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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클라인-크리스테바 7,8장 발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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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육화된 은유로서의 환상

1. 표상에 선행하는 표상자

p250 : 무의식적(251) 환상으로 체험되지 않는 충동이나 충동적 활동 혹은 반응은 없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백일몽(환상)처럼 꿈은 퇴행적 특성을 갖고 있다. 자극은 퇴행적 경로를 거쳐 간다. 즉 그것은 운동 말단(운동기관)이 아 니라 감각 말단(감각기관)을 향해 움직인다. 우리는 꿈에서 표상이 그것(표상)이 처음 생겨나는 곳인 감각적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퇴행이라고 부른다.심지어 프로이트는 환영과 시각적 기억이 특히 무의식적 사고를 끌어당겨 그것(무의식적 사고)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감각 영역 전체가 꿈에서, 그리고 이를 넘어서 환상에서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p253 : 분석가가 아이의 환상을 명명하는 것은 아이로 하여금 동일성(딕의 놀이행위가 보여주듯이 남근과 기차의 동일성)에 기초한 정신세계로부터 유사성(클라인이 말했듯이 아버지와 남근의 유사성)에 기초한 세계로 이행하도록 촉진한다. 그리하여 아이를 상상계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동시에 딕을 상징계의 영역, 즉 분석가에 의해 발화된 사유의 영역으로 진입하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상상계와 상징계가 어린 환자의 충동적 실재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p256 : 라캉은 심리적 표상을 현상 쪽으로, 즉 에이도스의 가시성 쪽으로 끌고 가는 그리스적 방식을 채택한다. 오늘날 정신분석은 클라인이 밝혀낸, 언어를 넘어서는(태고적 영역), 그리고 관념적 혹은 시각적 표상에 도전하는 태고적 영역의 탐구에 집중한다.

p257 : 환상은 현실에 의존함 없이, 그리고 심지어 현실을 악화시키면서까지 충족을 획득한다. 이러한 만족은 자아의 전능성을 강화하며 자아로 하여금 자신의 파괴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도록 해준다. (259)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환상을 오이디푸스적 내용물(컨테인된 것)덕택에 주체의 자율성이 구성되는 오이디푸스적 내용물(컨테인된 것) 속으로 등록시키며, 환상을 죽음충동의 지배 속으로 등록시키는 것이다.

 

2. 불안과 언어 사이의 "전서사적 봉투

p260 : 전서사적 봉투란 충동의 논리적 고유성들을 띠고 있는, 원칙적으로 정서적인 주체적 현실을 의미한다. 욕망, 목적, 만족, 시간 속에서의 전개, 반복, 기억의 연상, 원시적 이야기와도 같은 극적 긴장 말이다. (261) 전서사적 봉투들은 순수한 경험도 순수한 추상 작용도 아니지만 그것들은 그 둘을 매개하는 유사한 표상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환상은 전서사적 봉투의 유상한 표상, 실재적 시간에서 체험되는 유사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환상은 구순적-항문적-생식기적인 파괴적 충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그러한 충동 속에서 그러한 충동에 의해 활동한다. (261) 클라인은 서사적 사고가 원형적 환상 안에 포함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사고의 전제조건인 원초적 불안을 참조함으로써 입증했다. 그리고 원초적 불안은 대상(어머니 또는 분석가)에 의해 인정되고 재활성화되어야 한다. 전서사적 봉투인 원형적 환상이, 환상이 될 수 있기 전에 타자의 말을 필요로 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분석가의 언어적 해석은 분석가 자신의 말을 통해 전서사적인 것을 엄밀한 의미의 서사화된 환상으로 이끌어 간다. 아이의 출현하고 있는 사고를 이제 제3자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3자적 단계는 상징계라고 불린다.

 

3. 여자는 태고적인 것에 매혹되는가?

p268 : 환상은 충동의 대리자이다. (274) 모성(어머니 됨)은 여성으로 하여금 대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만든다. 실재적 존재인 아이는 거부되는 대상(a-bject)이나 욕망의 대상(남근/팔루스)가 아니라 최초의 타자이다. (275) 이 타자 때문에 여성적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성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타자에, 즉 모성이라는 두려움과 기쁨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다.(승화) 어머니는 자신이 세계에 대리로 보낸 타자, 처음부터 분리되었으며 따라서 정복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타자, 자신의 사랑, 자신의 아이에 대해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연약한 존재임을 발견한다. 이러한 모성적 태도, 어머니의 고통에서 그것이 행하는 문명화 역할을 발견한다. 타자에 대한 이러한 동정으로부터 출발해 충동은 만족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고, 타자 자체를 목표로 삼게 된다. (276) 모성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부성적 기능은 성애적-죽음충동,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타자로 향하도록 만드는 근본적으로 사디즘적인 욕망을 배려로 변형시킨다. 타자로 하여금 평화롭게 살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표를 갖지 않는 배려 말이다.

타자성의 항구적인 참조로서 정신분석은 또한 불안에 찬 에로티시즘을 부드러움(애정)으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이다. 무엇에 관한 애정? 그 타자의 진리를 향하는 애정이다. 나는 타자의 진리 속으로 나 자신을 던지지만, 그것은 타자의 것이므로 나는 그 진리로부터 추방되어 있다. (277) 환자가 재탄생으로서의 심리적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석가가 재탄생해야 한다. 언어를 가로지르는 모성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8. 상징주의의 내재성과 그 단계

1. 등가에서 상징으로: 딕 사례

p282 : 상징주의의 근거에는 동일화(어린아이는 모든 외적 대상에서 자신의 기관들과 그 기관들의 기능을 발견하고자 한다)가 있다. 어니스트 존스는 동일화한 내부와 외부 간의 상호 유사성은 그것들 모두(내부와 외부)가 발생시키는 유사한 쾌락에 근거해 생겨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클라인은 동일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불안이라고 주장했다. (283) 환상들이 언어와 놀이에서 성공적으로 표현된다면 그것들은 외적 세계와 함께, 환상적 현실, 비실재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이것으로부터 출발해 점차적으로 현실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창조할 것이다.

 

p284 : 상징주의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 이미 대등(등치)의 논리를 따르는 충동의 원시적 상징주의는 투사적 동일화 메커니즘의 개념에 의해 확인된다. 둘째, 명명된 환상의 상징주의는 제3(분석가)에 의해 주어진 언어화라는 매개를 통해 불안을 경감시키고, 이와 더불어 아이를 파멸시킬 정도로 강력한 비실재적 현실을 대체하는 현실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구성한다. 이는 우울적 위치과 대등을 진정한 상징으로 전환시키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p290 : (딕의 사례) 명명할 수 없는 실재는 그를 안심시키는 상상적인 것(상징계)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291) 우선 제3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상호 침투적 이자관계의 자리에 낯선 다른 삶 말이다. 이자관계는 너무 폐쇄적이고 공감적이어서 아이는 실망한 혹은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와도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유모도 아버지도 그 다른 어떤 사람도 제3자로서의 말을 발화할 수 없다. (292) 오이디푸스적 불안에 대한 언어적 해명은 심리 장치에 차이를 도입했다. 이러한 일종의 단절은 아이를 어머니에 대한 공포스(293)러운 매혹 속에서 얼어붙게 만드는 상호 침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잉여쾌락으로서의 불안의 언어화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항상 위협받는 엔트로피 상태를 제어해주었다. 해석은 쾌락/불쾌로 이루어진 (초기 동일화),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동일화 때문에 생겨나는 무차별 상태에 빈 곳을 창조했다. 그 결과 아이는 유기체로서의 자아의 붕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분석가의 말은 딕을 삼켜버렸던, 언표 불가능한 환각적 연속성에 종지부를 찍은 운독(끊어읽기)이었던 것이다.

 

p294 : 클라인의 목표는 딕의 부정성을 말을 통해 배가시킴으로써 부각시키고, 이어서 그것(부정성)을 잠잠하게 만들고, 그것이 스스로를 부정해 자기인식이 될 수 있도록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사고의 진정한 발생은 분석을 통해 부정성을 나선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역전시킬 때 가능해진다. 침묵하는 원형적 환상에 내재해 있는 파괴성으로부터 출발해 부정성은 분석가에 의해 말로 표현된 환상의 놀이(이행적 공간)에 도달한다. 환자는 이러한 놀이를 받아들이는데, 이는 억제를 제거함으로서 놀이적, 인지적 창조성으로의 길을 열어준다.

클라인은 딕과 함께 부정성의 작업, 상징화의 작업을 분만했던 것이 아닐까? 즉 클라인은 그 아이를 상징의 단순한 사용자이기보다는 상징의 창조자로 만든 것이 아닐까?

 

2. 클라인의 부정성 이론

p303 : 기억을 사용함으로써 내가 그 대상 그 자체를, 즉 나에 대해 상실한 것으로 의미할 수 있을 때에만 나는 대상의 그러한 상실 때문에 주체로서 정립된다. 존재판단과 속성판단 간의 상호작용은 상상계나 환상과는 구분되는 상징적 사고라는 의미에서 지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사고는 항상 원초적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다. 부정의 부정, 즉 사고가 환각으로부터 구분하는 부정의 부정은 부정의 변증법이라는 자신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

 

p307 : 역전이는 직관과 공감의 동의어이다. 분석가는 환자의 투사적 동일화를 인식하기 전에는 환자의 투사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분석가 자신도 투사를 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분석가가 초자아적 듣기 호은 간단히 말하면 의식적 듣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 유보(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것)를 활성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유명한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저 자비로운 듣기(이것은 물론 거리를 둔 듣기이지만 동시에 동일화와 직관, 공감이 그 속에 존재한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3. 후기 클라인주의자들의 태고적인 것과 원초적인 것

p321 : 위니콧은 분석치료 그 자체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유원칙을 활성화하고자 노력했다. 분석작업은 외부로부터 침입에 대한 방어 역할을 하는 거짓 자기를 없애고 우리의 고유한 내면성을 복원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내적 삶은 항상 우리를 오직 자유롭게 만드는 무한한 과정의 재창조에 있다.

위니콧에서 자유로운 이라는 형용사는 내면화해야 할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재창조해야 할 내적이라는 표현과 동의어이다. 프로이트에게 자유로운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본능적 욕망에 외적 현실이라는 두 개의 폭군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클라인 이후에 그리고 위니콧과 더불어 자유란 외부적인 것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함축하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의(322)표현을 빌리면 탄생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욕망을 죽임으로써 자유를 발견한다. 항상 다시 시작해야 할 심리적 내면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4. 문화적 승화: 예술과 문학

예술작품은 내적 세계의 조화를 재창조하고 외부와의 관계, 특히 타인들과의 관계를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을 제공한다. 유아기 때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던 갈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30) 클라인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정신분석 이론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상적인 것 자체를 부인함 없이 자신을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상상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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