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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_담론과 진실_호섭이_170924.hwp

≪담론과 진실≫, 여섯 번째 강의


1.

‘개인적 관계’라는 틀에서 파레시아를 분석해 보자.

우선 플루타르코스의 예.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라는 논고는 다음 질문에 답하려 한다. 어떻게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파레시아스트와 아첨꾼을 구별할 수 있을까? 

이 논고는 먼저 파레시아스트를 곁에 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어떠한지 끊임없이 착각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첫 아첨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자기와 자기의 이런 관계를 끊기 위해 우리는 파레시아스트가 필요하다. 

이어서 플루타르코스는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알아보는 기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말과 행동의 일치 여부다. 둘째, 파레시아스트라고 추정되는 사람의 선택과 견해 그리고 사유상에서의 항구성, 연속성, 안정성, 불변성이다. 

이처럼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는 두 가지 화두를 토대로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자기에 대한 환상’라는 주제는 헬레니즘과 제정 시대 문화에서 점차 중요해진다. 둘째, 정신의 안정성, 불변성은 삶에서 아주 중요하고 귀중하다.

이 두 화두, 즉 자기에 대한 환상을 타파하는 것과 정신의 불변성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같은 곳에 머물게 될 것이고,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아무 자극에나 다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에 좌지우지되고, 결국 우리 자신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소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

다음으로 갈레노스의 예. 의사였던 갈레노스는 영혼의 정념과 이를 돌보는 방법을 글로 남겼다. 플루타르코스와 마찬가지로 갈레노스는 자기에 대한 모든 환상의 뿌리가 자기애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이 환상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파레시아스트가 친구나 지인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파레시아스트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좋은 파레시아스트는 우리는 미워하지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 중립적인 사람이다. 

물론 그가 정말로 좋은 파레시아스트인지 알려면 몇 가지 기준에 근거해 확인해 봐야 한다. 평판이 좋은가? 충분히 나이를 먹었는가? 충분히 부자인가? 등등. 예컨대 그가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부유하다면, 그는 나에게 아첨하는 데 흥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갈레노스 자신이 의사이고, 또 의사로서 종종 정념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레시아스트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 자신과 관련된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는 우리의 정념이 치유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파레시아스트로 추정되는 사람의 평판, 나이, 재산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를 시험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져 그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봐야 한다. 그가 우리를 칭찬하기만 하고 엄격하지 않다면, 그를 의심해야 한다. 

이처럼 갈레노스의 텍스트에서 흥미로운 점은, 첫째로 파레시아와 우정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둘째로 파레시아스트를 시험하는 절차가 있다는 것이다.


3.

이 두 텍스트를 염두에 두면서 사적 관계, 즉 두 개인 간의 관계라는 틀에서 기원후 첫 두 세기의 파레시아 게임의 변화를 정리해 보자.

첫째, 고전적 파레시아 개념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할 만큼 충분히 용기 있다는 사실이 진실 게임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파레시아 게임은 자기가 자신에 관한 진실을 드러낼 만큼 충분히 용기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둘째, 이 새로운 파레시아 게임은 그리스인들이 아스케시스라 부르던 것과 연관된다. 아스케시스는 실천적 훈련의 모든 유형을 가리킨다. 이 아스케시스는 그리스도교적 금욕과는 다른데, 그리스도교적 고행의 궁극 목표가 자기 포기인 반면 그리스-로마 철학에서 아스케시스는 자기 자신과 맺는 소유 관계와 지배 관계를 공들여 만들어 내는 것으로 목표로 삼는다. 또 그리스도교적 금욕이 세계에 대한 관조(무관심)를 주제로 삼는 반면, 그리스-로마의 철학 수련은 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준비, 지식, 장비를 갖추는 데 전념한다. 

셋째, 이 아스케시스는 다수의 상이한 형태의 훈련과 관련되었다. 이와 관련해 죽음, 삶, 세계, 필연성, 시간 등등을 고찰하는 그리스-로마 텍스트는 각 주제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아니라 영적 수련을 위한 도식과 모형을 제시한다. 즉 이들 텍스트는 윤리의 토대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자기 품행의 항구적 모형을 만들기 위해 거듭 읽고 명상하고 습득해야 하는 수련을 처방하는 실천적 작품들이었다.


4.

이상의 내용을 전제로 ‘수련’ 혹은 ‘자기 점검’ 문제를 논해 보자. 

먼저 세네카의 ≪분노에 관하여≫의 예. 이 텍스트에 나오는 수련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잠이 들기 전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하루 동안 저지른 오류들을 회상하고 점검했다. 그 목표는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이 수련법은 에피쿠로스주의, 스토아주의, 견유주의 등 여러 학파들과 철학적 운동들에서 꾸준히 실천되고 재평가받았다. 더 나아가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실천과도 연관된다. 그러나 세네카의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변별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세네카의 태도가 흥미롭다. 잠들기 전에 하는 자기 점검은 일견 사법적 실천 혹은 그리스도교적 고백과 유사한 듯하다. 잘못이 고백되고, 피고인이 있으며, 사법적 어휘와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나 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세네카는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판사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행정관 입장에 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치 어떤 작업이 행해졌을 때나 회계 장부를 작성할 때 혹은 한 해의 일이 끝났을 때, 계산하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하여 모든 것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는지 보는 사람의 역할을 취한다. 즉 세네카의 자기 점검은 사법적이라기보다는 행정적이다. 

둘째, 세네카가 회상하는 과오들은 우리가 흔히 ‘죄’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거나 성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등의 문제를 고백하지 않는다. 한 예로, 그는 자기가 누군가를 비판했을 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비판이 그 사람을 바로잡는 대신 상처만 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고백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오류’다. 오류는 목적과 수단이 잘못 조정된 것이다. 즉 세네카는 자기가 생각해야 했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꾸짖고 있다.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품행에서의 오류, 자신이 아는 원리와 자신이 채택한 품행 사이에 합리적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문제인 것이다.

셋째, 세네카는 자신을 벌하지 않는다. 여기에 고행, 속죄는 없다. 미래를 위해 유용한 품행의 몇몇 실천 원리를 재활성화하려는 목적으로 오류를 회상할 뿐이다. 즉 자기 점검의 목표는 책임을 분석한다거나 죄책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에서 정화되는 것 역시 목표가 아니다. 자기 점검은 미래 품행의 모형으로서의 특정한 규칙을 더 생생하고 능동적이며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재활성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행정적 조사, 행정적 감독이다. 


5.

다음으로 세네카의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의 예. 이 텍스트는 ‘도덕 상담’ 장면으로 시작한다. 네로 치하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세레누스가 세네카에게 도덕적, 철학적 조언을 구한다. 세레누스는 자신이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느낌, 제자리에 멈추어 버린 듯한 느낌에 휩싸였고, 세네카와의 상담을 통해 자기가 한 일 혹은 자기인 바를 점검하려 한다.

세레누스는 이 상담을, 치유를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일종의 의학 상담으로 간주한다. 또 자신의 거북한 감정을 선박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상황에 빗댄다. 즉 세네누스의 문제는 ‘어떻게 내 정신의 불안정성과 유동성 때문에 흔들리는 이 운동을 다른 운동으로, 나를 육지로 인도해 줄 운동으로 바꿀 있을까’다. 

이후 세레누스는 그가 사랑하는 것, 그를 기쁘게 하는 것, 또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나열한다. 그 과정에서 첫째, 자신이 부, 재화, 가정생활, 사생활, 사는 집 등과 맺는 관계, 둘째, 공적인 삶, 정치 이력과 맺는 관계, 셋째, 문학적 활동과 맺는 관계를 표현한다. 이는 세 개의 활동 영역, 사적 삶, 공적 삶, 불멸과 연관된다.

사적 삶 영역과 관련해 세레누스는 자기가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하기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등을 설명한다. 이 모든 서술은 실증적이다. 자신은 대단한 것을 원하지 않으며, 사치에 집착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어서 공적 삶 영역과 관련해서는 대단한 정치 이력을 쌓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며, 불멸과 관련해서는 순수한 문학적 성공보다는 훌륭한 담론, 유용한 담론을 말하길 좋아한다고 말한다. 즉 세레누스는 자연스러운 것, 필수적인 것, 유용한 것,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친구에게 애착을 갖고 있으며, 나머지 것들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서 자유롭다고 해도, 세레누스는 자신의 정신/영혼 속에서 비의지적 운동들을 느낀다. 이 운동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이 기쁨의 감각은 그의 정신/영혼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으며, 언젠가 그가 부추겨지고 끌어당겨지고 뒤흔들리고 요동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징후가 된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는 행위와 의도, 욕망과 욕망의 대립이 아니라 실천과 자유의 활용 간의 대립이다. 


6.

에픽테토스의 텍스트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자기 점검 유형을 볼 수 있다. 에픽테토스의 자기 점검은 우리 표상들에 대한 지속적 시험의 형식을 취한다. 표상에 의해 동요되고 부추겨지고 뒤흔들리며 영향을 받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가 여기서 관건이다. 

에픽테토스는 지속적 감시의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불침번’과 ‘화폐’의 은유를 든다. 불침번은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집이나 마을에 들이지 않는다. 화폐 검사관은 주화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조사하고 무게를 헤아리며 그 소재와 인물 초상을 확인한다. 요컨대 표상에 대한 지속적 감시는 표상이 표상하는 바가 우리에게 속한 것인지, 그것이 표상하는 바에 의지로 접근 가능한지 알기 위한 것이다. 

에픽텍토스는 표상에 대한 불신의 태도를 강화하는 자기 수련법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두 명 중 한 명은 사건과 사실을 언급하고, 다른 한 명은 그 사건과 사실과 품행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우리의 결심을 넘어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인지 가능한 한 빨리 답해야 한다. 둘째, 거리를 산책하면서 뇌리에 떠오르는 것 혹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나에게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 자문한다. 그 대상이 나에게 속하지 않으면 그 표상을 몰아내야 한다.

이러한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적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의 주권 아래 있지 않은 어떤 것을 표현하는 탓에 우리를 위험해 빠트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표상에서 정신을 해방, 정화하는 것이다. 이 정화는 순수와 불순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 지배의 문제다. 


7.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자기 점검에 관한 텍스트를 볼 때, 파레시아의 실천에서 혹은 스승과 제자 간의 게임으로서 파레시아에서 어떤 위치 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스승은 제자가 잘못이나 무지 등을 깨우칠 수 있도록 제자와 더불어 파레시아를 사용했다. 그러나 파레시아는 점차 제자들의 의무가 되어 간다. 제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인식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그 진실을 말해야 하며, 혹은 어떤 타인에게 그 진실을 말해야 한다. 제자의 진실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아니러니한 대화를 통해서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에 관한 진실은 자기 자신과 확립한 사적 관계에서 나타난다.

둘째, 이 관계는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 인식 원리를 바탕으로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맺는 이 관계는 영적 훈련의 형식을 취하는 테크닉들을 포함한다. 

셋째, 이 모든 훈련에서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은밀한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진실과 맺는 관계, 혹은 몇몇 합리적 원리들이다. 세네카의 자기 점검 동기가 다음과 같은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내가 잘 알고 있고 또 내게 친숙한 원리들, 하지만 때로는 충분히 익숙하지 않아서 적용하지 않게 되는 이 원리들을 나는 활용했는가?” 또 에픽테토스의 질문을 떠올려 보라.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내가 채택한 규칙을 따르며 반응할 능력이 내게 있을까?”

이 훈련들에서 ‘자기 자신의 진실’은 ‘자기 자신과 진실이 맺는 관계’와 다름없다. 즉 여기서 진실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진실이 아니다. 한편으로 진실은 이 세계와 인간의 삶, 자유, 필연성, 행복 등에 대한 몇몇 일반적 단어에 기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품행을 위한 규칙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합리적 원리의 총체다.

이 원리들은 ‘자기 해석학’이 아니라 ‘자기 미학’에 속한다. 자기 미학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의 입장을 취하거나 그런 상황에 있어서는 안 되며, 때때로 작업을 멈추어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것을 점검하고, 자신의 기술의 규칙들을 다시 떠올리고, 그 규칙들과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비교하는 기술자, 장인, 예술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


8.

지금까지 세미나를 결산하면 이렇다.

나는 진실의 문제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자 혹은 행위로서 진실 말하기를 다루려 했다. 그리스-로마에서 언표의 참/거짓 식별 기준을 밝히려 한 대신, 진실 말하기를 특수한 활동 또는 역할로 간주했다. 

이 문제틀을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의 역할을 고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각 사회마다 진실을 말하는 자의 역할과 위상(예언자, 신탁, 시인, 전문가, 설교자 등)을 비교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이와 달리 나는 진실을 말하는 행위와 진실을 말하는 자의 역할이 어떻게 문제화됐는지 분석하려 했다. 이로써 그리스 철학은 진실에 대해 다음처럼 문제 제기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진실을 말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진실을 말하는 자로 소개하고 간주될 수 있게 해 주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조건은 무엇일까’, ‘어떤 주제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가’, ‘진실을 말하는 행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 결과나 효과는 무엇인가’ 등등. 그리고 궁극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 행위와 권력 행사 간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진실 말하기를 권력 행사와 일치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이 두 행위는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는가’ 등등.

이 진실에 대한 문제화에서 철학의 두 양상이 볼 수 있다. 첫째 양상은 어떤 언표가 진실인지 아닌지, 어떤 추론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지, 이 진실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둘째 양상은 개인, 공동체, 도시국가, 사회가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를 보유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를 식별할 줄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첫째 양상에서는 ‘진실의 분석학’이라는 서구 철학의 한 전통의 뿌리를, 둘째 양상에서는 서구 철학의 ‘비판적’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바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9.

마지막으로 방법론 문제를 살펴보자. 나는 ‘문제화’라는 단어를 누차 반복해 사용했다. 내가 분석하려 한 것은 사회사에 속하는 인간의 행동도 아니고, 전형적 가치를 갖는 관념도 아니다. 이와 달리 ‘다수의 문제화’를 분석하는 일, 즉 어떻게 그리고 왜 어떤 사태, 행동, 현상, 과정이 하나의 문제가 됐는지를 분석하려 했다. 왜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다른 유사한 형식의 행동은 전혀 주의를 끌지 못했던 반면, 일정한 형식의 행동은 오랫동안 ‘광기’로 분류됐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그 한 예다. 범죄와 비행, 성현상에 대한 문제화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분석을 ‘역사적 관념론’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문제화에 대한 분석은 역사적 관념론이 아니다. 광기, 범죄, 성현상의 ‘문제화’에 대한 내 연구는, 그 현상들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와 정반대로 사회적 일탈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사회적 일탈이 구체적으로 세계에 실존하면서 사회적 조절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했다. 

예컨대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그리고 왜 세계의 상이한 사태들이 정신병으로 특징지어지고 분석됐으며, 또 정신병으로 다루어진 것일까? 여기서 문제화의 요소들은 무엇이고, 이 문제화의 관여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 문제화의 형식, 원리, 규칙은 무엇이고, 이 문제화의 중요성, 영향력, 결과, 효과는 무엇인가? 요컨대 문제화는 실재하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이러한 분석이 역사적 맥락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나는 인체의 병에 대해 18세기 말에 제기된 새로운 문제화는, 일정한 실천의 변화, 질병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반응의 발전, 도시화(구빈원 수용) 등과 같은 절차에 의해 제기된 ‘난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기하려 했다. 문제화는 맥락이나 이 문제화의 맥락을 구성하는 상황의 효과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답변이며, 역사가의 분석 대상이다. 

문제화 내에서 사유는 실재와 독특한 관계를 맺게 된다. 진실과 실재 간의 이러한 독창적이고 특수하며 특이한 관계를 나는 이런 유형의 문제화 내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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