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후기마르크스주의 프레드릭 제임슨 / 서문 및 OT /20.12.04 / 화니짱

후기마르크스주의-프레드릭 제임슨(20.12.04).hwp
0.11MB

<역자 서문>

p24 : 제임슨은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를 세 단계로 나누어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각각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단계,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 단계, 후기자본주의 단계에 대응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문제인 이유는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21) 따라서 제임슨은 이런 은폐를 극복하기 위한 고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는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의 지도만들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주된 과제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해 거덜이 난 역사, 사회, 현실과 같은 총체적 관념과 이의 파악을 위한 수단인 총체성, 해석과 같은 범주를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독서와 해석을 위한 절대적 지평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들어온다. 이 개념은 니체적인 반역사주의와 대립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서 니체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역사주의를 쇠퇴로서의 비관주의라고 거부하고는 역사를 과감히 떨쳐버린 채 현재에 살려 했기 때문이다. (27)

반면에 절대적 역사주의(‘거대담론’)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인류의 단일한 거대한 모험으로서의 과거를 포착할 수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총체성 개념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역사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척도로서 자신의 고유한 구체적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무차별적인 텍스트화의 전략으로부터 역사를 구하면서도 도그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온갖 비난에서 면제 받은 후 모든 방법론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29) 제임슨은 이러한 비도그마적인 열린 마르크스주의의 품안에 형식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와 전혀 양립할 수 없을 듯한 여타의 방법론들을 끌어들여 자리매김해준다.(30) 제임슨은 아도르노에게서 이 시대가 총체적으로 재현된 구도(constellation) 비슷한 것을 언뜻 발견한다.(40)

 

p41 : 아도르노의 내재적 비판’(맑스주의 <- <비판이란 무엇인가> 칸트)은 대상의 내적 논리를 추적하여 그것의 한계와 부정성이 드러나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드는 대상과의 생명을 건 대결과정이라면, / 제임슨의 포용 전략은 왕성한 식욕으로 다양한 이론들을 편력하면서 자신의 들뢰즈(내재성)적인 욕망(노마디즘, 유동성, 기계론)을 살찌우는 방편으로 여겨진다. / 아도르노는 소위 헤겔의 대서사(직선적인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거의 보편화된 본능적 거부감에 동의하면서 자신만의 이견을 제시한다. 아도르느가 마르크스(박사 : 에피쿠로스 - 클리라멘)와 함께 제기하고 싶어하는 질문은 역사를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44) 제임슨은 문명 전반에 대한 아도르노의 아포칼립소적 비타협의 태도/를 이어나가기보다는 그러한 문명비판을 포스트모던한 문화의 해석을 위한 헤게모니 전략으로 활용한다.(43) 헤겔의 이성의 책략개념은 보편자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역사의 완성과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아드로노에게서 보편자는 나쁜 보편자(->파시즘 vs 하이데거)로서, 아도르노 철학은 보편과 특수의 화해를 꾀하기보다는 보편자폭력성을 인식하며 보편과 특수의 불화를 감당하는 불행한 의식이다. (46)

 

<서문 : 시대의 조류 속에서 본 아도르노>

p56 : 후기자본주의는 자연이나 무의식, 혁명이나 심미적인 것, 개인적-집단적 실천 같은 것들을 엿볼 수 있는 바늘구멍마저 없애버렸으며 지금의 이 포스트모던한 풍경 속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자취를 마지막 확인 사살하듯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지난 시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아도르노의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것임이 입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7) 마르크스주의도 하나의 담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철학의 담론이나 여타의 글쓰기 방식과는 다른 특수한 지위를 갖는 담론이다. 또한 (58) 각각의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나 지지 세력의 문화적-민족적 범위를 확정하는 문제에서 상황에 따라 아주 특수하다. 아도르노는 경험주의 실증주의(과학)에 칼끝을 돌려서는 이것을 변증법의 비판 아래 굴복시킨다.(60)

 

p61 : 아도르노의 마르크스주의 정신에서 필자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계급적 판단의 부재라는 문제이다. (62)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도 보편과 특수,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아도르노처럼 치밀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했다. 그가 행한 평생의 작업은 총체성이라는 개념과 맞아떨어진다. (65) 형이상학이나 동일성이라고 불리는 오류, 아도르노의 경우에는 점점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회체계의 효과라면, 하이데거(66)의 경우에는 본래적인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온 결과-비록 하이데거에게도 라틴어나 로마제국의 형태를 띤 권력은 저 진리를 시들게 하고 왜곡하고 억압하는 데 일조하기는 했지만-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무엇인가를 재현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좀 더 심화된 회의이다. 이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결국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로서 이러한 회의주의(시니컬-견유주의->냉소주의) : <자본주의 리얼리즘>, 지금까지 사물들은 실제로 말해지고 재현되어왔다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재현능력, 재현을 가능케 하는 구조나 기만에 찬 연구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인식이다.<팩트체크>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무엇이 포기되고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지, 무엇을 속이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 재현되고 있는지에 대해 냉정한 분석과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p67 : 아드르노의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에서 볼 수 있는 도박적인 유희에 자신의 텍스트가 동화될 위험을 사전에 봉쇄하고 있다. 이 문장에 담긴 뜻은 즉 언어나 형식면에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진리의 이념이 계속 문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68) 후기 마르크스주의라는 제목은 무엇보다 위에서 발전시킨 시사점, 마르크스주의도 여타의 문화현상들처럼 사회경제적 문맥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부각시킬 것이기 때문에 유용할 것이다. 이 책은 아도르노의 마르크스주의나, 지금 우리의 독특한 후기자본주의 또는 3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를 해석할 수 있는 그의 독특한 능력이 갖는 각별한 중요성을 다루고자 한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