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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그램명 : 전북CBS 라디오 <생방송 사람과 사람> (FM 103.7Mhz)
2. 방송 일시 : 2020년 6월 11일 목요일 오후 5시 28분-54분
3. 진행 : 박민 소장 (MC, 참여미디어연구소)
4. 출연 : 김환희(인간무늬연마소)
지난 월요일이던가요.
그동안 등교를 못했던 초등학교 5, 6학년, 중학교 1학년이 등교를 해서
순차 등교가 마무리됐다고 들었거든요.
아이들 얼굴 다시 보니까 소감이 어떠세요?
역시 학교는 아이들이 있어야 살아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등교개학을 했다지만,
실제 매일 등교하는 건 아니죠?
현재 전북지역은 매일 등교하고 있습니다.
/ 수도권 중심으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어서
우려는 커지는 듯해요?
네. 코로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등교를 강행한 교육부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커지는 상황입니다.
학교 내 2차 감염을 막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치 말아야겠고요.
오늘은 무슨 책 들고 오셨나요?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이라는 책입니다.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
세월호 2주기 즈음해서 출간된 책이던데
선생님도 저자로 참여했더라고요?
네, 저도 공저자로 참여한 책입니다.
/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다룬 책으로 볼 수 있습니까?
사회학에는 의료사회학, 종교사회학, 교육사회학 등 각 세부 영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있으시거든요. 각 계를 대표하는 사회학자분들이 모이셔서 세월호 이후의 한국사회에 대해서 살펴본 책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세월호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세월호와 코로나의 양상이 유사하고, 포스트 세월호로 인해 우리가 코로나에 잘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두 현상은 바디우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사건’입니다. 즉, 세월호 이후에 우리가 그전처럼 살 수 없듯이, 우리가 코로나 이후에 그 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6년이란 시간 차이는 있지만
여러 맥락에서 비교하고 생각해볼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네. 두 사건은 모두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특히 ‘안전’에 대한 이슈를 둘러싼 책임 공방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안전을 국가가 얼마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 및 자율적 선택권은 어느 정도까지 침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들 말이죠. 세월호 사건에서 중요했던 명령어가 “가만히 있으라”입니다. 선장의 그 명령을 믿고, 자율적으로 탈출하는 것을 포기했던 학생들은 모두 세월호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국민이 분노했던 문장이 바로 그 “가만히 있으라”인데, 사실 세월호 이후에 교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된 단어가 “가만히 있으라”입니다. 교사들이 어떤 사고도 일으나지 말아야 한다는, 안전강박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있던 부끄러움은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는 우리가 세계의 모범이고 기준이라는 자신감으로 뒤바뀐 듯합니다.
변화의 핵심 요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지?
첫째, 안전의 중요성에 대한 각성입니다. 세월호 등을 겪고 전국민적 안전강박이 이번 사태에선 좋은 방향으로 작동한 것 같습니다. 전 세월호 이후의 안전강박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만, 예외상태에선 상황이 반전되니 일상적 정치에선 극우적 안보정치일 수 있는 부분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라는 명령, 즉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요청이 이번에는 안전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둘째, 독재와 맞서며, 아래로부터 올라온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북한과의 갈등에서 오는 안보위기, 5.18 민주화 운동,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등 주기적으로 터지는 트라우마적 사건 속에 놓였던 것이 대한민국의 현대사입니다. 이러한 상시적 위기를 겪으며 우리도 모르는새,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나름의 역량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역량은 정부의 역량이라기보다는 국가와 개인 간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어떤 역할을 분담할지에 대한 암묵적 합의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탄핵 사건도 이런 역할 분담을 확실히 하는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안전 문제를 실제적으로 책임지는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코로나가 발생하자, 노인복지시설을 방치한채 도망가버린 유럽의 어떤 직원들과는 다르게 의사, 간호사, 교사, 질본, 소방, 경찰, 보건복지 담당 공무원들이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하고 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사람을 갈아넣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즉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진행된다기보다, 사람을 갈아넣는 임시방편의 방식으로 사태가 통제되거나 수습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에서 원전사고가 났을 때, 엄청난 양의 방사능 유출을 막기위해서, 누군가 직접 뛰어들어가 방사능 물질을 덮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일이기에 누구도 쉽게 나설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일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후쿠시마에서도 목숨걸고 일한 노동자가 50만명인데, 산재 인정은 단13건에 불과했습니다. 노동자를 갈아넣는 국가라는 점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습니다. OECD 가운데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일본의 4배에 달하며 압도적 1위이고, 그에 반비례해 산재 인정율을 굉장히 낮습니다. 매년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사망하는 산재공화국이 대한민국입니다. 지난 22일에도 20대 노동자가 목재파쇄기에 빠져 사망했습니다. 산업보건안전법 위반사범의 재범률은 97%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사용자가 무는 벌금은 고작 400만원 남짓이기 때문입니다.
케이 방역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하게 논의할 지점들은 있는 듯합니다.
마스크 착용 논란, 확진자 동선 공개 등에서 불거졌던
안전할 권리와 개인의 자유 논란. 어떻게 지켜보고 있습니까?
실제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시민들이 마스크 쓰는 것과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거부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자 지나친 통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구식 자유주의의 개념은 국가와 개인을 최대한 떨어뜨리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정부와 규제완화에 대한 외침이, 국가의 통제에 대한 거부감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반면은 한국은 국가와 개인이 멀어지지 않아도, 사회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통제가 반드시 대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괴물같은 국가가 개인을 다른 괴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서 개인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안전 보장 측면에서 오히려 서구권에 비해서 리바이어던의 역할이 잘 작동했습니다. 또한, 국가의 수장을 탄핵했다는 점에서는 국가라는 괴물을 국민이 직접 재재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힘도 보여줬습니다.
집단주의, 감시사회로 흐를 거라는 전망은 섣부른 우려일까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방역지침을 준수했다는 점에서 감시사회로의 경향은 띠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민주주의도 완성은 없다고 봅니다. 운동이 멈추는 순간 모든 체제는 타락해요. 조국사태, 정의연 사태 등 최근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이 기득권화하고 분열되면서, 운동의 동력이 꺼져가고 있는 현상이 우려스럽습니다.
서구식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중국식 집단주의.
이 둘이 맞붙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어디쯤 위치 한다고 보는 거예요?
중국과 미국이 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같은 전체주의 사회의 방역성공 모델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적 성공 사례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사례가 부각되었던 것이고요. 한국은 유교식 집단주의 문화에서 서구식 자유주의로 이행하고 있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식 자유주의가 개인이 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인해, 공동체성이 붕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서구식 자유주의를 롤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한국 사회 앞에 두 가지 과제가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인정입니다. 서구권 국가에서는 개성이 강하다는 말이 칭찬의 의미인 반면에 한국에서는 욕처럼 쓰이는 표현입니다. 남보다 튀지 말아야하죠. ‘눈치’라는 단어 자체가 다른 말로 번역이 불가능한 한국의 고유한 개념입니다. 한국은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굉장히 좁은 사회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주어야 합니다.
둘째는 공동체성의 회복입니다. 가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더 넓은 범위의 연대와 공생의식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로서의 존재와 개인으로서의 존재가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서구사회와 중국이 보여주는 오늘날의 현실은, 이 지점을 찾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에서
이제 포스트 코로나 이후 한국사회를 논하는 시기인데요.
교육계에도 큰 변화가 예상되죠. 어떻게 변해나갈 거라고 전망하세요?
개인과 사회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서로돌봄의 주체로 길러내야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의 핵심 키워드를 꼽으면 ‘돌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공생’으로 바꿔 부르고 싶은데요, 왜냐면 우리는 돌봄을 이야기하면 돌봄서비스, 돌봄 노동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돌봄을 ‘저렴한 노동’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이에 행하던 돌봄을 저렴한 가격으로 노동자에게 하청을 맡기는 것이지요. 갈수록, 돌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돌봄노동에 대해서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돌봄노동자는 일용직이 가장 많은 분야 중 하나입니다. 돌봄노동에 대해서 제대로 된 경제적 댓가를 지불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고의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봄이야말로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교육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학교 선생님이니까 이 부분에 대한 고민도 깊을 듯합니다.
지식 전달자 역할을 그만두고,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만 할 수 있는 감응, 공감, 배려, 이러한 암묵지를 몸과 마음에 익히게 할 수 있는 스승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 때 학교에 대한 돌봄의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교사들은 돌봄보다는, 교육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돌봄이 없다면, 학교의 특별한 존재 이유를 주장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온라인을 통해서 지식적인 학습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온라인 개학을 통해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단순히 교육이 돌봄이 되어야 하고, 교사가 돌봄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사가 학생들을 돌봄의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자기돌봄, 타자돌봄의 전문가로서 삶을 통해서 학생들을 감화시키고, 학생들이 자기돌봄과 타자돌봄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장으로서 학교가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된 자기돌봄과 타자돌봄을 위해서는 지,덕,체,영 등 전인적인 영역에서의 고도화된 탁월성이 요구됩니다. 코로나 이후 교육의 방향은 이곳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타자돌봄은 단순히 다른 타인, 인간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 비인간으로까지 넓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후위기 등 생태적 대위기 속에서 인간중심주의는 반드시 극복해야될 포스트 코로나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돌봄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돌봄받는 대상의 전이를 일으키되, 돌봄받는 대상에 대한 역전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신분석학에 관한 책을 다루는 자리가 있다면 상세하게 더 설명하겠습니다.)
신인류시대를 살아갈 인류를 코로나 사피엔스라고 부른다던데.
여기엔 긍정적 전망과 부정적 전망이 엇갈리는 듯해요.
개인적으로 어느 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지?
개인적으로는 부정적 전망에 가깝습니다만, 이런 경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교육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기존의 발전주의 모델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기성세대는 미래를 향한 관성적 경로를 바꾸지 못합니다. 생태적 전환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주체를 길러내야 합니다. 파멸의 종착역으로 달리는 이 폭주기관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교육과 인문학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오늘의 한 문장
학교를 둘러싼 압도적인 비대칭 구조, 즉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라고 외치게끔 하는 구조가 교육을 불가능케 한다. 교육현장에서 자주 통용되는 말인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전문가주의를 표상하는 이 격언은 '교육은 관계의 질을 넘지 못한다.'라는 말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호소통적인 관계는 전문가로서의 권위나, 수혜적이고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을 통해 가능한 게 아니다. 오히려 수십년차의 경력 임에도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학생을 잘 모른다고 인정하고, 단 한명의 타자로서 동등하게 존중하며, 묘한 떨림이 있는 긴장을 형성한 상황에서 상호적 의사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사는 학생 앞에 설 때마다 소명의식 내지 전문가로서의 자의식 따위를 모두 벗어던지고, 철저히 처음의 아마추어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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