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말과사물 / 미셸푸코 / 10인문과학 / 2017.8.13.() / 닥홍

 

170813 말과사물 10장 5-6절 푸코 발제닥홍.hwp

5. 정신분석학, 민족학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은 우리의 지식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에 관한 모든 인식의 경계에서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이 경험과 개념의 고갈되지 않는 확실한 보고, 특히 다른 관점에서는 후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관심, 검토, 비판, 논쟁의 영속적인 원리를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책무는 의식을 가로질러 무의식의 담론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정신분석학은 재현과 유한성의 관계가 작용하는 기본 영역으로 나아간다. 다시말해 뒤돌아 무의식 쪽으로 나아가면서도 여전히 재현 가능한 것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인문과학과는 달리, 정신분석학은 진전을 이룩하면서 재현을 건너뛰고, 유한성 쪽으로 재현을 벗어나며, 따라서 규범을 지니고 있는 기능, 규칙으로 가득 찬 갈등, 체계를 이루는 의미 작용이 기대되던 바로 거기에서 체계, 규칙, 규범이 존재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솟아오르게 한다.(510)

민족학은 사건들의 연속보다는 오히려 문화의 구조적 상수를 연구한다. 민족학은 사실상 심리학이나 사회학 등의 분석에 의해 드러날 수 있는 것과 같은 경험 내용을 지각하는 주체의 역사적 실증성에 경험 내용을 관련짓지 않고, 그 대신 각 문화의 특이한 형태, 각 문화를 다른 문화들에 맞세우는 차이, 각 문화를 규정하고 일관성 있게 둘러싸는 한계를 세 가지 중대한 실증성(생명, 필요와 노동, 언어) 각각에 대한 각 문화의 관계가 맺어지는 차원에 배치한다. 가령 민족학은 주요한 생체 기능들의 표준화, 교환과 생산 그리고 소비의 모든 형태를 가능하거나 필수적이게 만드는 규칙, 언어 구조의 모델을 중심으로 또는 이 모델에 의거하여 조직되는 체계가 하나의 문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보여준다.(514)

민족학과 정신분석학에 의해 담론의 공간에서 번쩍거리게 되는 것은 오히려 모든 인간 과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선험적 여건, 이를테면 오히려 모든 인간 과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선험적 여건, 이를테면 서양의 에피스테메에서 인간의 윤곽을 드러내고 인간을 가능한 지식의 대상으로 배치한 중요한 중간 휴지, 깊은 주름, 분할선이다.(515)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의 발전에는 특별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이 거의 보편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인간의 일반 개념에는 근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들에 의한 인간 관념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소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둘은 인문과학에 비해 대항과학인데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이 인문과학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이해하고 인문과학 자체의 인식론적 토대로 다시 이끌어 가며 인문과학을 통해 실증성을 획득하고 회복하는 바로 그 인간을 끊임없이 해체한다는 의미이다.

개인의 층위에서 분석을 통해 밝힐 수 있는 것을 비록 더 큰 규모로이지만 찾아낼 것이며 신화의 담론을 유의미하게 만들고 욕구를 규제하는 규칙에 일관성과 필연성을 부여하고 실제의 물건과는 다른 방식으로 순수한 생체 기능과는 다른 곳에서 생활 규범의 근거를 제공하는 형식상의 구조들 전체를 문화 무의식들의 체계로 규정할 것이다.(517)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구성하는 연쇄는 형식적 체계와 수직을 이루는데, 이 체계로부터 한 문화의 의미작용이 조직된다. 이후에 민족학과 정신분석학에 형식의 모델을 제공할지 모르는 순수한 언어 이론의 주제가 형성된다.(518)

언어의 문제가 그토록 강렬한 다원적 결정에 따라 다시 솟아오르고 인간의 형상을 사방으로 포위하는 듯한 이 지점에서 오늘날의 문화는 문화의 현재에, 어쩌면 문화의 미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대의 에피스테메, 18세기 말 무렵에 형성되었고 아직도 우리의 지식에 대해 확실한 근거로 구실하는 것, 인간의 특이한 존재 방식과 인간을 경험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을 구성한 것, 이 에피스테메 전체는 담론과 담론에 의한 단조로운 지배의 사라짐, 언어가 객관성 쪽으로 기울어지는 점진적 변화, 그리고 언어가 복합적인 형태로 재출현하는 사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사유해야 하지만 아직은 사유할 수 없는 단일성 속에서 이 동일한 언어가 오늘날 점점 더 끈질기게 솟아오르는 것은 이 지형 전체가 이제 막 동요하리라는 징후, 그리고 언어의 존재가 우리의 지평에서 더 강렬하게 빛남에 따라 인간은 사라지고 있는 중이라는 징후가 아닐까?(524)

언어가 다시 현존하므로, 인간은 예전에 자신이 담론의 강압적인 단일성에 의해 계속 잠겨 있던 그 잔잔한 비존재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가 재현의 내부에 위치하고 이를테면 재현 속에서 용해된 후에, 파편화를 대가로 치르고서만 그 상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구성되었다. 즉 인간의 형상은 파편화된 언어의 갈라진 틈들에서 형성되었다. 물론 이는 단언이 아니고 기껏해야 대답이 가능하지 않은 물음일 뿐이며, 따라서 제기되는 바로 거기에 미결 상태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 물음에 제가할 가능성에 의해 미래의 사유가 열릴지 모른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525)

 

6. 결론을 대신하여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인간은 지식에 제기된 가장 유구한 문제도 가장 지속적인 문제도 아니다. 동일자의 그 깊은 역사가 내보이는 모든 국면 중에서 150년 저에 시작되었고 어쩌면 이제 종결되고 있는 중일 단 하나만이 인간의 형상을 출현하게 했다. 이것은 근본적인 지식의 배치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였다.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에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그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지기에 이른다면,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이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하다고만 예감할 수 있을 뿐이고 지금으로서는 형태가 무엇일지도,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