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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인문과학
지식의 3면체
근대적 사유 이후 인간은 두 가지 역할을 떠맡는다. 첫째, 인간은 모든 실증성의 바탕을 이룬다. 둘째, 경험적 사물의 고유 영역에 현존한다. 이 둘은 19세기부터 우리 사유의 거의 자명한 토대 구실을 하는 ‘역사상의 선험적 여건’이다. 경험적 실체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담론의 자료집, 곧 ‘인문과학’은 여기에 바탕을 둔다.
19세기 인문과학은 그 이전 시기 사유의 문제들을 이어받지 않았다. 17~18세기에는 어떤 철학도, 어떤 정치적∙도덕적 선택도, 어떤 경험과학도, 인간의 육체에 관한 어떤 관찰도, 감각이나 상상 또는 정념의 어떤 분석도 ‘인간’과 마주치지 않았다. 인간은 (생명, 언어, 노동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문과학은 인간이 사유되어야 할 것이자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었을 때 출현했다.
물론 인문과학의 각 분야는 이론적∙실천적 범주의 문제나 요구 또는 장애에 의해 생겨났다. 가령 19세기 동안 심리학이 과학으로 성립하는 데는 산업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문과학의 구성을 이러저러한 준거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과학의 대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각 지식의 영역이 완전히 동질적이었다. 모든 인식은 차이의 확립에 의해 정돈을 실행했고 질서의 정립에 의해 차이를 규정했다. 이는 수학, 분류학, 자연과학, 그리고 막연하고 불완전한 인식부터 길고 정연한 철학적 사유에 공히 적용됐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인식론의 장은 파편화된다. 근대 에피스테메는 세 가지 차원으로 열린 방대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한 차원에는 수학과 물리학이 위치한다. 여기서 질서는 명백하거나 입증된 명제들의 연역적이고 단선적인 연쇄로 나타난다. 또 다른 차원에는 언어, 생명,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과학이 있다. 불연속적이지만 유사한 요소들을 서로 관련짓고 그들 사이의 인과 관계와 구조적 상수를 확립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두 차원 사이에 공통의 평면, 즉 고찰 방향에 따라 경험과학들에 대한 수학의 적용 분야 또는 언어학, 생물학, 경제학에서 수학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보이는 평면이 자리한다. 바로 이 세 번째 차원에서 철학적 반성, 언어학과 생물학과 경제학, 생명과 소외된 인간과 상징적 형태의 철학, 그리고 각 영역별 존재론이 출현한다.
인문과학은 이 인식론적 3면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문과학이 자리하는 곳은 바로 이 지식들 사이의 벌어진 틈이므로, 인문과학은 이 3면체에 포한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인문과학의 위치를 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 또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아마 3차원 공간 안에서의 이 흐릿한 산포 때문일 것이다.
연역적 과학, 경험적 과학, 철학적 반성이 각각의 고유한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인문과학의 불순함에 오염될 위험이 없지만, 각 사유가 엄밀하게 결정된 평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인문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로부터 ‘심리학주의’나 ‘사회학주의’ 또는 한 마디로 ‘인간학주의’라고 불리는 위험이 생겨난다. ‘인간학으로의 편입’은 오늘날 지식 내부의 커다란 위험이다.
인문과학의 형식
이 실증성의 형식을 소묘해 보자. 이 경험적 지식의 형태가 수학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맞다. 인문과학도 몇몇 조건 아래 수학의 도구를 이용할 수 있고, 몇몇 방식과 결과는 형식화될 수 있다. 그러나 수학과의 관계는 인문과학의 특이한 실증성을 잘 보여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출현과 인문과학의 성립은 탈수학화의 상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수리물리학의 커다란 발전, 확률론의 대대적 활용은 계량화할 수 없는 영역의 일반 과학을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일이 포기된 시기부터 가능해지지 않았을까? 마테시스가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포기됨으로써 지식의 몇몇 영역에서 질(質)이라는 장애물이 제거될 수 있었고 수학의 도구가 아직 활용되지 않는 곳에서 이 도구의 적용이 가능해졌다. 예컨대 생물학은 수학을 활용했고, 수학은 과거보다 훨씬 더 폭넓게 생물학에 적용됐다. 그러나 생물학이 자율성을 획득하고 생물학 특유의 실증성이 명확하게 규정된 것은 수학과 생물학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였다. 생물학은 양적 영역들의 과학을 벗어나 기관과 기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 구조와 균형에 관한 연구, 개체 또는 종의 역사적 형성과 발달에 대한 탐구로서 성립되었다.
인문과학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지식의 대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수학의 전진이 아니라 마테시스의 후퇴이고, 이 영역의 출현을 외부에서 결정한 것은 노동과 생명과 언어의 자율적 개별화이며, 여기에 특유의 형세를 부여한 것은 이 경험적-선험적 존재, 사유와 사유되지 않은 것이 한없이 얽히는 이 존재의 출현이었다.
인문과학의 본질을 규정하려 할 때 난점은 수학이 아니라 ‘유한성의 분석론’과 ‘경험과학’들의 차원에 놓여 있다.
사실상 인문과학은 살아가고 말하고 생산하는 인간을 겨냥한다. 인문과학은 생명, 노동, 언어가 문제인 과학들의 근방, 경계, 범위 전체에 걸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물학이나 경제학이나 문헌학이 인문과학의 으뜸가는 분야나 기본적인 분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예컨대 인문과학의 대상은 결코 생물학적 작용의 존재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인문과학에서 인간은 아주 특별한 형태를 갖는 생물이 아니라, 자신이 온통 속해 있고 자신의 존재 전체로 스며드는 생명의 내부로부터 재현들을 구성하는 생물이다. 즉 재현들 덕분에 인간은 살아가고, 재현들로부터 인간은 생명을 상상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보유한다. 마찬가지로 인문과학의 대상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로 둘러싸인 가운데 언어의 내부로부터 자신의 하는 말이나 명제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말하면서 재현하고 마침내 언어 자체의 재현을 스스로 마련하는 존재다.
즉 인문과학은 인간이 본래 무엇인지를 묻는 분석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가고 일하고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무엇인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생명이란 무엇인지, 노동의 본질과 법칙은 무엇에 있는지, 이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를 무엇이 이 동일한 존재로 하여금 알게 하는지 등의 물음으로 확장되는 분석이다. 인문과학은 인간이 인식하는 사물과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관련될 수 있고, 인간의 존재 양태를 실제로 결정하는 사물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유한성의 분석론’ 쪽으로 생명, 노동, 언어의 과학을 은밀하게 이끈다. 요컨대 인문과학을 특징짓는 것은 인문과학이 어떤 내용(인간)을 겨냥한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형식적인 특징, 즉 인간이 대상으로 주어지는 과학에 대해 인문과학이 이중화나는 입장에 있고, 더구나 인문과학에서는 이 이중화가 유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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