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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진실을 말할 의무’와 ‘모두 말하기’의 역사

나는 꽤 오래전부터 ‘진실을 말할 의무’라는 문제를 연구해 왔다. 의학적 실천과 정신의학적 실천 속에서, 19세기 초부터 정신의학의 거대한 의식 내부에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할 의무가 침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법적 실천 혹은 형사적 실천, 성 현상의 문제(특히 그리스도교 내부에서의 욕망과 육욕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문제와 마주쳤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고해성사의 속죄 형식, 고백 형식은 12세기 즈음에 정립된 제도에 속한다. 그런데 4~5세기에는 고해성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할 의무의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현시할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할 의무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현시할 의무는 ‘속죄 의식’에 속했다. 옷차림, 단식, 시련,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교회 문 앞에서 애원하는 태도 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극화하는 행위 등을 이에 해당한다. 반면, 이 속죄 의식과 다른 실천이 모든 수련수사 및 수사들에게 부과되었다. 수사는 지도자에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자기 사유의 모든 운동들, 자기의 욕망이나 색욕의 모든 움직임을 털어놓아야 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의무라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죄의 고백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말할 의무이지 ‘모든 것’을 말해야 할 의무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이 의무는 4~5세기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도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이 의무는 16~17세기에 꽃피우게 되는 의식 지도 내에서 다시 재발견된다.

바로 이 ‘모두 말하기’의 역사, 자기 사유의 움직임을 모두 말할 의무라는 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할 의무’의 실천 토대를 그리스-로마 철학에서 재발견해 보려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파레시아라는 개념과 만나게 된다. 파레시아는 어원적으로 ‘모두 말하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제정기 그리스-로마 철학 내에서 파레시아는 제자가 아니라 반대로 스승에게 부과되는 의무였다. 즉 그리스-로마 철학 내에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의무는 스승, 인도자, 지도자의 계율이었다. 이는 이들이 자기 돌봄을 위해 필요한 ‘타자’였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조건에서만, 그리고 자기 돌봄에서의 타인, 파레시아의 의무를 지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조건에서만 자기를 배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폴뤼비오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저작에서 파레시아

이와 관련해 제정기 첫 두 세기의 텍스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폴뤼비오스의 ≪히스토리아≫. 여기서 폴뤼비오스는 아카이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체제가 세 가지 특징을 띤다고 말한다. 데모크라티아, 이세고리아, 파레시아가 그것이다. 데모크라티아는 데모스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권력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세고리아는 책무 분배상의 평등을 말한다. 그리고 파레시아는 만인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여기서 발언은 정치적 장에서 자기 자신과 의견을 단언하는 행위로서 발언을 의미한다.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에우리피데스의 저작을 살펴보자. “낳아준 어머니를 찾지 못한다면 제 인생은 살 가치가 없어요. 아버지, 제가 더 바라도 된다면, 저를 낳아준 어머니가 아테나이 출신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머니로 인해 발언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이방인이 혈통이 순수한 도시에 가게 되면, 이름만 시민이지, 그의 말은 노예의 말이고, 그에게는 발언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지요”(≪이온≫, 669~675행). 여기서 파레시아가 ‘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레시아는 시민권과 연결된 권리다. 그리고 이 권리는 ‘모계’ 쪽에서 획득된다. 

≪히폴뤼토스≫에서는 이상의 주제에 대한 흥미로운 변조가 등장한다. “그 애들은 자랑스러운 아테나이 시에서 자유롭고 떳떳하게 살아야 해요. 어머니에 관한 한 명성을 누리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비행을 알게 되면, 아무리 대담무쌍한 사람도 노예가 되고 말지요.” 파레시아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저지른 과오에 의해 얼룩지고 만다. 윤리적 결함은 파레시아를 잃게 만든다. 

≪포이니케 여인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 장면이 나온다. “추방된 자들에게 괴로운 점이 뭐지?” “가장 나쁜 점은 발언의 자유(파레시아)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노예의 운명이로구나. 제 생각을 말할 수 없다니 말이야.”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참고 견뎌야 하니까요.” “바보들과 함께 바보짓을 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 파레이사를 갖지 못한 자는 주인의 우둔함, 주인의 광기에 복종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파레시아는 어리석고 미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맞서 이성이나 진실과 같은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는 기능을 의미한다. 

≪박코스 여신도들≫에서는 조금 다른 상황이 나온다. 사자는 펜테우스 왕에게 박코스 여신도들의 무절제를 전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유롭게 말씀드려도 되는지, 아니면 제 혀를 억제해야 하는지 듣고 싶나이다.” 그러자 펜테우스 왕이 대답한다. “말해보아라.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처벌하지 않겠다. 올바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 여기서 사자는 자기 나라 안에서 발언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이 아니며, 또 그는 나쁜 소식을 전하러 온 자다. 그는 발설을 두려워하면서 파레시아의 혜택을 받게 해달라고, 즉 자유롭게 말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페테우스 왕은 그에게 자유의 공간, 말할 권리의 공간을 열어 준다. 즉 주인인 자는 주인 아닌 자에게 주인을 상처 입힐 수도 있는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하며, 이를 위해 주인 아닌 자를 벌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두겠다고 약속한다. 말해진 바와 그것을 말한 자를 분리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파레시아

이상의 네 구절은 파레시아의 몇몇 테마가 정치적 권리 행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플라톤의 구절에서도 이와 연관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국가≫. 여기서 민주정 체제하의 도시국가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각자는 자기가 원하는 삶의 양태를 선택할 수 있고, 자기만의 삶의 양식을 구축할 수 있다. 이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반한다. 즉 파레시아는 민주정 도시국가의 특징 중 하나다.

≪법률≫에서는 절제된 군대식 군주제(키루스 왕의 정치체제)를 다루면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키루스 군주정에서 병사들은 군의 지휘에 일정 부분 참여했고, 왕 자신이 자기 주변에서 자기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는 군주제가 엘레우테리아(자유), 필리아(우정), 코이노니아(공동체)라는 특징을 띠게 해 주었다. 

≪법률≫의 다른 부분에서는 정념의 제어와 관련해 ‘도덕의 스승’의 필요성이 언급되는데, 여기서 도덕의 스승은 파레시아를 통해 다른 모든 사람을 제압하는 사람, 무엇이 폴리테이아(정치체제)에 부합하고 무엇이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만인에게 지시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파레시아는 시민의 권리이자, 진실을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군주의 합리적 통치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고르기아스≫에서 파레시아는 조금 다른 의미를 띤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영혼의 시련과 시금석 구실을 한다. 만약 영혼은 자기 의견이 어느 정도 진실한지 알 수 있는 시금석으로 다른 영혼, 특히 에피스테메(지식)와 에우노이아(호의)와 파레시아(솔직함)를 갖춘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한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이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한다.


문채와 정치적 사유에서 파레시아

이처럼 파레시아 개념은 사실상 언제나 어떤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1~2세기의 텍스트를 살펴보자.

첫째, 문채의 영도와 관련된 파레시아. 퀸틸리아누스는 ≪웅변교수론≫의 9권 2장에서 가장하지도 않고 위장하지도 않으면서 기술이나 기교 없이 청중의 감동을 증대시키는 문채를 다룬다. 이와 관련해 퀸틸리아누스는 ‘오라티오 리베라’, 즉 특별한 문채도 없는 사유의 외침, 사유의 직접적 표현을 그리스인들은 파레시아라 불렀다고 말한다.

둘째, 정치적 사유 내에서 파레시아의 용례. 파레시아는 공국과 군주제와 전제정치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사적 권력 행사 및 매우 강력한 불평등 구조와 결부되어 있다. 파레시아는 일종의 자유, 군주나 부유한 자나 강자가 동의하고 양도한 자유가 된다. 이 자유는, 군주가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자유다. 파레시아는 훌륭한 군주의 기준이고, 탁월한 통치의 기준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권력의 위임이나 권력에의 참여와 관련된 자유가 아니다. 군주는 타인에게 ‘군주 자신의 영혼에 권력을 행사할 자유’를 준다. 정치적 파레시아가 행사되는 지점은 정치적 행위 영역이 아니라 군주의 영혼이다. 이러한 파레시아는 특정 유형의 정치 구조, 궁정의 정치적 형식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 18세기까지 유럽에서 군주에게 충언하기 위한 발언의 자유라는 문제가 정치적 문제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만인의 표현 자유라는 문제가 제기되기 전에, 궁정이라는 공간에서 솔직히 말할 권리의 문제가 주된 정치적 문제였다.

그러나 이상과 다른 정치적 맥락이 있다. 그것은 수사학의 문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 지도’의 문제다. 의식 지도에서 파레시아 문제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분석된 적이 없다. 만약 철학적 실천이 자기 돌봄의 훈련 또는 수련을 보장하는 원리와 규칙 그리고 테크닉의 총체라면, 그리고 만약 자기 돌봄이 타인과 타인의 담론들을 필요로 한다면, 나에 대한 행위와 나에 대한 행동으로 여겨지는 타인의 담론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일까? 나는 이 담론의 특징은 파레시아이고, 또 파레시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리아노스와 갈레노스의 저작에서 파레시아

이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먼저 에픽테토스의 ≪대화록≫을 소개하는 아리아노스의 텍스트. 아리아노스는 에픽테토스의 디아노이아(사유의 움직임)와 파레시아를 알기기 ≪대화록≫를 편집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또 ≪대화록≫의 불완전한 판본이 다수 유통되고 있어 자신의 노트인 ‘후포므네마타’를 엮어 출판하게 됐다고 밝힌다. 후포므네마타는 철학자의 말을 받아 적는 노트를 다시 베껴 적어 놓은 것이다. 이 사본들은 수련 노트의 성격을 띠는데, 후포므네마타는 정기적으로 다시 읽혀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승의 말이 끊임없이 재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본인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인데, 지금 그것을 명상하고, 재현동화하고, 끊임없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쓰고, 읽고, 수련해야 한다.” 아리아노스의 목적은 에픽테토스가 다른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끼쳤던 방식을 투명하게 전승해 지금의 독자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수사학적 형식들 및 전통적 글쓰기와 단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파레시아가 그 자체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정념들의 치료에 관한 논고≫ 첫 부분에 나오는 갈레노스의 텍스트. 여기서 갈레노스는 우리가 자기 자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선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려면 지속적인 수련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실천은 스스로 관리하기 어려우며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갈레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첨꾼이 아니라는 평판을 가진 누군가에 대해 듣게 되면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그가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위해 몇 가지 검증을 수행하고, 그가 진신을 말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에게 우리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를 묻고,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단점과 장점을 설명한 후,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도록 하자.” 그리고 갈레노스는 화를 잘 내는 친구를 인도하고 치유한 사례를 곁들인다. 여기서 파레시아가 자기 돌봄, 아스케시스(수련), 아첨, 분노와 연결된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식 지도 실천에서 파레시아

그렇다면 의식 지도에서 파레시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까. 

첫째, 파레시아는 아첨과 대립한다. 아첨은 고대 전반의 윤리에서, 특히 정치적 윤리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아첨은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의 핵심에 놓인 개념이다. 예컨대 고대 윤리에서 분노는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 격분하는 자의 행동이며, 아첨은 그 분노가 역전된 태도이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 자의 호의를 이끌어내려는 행동이 아첨이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아첨에 저항하고, 아첨을 제한하며, 아첨에 반격을 가한다. 

반-아첨으로서 파레시아는 파레시아는 델포이의 가르침, ‘그노티 세아우톤(너 자신을 알라)’와 연관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라는 텍스트에서 아첨꾼이 이 델포이의 격언을 공격하는 자라고 말한다. 아첨꾼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다. 

그런데 한편으로 파레시아스트는 타인에게 그 자신과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매 순간 혹은 타인이 필요로 할 때마다 그 타인의 소관인 것과 소관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파레시아스트는 보편적 인간이 무엇이고, 세계의 질서가 무엇인지, 사물들의 필연성은 무엇인지 말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성, 퓌지스를 아는 아는 자는 환상들을 소거하고, 두려움을 없애주며, 공상들을 추방하고, 인간에게 그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파레시아스트일 수 있다. 

둘째, 파레시아는 ‘형식의 자유’를 특징으로 한다. 파레시아스트는 수사학 규칙과 철학적 논증 규칙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논증에 반대하고, 증거의 엄정성에 반대하며, 개인들에게 이것은 진실이고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식하도록 강제하는 데에도 반대한다. 

세네카의 텍스트에 따르면, 파레시아의 전제 조건은 대화, 대화의 기술이다. 정확하게 말하고, 타인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말하며, 수사학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말하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효과들을 과장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대화 속에서 실현된다. 

왜 파레시아는 수사학, 철학적 논증, 독설이 아닌 대화의 형식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파레시아가 영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카이로스(적기), 즉 개입에 적절한 시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이 과거에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숙고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재발견하게 해 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성적 사유의 필요성을 강요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카이로스, 즉 카이로스가 나타날 때 그에게 말해야 하는 바를 말하기 위해 그 적기를 포착하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파레시아는 치료의 기술을 닮게 된다. 치료술, 조타술, 통치술, 정치술, 카이로스의 기술, 그리고 파레시아는 타인의 의식을 인도하는 자가 그에게 적절하게 말하기 위한 카이로스를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때 파레시아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테크닉에 그치지 않는다. 파레시아는 언제나 두 항을 갖는 작용이다. 인도를 행하는 지도자 측이 파레시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파레시아는 두 사람 사이의 작용이므로 각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파레시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 또한 파레시아를 받아들일 능력을 갖추고, 또 이에 대해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파레시아스트에게 보내야 한다. 즉 말하는 기술에 듣는 능력이 조응한다. 타자가 특정한 몇몇 신호를 주지 않으면 파레시아, 다시 말해 타인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스승의 역동적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어떻게 알아볼 것이냐’라는 문제다. 플루타르코스는 ‘진짜로 위험한 아첨꾼’은 파레시아스트와 가장 닮아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파레시아스트처럼 타인에게 가혹한 것, 불쾌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아첨꾼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플루타르코스는 다음 기준을 제시한다. 실존의 선택, 근본적 의지 등등의 범주에서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주체의 프로아이레시스(유사)와 파레시아스트 자신의 프로아이레시스 간의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파레시아스트는 언제나 동일한 것에 기뻐해야 하고, 동일한 것에 동의해야 한다. 호불호 체계, 판단 체계가 영속적이어야 한다. 셋째, 파레시아스트는 유일하고 동일한 파라데이그마(원형, 모델)를 향해 자시의 삶을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들은 다음 두 개념과도 연관된다. 하나는 호모노이아, 즉 우정이다. 진정한 우정의 토대는 상사, 유사성이고, 그러므로 파레시아스트는 근본적으로 친구다. 다른 하나는 스툴티티아, 즉 무질서하고 유동적 영혼의 복수성에 반대되는 실존의 단일성이다.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는 언제나 변함없는 선택을 하는 자, 삶의 유일한 도식을 전적으로 견지하는 자다. 반면 비-파레시아스트(아첨꾼)은 행동하는 데 정해진 규칙이 전혀 없는 사람이며, 때로는 이 사람을, 때로는 저 사람을 본보기로 삼는 자이다. 아첨꾼은 고정되거나 견고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고, 자기 고유의 것도 없으며, 자기 고유의 파토스를 통해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일도 결코 없는 자다. 요컨대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고유의 파토스를 가진 자, 동일한 삶의 규칙을 가진 자, 언제나 동일한 삶, 말, 섭생, 식이요법, 식사법을 가진 자다. 그렇기 때문에 파레시아스트는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자, 즉 자기 실존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려는 자에게 고정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


파레시아스트와 스승-제자 관계

결론적으로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 고유의 삶의 방식이 그의 말 속에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드러나 어떤 모델로 현정하게 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세네카의 편지 75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말로 하기보다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고 싶군.” “서로 의논을 할 대도 발을 쿵쿵 구르지도, 손을 쭉 뻗지도, 마루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그런 일들은 변론가들에게 모두 맡겨둔 채 내가 느끼는 온갖 것들을 자네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그것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비하하진 않겠네.”

요컨대 파레시아의 핵심에는 ‘스승의 파레시아’가 있다.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인도를 믿고 맡기는 스승, 그 어떤 수사학도 방해하지 못할 정도로 투명하게 자기가 사유한 바를 말하는 스승의 파레시아가 있다. 하지만 이는 스승이 자기가 가진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한다거나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말한다는 의미에서의 파레시아가 아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의 선택, 그의 프로아이레시스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의 파레시아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선택을 가장 투명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 것을 보장한다. 여기서 개별적 계약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내게 솔직하게 말하기를 요구하는 네게 내가 조언을 할 때, 내가 보기에 진실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네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가 실제로 나 자신인 한에서만 진실을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말한 것의 진실에 결부되어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여야 한다. 파레시아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진실에 자신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단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단언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말에 결부될 때, 두 대화 상대자 모두 솔직한 파레시아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영혼들의 상호적 열림’이라는 주제는 세네카의 편지들을 관통하며, 이후 그리스도교에서 전개된 파레시아 중 하나도 여기에 기초한다. 즉 파레시아는 점차 양측 모두의 의무와 같은 것이 된다. 그 의무 속에서 두 영혼은 말해지는 진실과 그들 자신의 경험, 그들 자신의 결점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류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털어놓는다. 이는 플라톤적이거나 소크라테스적 게임과는 매우 다르며, 이후에 그리스도교 영성과 수도원 제도에서 발견되는 것과도 매우 다르다. (끝)


발제_담론과 진실_파레시아_호섭이_17090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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