이에 자리한다. 이 양극단 사이에 복잡성과 조합의 모든 가능한 단계가 있는데, 어느 것들은 항구적 종의 형태로 존속하고 다른 것들은 세상에서 잊혀진다.
이 두 체계는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째, 연속성에 기형을 개입시킬 필요성이 생겨난다. 기형은 자연의 배경 잡음을 형성한다. 기형은 이전의 대홍수, 화산, 대륙 붕괴 등의 문제로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명확히 포착되지 않는 연속성을 보증해 준다. 둘째, 연속성의 징후가 이제는 닮음의 범주에만 속하게 된다. 예컨대 자연의 여정에서 인간의 불완전한 전형을 보여 주는 수많은 화석을 근거로 삼아, 자연이 인간을 원형에서 최종적 형상으로 끊임없이 다듬어 나간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기형과 화석은 매우 분명한 역할을 수행한다. 기형은 차이의 출현을 보증한다. 기형은 느리고 끈질긴 역사에서 생겨나는 변종이다. 화석은 자연이 가로지르는 모든 일탈 현상을 가로질러 닮음을 존속하게 하는 것이고, 동일성의 아련하고 막연한 형태다.
자연의 담론
선험적 여건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가능한 지식의 영역을 경험에 맞추어 마름질하고, 경험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상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고, 일상의 시선에 이론의 역량을 부여하고, 진실한 것으로 인정된 담론을 사물에 행할 수 있는 조건을 확정한다. 18세기의 역사에서 속의 실재, 종의 안정성, 생식을 통한 특징의 전달에 근거를 제공한 선험적 여건이 자연사였다. 자연사는 어떤 가시적 세계를 지식의 영역으로 조직했고, 묘사의 네 가지 변수를 규정했으며, 어떤 개체이건 놓일 수 있는 인접 공간을 설정했다.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는 항구적인 질서의 가능성을 재현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련의 복잡한 조작을 발전시켰다.
자연사는 언어와 동시대적이다. 즉 기억 속의 재현들을 분석하고 공통 요소를 결정하고 기호를 확립하여 마침내 명사를 부과하는 활동과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분류하기’와 ‘말하기’의 기원 장소는 동일하다. 그러나 자연 언어는 에트로 동사의 단조로운 기능에서 파생으로 나아가는 도식을 완결하기 위해 상상력의 작용, 즉 직접적 닮음만을 필요로 하는 반면, ‘분류학’이 가능하려면 자연이 실제로 연속적이어야 하고 충만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언어가 인상들의 유사성을 요구한 바로 거기에서, 분류는 사물들 사이의 가능한 한 가장 사소한 차이라는 원칙을 요구한다. 부단히 이어지는 광범한 종, 속, 강의 도표를 작성하기 위해 자연사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비판하고 분류하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했는데, 이 언어의 가능 조건이 바로 ‘연속’이었다. 사물과 말은 매우 엄밀하게 교차한다. 즉 자연은 명칭의 격자를 통해서만 제시되고, 이 격자는 언어가 온전히 스며든 자연만을 가시적이게 만든다.
아마도 고전주의 시대에 자연사는 생물학으로 확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8세기까지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생명에 관한 말들은 오직 생물의 보편적 분포에 따라 분류학상의 의미로 이해된 ‘특징’이라는 용어에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린네가 말하듯 자연사학자, 자연의 역사가는 “시각에 의해 자연의 부분들을 구별하며 수, 모양, 자세, 크기에 따라 자연의 부분들을 합당하게 묘사하고 명명한다.” 자연사학자는 생명이 아니라 구조화된 가시적 세계와 독특한 명칭을 다루는 사람이다.
따라서 고전주의 시대의 자연사를 생명의 철학과 결부시켜선 안 된다. 자연사는 말의 이론과 교차한다. 자연사는 일상의 어휘를 뛰어넘지만, 참된 명칭을 사물에 부여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언어의 공간에 자리한다. 자연을 인식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언어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하고 어떤 한계 내에서 유효할 수 있는가를 드러낼 참된 언어를 언어로부터 구축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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