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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인무연 맑스세미나/ 후기 자본주의 1부 1,2,3장 발제/ 풍경
제1부 개념의 곤혹스러운 매력
1.동일성과 반(反)동일성
아도르노에 대한 오해 두 가지-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포스트모더니스트.
아도르노(1903년~1966년)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들뢰즈(1925년~1995년)
아도르노는 동일성의 철학자다. 이는 그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이나 『부정변증법』이 동일성의 개념과 함께 시작,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동일성이라는 이 기본벅인 개념적 전제를 통해 접근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전제는 철학이 처한 절대적이며 모순된 상황을 구성할 뿐 아니라 그 책의 개별 장들이 펼치는 지엽적 논쟁도 만들어낸다.
동일성이라는 개념은 일상생활속에서 일어나는 반복 그 자체, 비슷한 것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 그로 인해 우리 마음이 갖게 되는 황량함과 지루함-노이로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이로제에 걸린 자아의 손(새로움이나 예기치 않은 사태가 가져다주는 공포에 질려 마비되어 있기에 자아는 천편일률성을 달고 다녀야 비로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낀다)은 무엇을 만지든 그 손이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만날 수 없다.(73p)
이러한 노이로제 관념에 마주칠 때, 자신의 동일성내부에 갇혀 있는 노이로제에 걸린 자아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대항 이미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차이들이 주는 공포와 기진맥진만을 상상할 수 있는, 들뢰즈가 영원한 변화의 유전(流轉:flux)라 부른 저 거대한 탁류를 상상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던한 사회공간이, 타자나 타자성이 몽땅 성공적으로 추방해버린, 역사상 어떤 관료적 사회보다도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이 사회가 정신분열증적인 차이들이 난무하는 탁류로 그려져야 하는가? 아도르노의 변증법의 개념으로 이 단어를 대체할 때까지 우리는 이 용어를 잠정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자신의 내부에 갇힌 자아와 원초적 흐름에 내맡겨진 자아를 대치해 보는 것은 매일의 일상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다양한 타협 형태들, 즉 ‘심리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타협 형태들은 경험 속에서 극도로 새로운 무엇을 걸러내 버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살아 있는 한 동일한 자아로 남아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려 한다. 이에 따라 자아의 개인의식은 자신이 겪은 모험과 굴절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으로서 동일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개인적 동일성이라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의 자아는 방어 메커니즘일 뿐만 아니라 실천과 생존을 위한 도구이며 무기가 되는 것이다(74p).(----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이곳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우물)----아도르노는 인류학이나 사회심리학의 주체의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한다.
p75 사유가 처한 상황-즉 개념이 사물을 똑같은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다시 개념화하는 정신으로 돌아와 정신에마저 ‘동일함’이라는 인장을 새겨놓을 경우-은 동일성에 의해 배제된 무엇, 즉 ‘비동일적인 것-타자나 새로움’을 파헤치려 들게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개념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실제적인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개념을 통해 새로움이나 타자의 경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개념을 사유‘라 해도 될까?(이러한 아도르노의 입장은 비합리주의자와 같이지만 아도르노는 비합리주의자들의 시도가 개념을 포기한 채 실재와 직접적이고 무개재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경향이라도 낙인찍었다.)
이러한 개념- 동일성이라는 감옥속에 가두어 놓는 경향이 있는 개념-이 차이와 새로움에의 접근을 가능케 하는 열쇠 역할을 할 수 있을까?
p76 사유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성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유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자신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변증법에 대한 정의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런 식으로 정의해보는 것은 해볼 만하다.
『부정변증법』, 144/141/216
Ⅰ. “개념이 어떻게 자신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전통적인 언어미학적 구조-서사시이론은
『계몽의 변증법』「오디세이에 관한 부연설명」에서 “신화의 불변성으로부터 어떻게 서사적 언어나 서사적 서술방식이 나오게 되었는가”
『문학노트』에 실린 에세이 「서사적 순진성」 「병렬적 서술」- 그리고...그리고...로 연결되는 서사시의 부가적 시간에서 나오는 서술방식-에서 아도르노의 텍스트 독해는 ‘그리고’와 같은 연결사들의 평정한 논리보다는 ‘그러나’, ‘그렇지만’, ‘말하자면’과 같은 단어들의 의미가 갖는 서사적 비논리에 주목한다. 연결성을 만들어내면서 그 연결성을 동시에 부정해버리는 이러한 단어들의 비논리적 의미는, 흔히 서사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의 안정적 재생산이나 순환적인 반복성의 내부에 새로움이나 단절을 고의적으로 집어넣는다.
근대 철학의 역사 속에서 동일성이라는 개념은
개인적 의식의 통일성과 논리적 보편성으로서의 사유를 의미한다. 모든 사유대상의 자기동일성이다. 또한 주체와 객체는 아무리 매개되어 있을지라도 결국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80p
->이로써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겪을 수밖에 없는 현격한 의미변화는 분과영역이나 기호들의 인식론적 공간을 지칭하게 된다. 즉 “이성 자체의 개념적 규칙성과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로써 동일성의 심리적 차원으로부토 진정한 논리적 차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 차원에서 처음으로 동일성과 비동일성이라는 아도르노의 중심적인 공간이 나타나며, 이 차원은 바로 ‘개념’이 문제되는 공간이다.81p
=>아도르노 철학의 틀 속에서 ‘개념’은 엄청나게 다양한 실재의 대상들을 동일한 용어나 관념 밑에 포섭하는 강력한 동일성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우위는 전(前)개념사유의 특징을 보편적인 것들로 존재하게 만드는 역사적 순간을 포함하게 된다.
그런데 개념은 사물 또는 자신의 대상과 일치한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는 개념이 사물의 내적 진리를 대변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식론적 환상을 포함한다. (82p)-----우리가 가지는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극단적인 비동일성을 바탕으로 인식론을 전개하는 알튀세르의 “설탕의 개념은 달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키나 실패. 이러한 실패는 단순히 정신이 허약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나 인식론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실패는 개념 자체의 탓이다.
개념의 역동성은 자신이 주체와 객체를 통일시키고 그러한 통일성을 강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인하고 영속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항상 명시적으로 관념철학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개념과 사물의 암묵적인 동일성 속에서 무엇인가를 제1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비밀스런 과업을 수행한다.
그런데 개념과 사물의 동일성을 설정하는 것은 어떤 이론이 의식의 존재구속성을 설교하려 들 때조차,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정당화하게 된다. (『부정변증법』, 50/40/99)
-----물화 84p----개념이 마치 실세계의 사물인 양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초래한다.
이 지점에서 주목을 끄는 용어는 ‘물화reification’라는 단어이다.
동일성의 기능은 지배와 억압의 계기를 통해 특정지워진다.
의심할 여지없이 경험의 질적 다양성을 희생한다는 쓰디쓴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부정변증법』, 18/6/59)
욕망과 억압의 언어가 가느다란 고음으로 새어나오듯, ‘비동일성’의 특징을 통해 동일성의 본질에 접근하는 계기를 맞는다. 이것이 ---아도르노의 “언어의 육체를 죄악시하는”의 언어- “금욕적 자제나 체념 그리고 바로 이러한 체념에 대한 원한감정”-즉 “동일성 밑에 포섭될 수 없는 것-차이, 타율성(hetero-geneity), 타자, 질적인 계기, 극단적 새로운 것, 육체적인 것 등-포스트구조주의와의 친화성으로 오인하는데,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전통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의 용어인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것”(『부정변증법』, 22/11/65)으로 동일화한다.
『자본론』 의 앞부분은 동일성의 비밀에 관한 명상이다.
소비를 통해 경험으로 느끼는 사용가치는 제3의 추상적 용어인 교환가치, 인간의 역사 속에서 동일성이 출현하게 된 본래의 형식으로서, 마르크스가 기술한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궁긍적으로는 돈(화폐)의 형식을 취하는 추상성이다.-즉 동일화하는 개념에 내재된 지배의 의지를 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은 동일성의 모든 표현형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제적 체계(상품생산, 돈, 노동력)를 감추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식의 철학이나 좀 더 적절한 개념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회는 주체보다 선행한다”(『부정변증법』, 132/126/200)-사유는 집합적이며 사회적이다. 이성이나 이성의 범주들은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변할 수 없다.
2. 변증법과 외래적인 것
p92. 이처럼 사유가 ‘스스로에 반대되게 사유(모순)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상상해보려면 아도르노의 두 기본개념-동일성과 총체성-에 대한 천편일률적인(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다시 1장으로)
개념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념을 물화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한 근본 작업은 개념을 총체성이나 체계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다.
의식이 그 속성상 통일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면 이에 반해 분화된 대상세계는 많은 편차와 불협화음을 갖고 있으며 부정적이다. 이러한 사실이 모순이 아니냐고 변증법은 의식에 대해 따지고 든다.(『부정변증법』,17/5~6/59)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충동이란 개념의 음흉한 제국주의적. 관념론적 속성, 즉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자신이 안전하게 지배할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성을 지칭할지도 모른다.
진리의 계기는 총체성 관념의 좀더 순수한 철학적 변형태인 철학적 체계의 관념이나 체계적 사고의 이상(理想)이라는 관념에 눈을 돌릴 때 좀더 가시적이 된다.
아도르노의 가장 강력한 철학적 내지 미학적 간섭행위는 ①우리가 체계 내부에 사로잡혀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②체계의 사슬은 망각이나 억압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성의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는 것이다. 즉 동일성은 출구가 막혀버린 체계와 비슷한 것으로 잊혀지고 억압될수록 좀더 효율적으로 체계의 기능을 수행하는 총체성이다.
p95. 동일성이라는 폐쇄회로를 뚫고 나오기 위해 체계나 총체성을 의식적으로 다시 도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도입이 동일성의 환상이나 신기루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 환상을 일순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며 현대의 삶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사로잡고 있는 거대한 ‘마법의 올가미(주문, spell, Bann)’에 대한 시야를 열어준다.---계몽, 탈신화화, 탈 마법화
체계는 개념의 바깥 면, 우리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바깥 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념에서 어떻게 형식인 체계화를 일구어내는가의 문제-체계의 현존은 그 안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항상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형식 속에서 감지될 수 있다(모습이 드러난다).
즉 우리는 어떤 주어진 개념의 형식이나 내용을 동시적으로 또는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사유의 형식에 주목하는 형태심리학적인 지각작용 속에서 사유의 내용, 즉 사유의 공식적 의미나 지시물을 불신하고는 괄호로 묶어버린다. 내용은 임의의 범례 차원으로 떨어지며 내용 속에 내재되어 있는 ‘확신’은 증발하거나 허구가 된다.
이에 아도르노는 입체적 사유(stereoscopic)을 제안한다.(p96)
동일성의 논의에서 추상화 자체는 또 다른 차원에서 등가성이나 교환의 논리와 하나이다. 교환관계나 추상적 가치형식은 교환체계와 동일한 것이기에 철학적 용어인 체계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내지 사회경제적 용어인 총체성으로 넘어가게 된다. ---관료제 사회라는 용어로 종종사용
아도르노는 “변증법이 펼쳐보이는 보편과 특수의 차이는 다만 보편자에 의해 교시된 것이다.”
(『부정변증법』, 18/6/59)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철학적인 사유나 글쓰기의 순수성, 즉 ‘본래적인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개별적인 개념뿐 아니라 예술작품에도 해당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동일성이라는 막강한 힘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은 채 지배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비순수성—이러한 이중기준은 오히려 동일성 사유의 내부에 머물면서 바깥 면을 가리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아도르노의 ‘이론들’은 그의 글쓰기나 ‘재현’ 방식 속에서 ‘총체성 효과’라고 부를 수 있는 형식의 문제를 살펴보면, 총체성의 효과란 눈앞에 펼쳐지는 이미지와 쇼트shot, 쇼트 위에 있는 총체성으로서의 세계, 쇼트들이 하나하나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동적인 시퀀스(sequence)를 연결하는 한없이 이어진 순환고리라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문장은 부재하는 총체성이 끊이없이 흘러가도록 만드는 크고 작은 차원들로 편집된다.
즉 보편과 특수 사이의 모순 자체가 현대 세계에 대한 아도르노의 진단을 구성, 모순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시대의 징후를 이루는 주제로 전면에 부각될 수는 있다는 --화해는 보편과 특수 사이의 모순 자체를 부각시키는 언어로 부각시켰지만 잘못 짚은 것이다.--해석 방식을 아도르노는 내놓는다. 해석은 이제 텍스트의 안과 밖을 뒤집어 놓는 것, 해석 자체의 징후가 드러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103p)
p105 어쨌든 독자가 평소의 습관에 따라 교과서에 지시된 대로 주(主)와 부(副)의 관계 속에서 판단하려 든다면 아도르노의 문장들은 이러한 질서를 고의적으로 뒤집어 놓아 우리의 지각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영역을 뒤진다. 해석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것이나 텍스트 또는 현상을 향한 체계적 관심이 발견하는 것은, 총체성 자체에 관계하며 이를 변경시키려 드는 것이지 개별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세이 자체가 문화적 현상이나 제2의 자연 또는 제2의 직접성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집요함을 통해 직접성의 환상을 지양하기 위해서이다. 에세이는 근원철학처럼 문화와 문화 밑에 있는 것 사이의 차이에 기만당하지 않는다.....
p106.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아도르노가 걸어간 해석의 길, 즉 바깥의 차원이나 개별적인 경험요소들로 돌아가려는 부재하는 체계를 추구하는 길은 개별과 보편의 위치를 끊임없이 뒤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다.
3. 사회학과 철학적 개념
아도르노에게 객관성의 영역은 자연적이 아닌 사회적인 것의 영역이다.
p108. 새로운 변증법적 객관성에 도달하는 것의 어려움은 객체는 주체를 통해서만 생각될 수 있지만 주체는 객체로부터 떼어내어 생각할 수 있다는 비대칭성에 있다.
현재의 역사단계에서 보통 과도한 주관적 판단이 난무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주체가 만장일치된 견해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주체가 평균가치로서의 객관성에 저항하고, 자신을 해방시킬 때, 객체도 비로소 거짓된 복사판을 되풀이하는 대신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객관성이란 그러한 해방에 달려 있는 것이지, 지칠 줄 모르는 주체의 억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주체로 되는 것을 방해하는, 주체 내부에 객관화되어 있는 힘은 동시에 객관성의 인식을 방해하는 힘이다. 이 객관성이란 바로 예전에 ‘주관적 요소’라 불리던 것이 변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의 주관성이란 객관성만큼이나 매개된 것으로 이러한 매개는 예전의 매개보다 훨씬 더 긴박한 분석을 요한다. 모든 종류의 주체, 심지어는 초월적 주체에게마저 멍에를 씌우는 객관성의 매개 메커니즘은 주관성의 매개 메커니즘 족에서 연장된다. (『부정변증법』 172~173/170~171/250)
p109. 우리가 여기서 윤곽을 잡으려는 문제는-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그런 식으로 감춰진 객관화의 형식들이 주관성의 내부에서 어떻게 생겨나는가의 문제, 즉 동일성은 개념이라는 형식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문제, 또는 추상화하고 보편화하는 사유의 본성을 통한 외적체계의 영구화라는 문제이다.
<아도르노는 철학적 개념도 사회학도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추상적 ‘개념들’을 해석을 위한 궁극적인 틀로 여긴다는 것이다.>
개념은 가장 절박하게 변증법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들로서 사회적인 것이 사회에 대한 사유에 부과하고 있는 궁극적인 족쇄를 폭로하는 것은 형식적인 의사(疑似)보편성이나 ‘과학적인’추상을 파헤칠 때 가능할 것이다.
아도르노의 의도는 사회학적 개념들이란 고도의 지적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을 때조차 자신이 설정한 대상들 자체가 모순에 차 있기 때문에 결함투성이고 부서지기 쉬우며 그 때문에 사회학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 자체 내에 있는 모순들을 어떤 식으로든 사유 속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p113. 주체와 객체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이러한 긴장-‘개인’, ‘자아’-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출현하는 바로 그 역사 속에서 재생산되고 객관화되어 왔으며....
p114. 사회적 현상의 모든 문제는, 사회학과 심리학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활성화하는데, 두 분과학문이 종합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만.....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사이의 균열은 “통일될 수 없다는 데 그 통일성이 있는”사회의 인식론적 모순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심리학이 ‘사회학적’이 되는 것은 심리적 충동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고려할 때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충동들이 표현되고 승인될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 속에서이다.
주체에 대한 비판과 객체에 대한 비판-시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최초의 객관적 추상화는 학문적 반성에서보다는 교환법칙 자체의 보편적 발달 속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추상화로 인해 욕구의 질적 기계들은 무시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이다. 소비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망이 된 인류, 본래는 욕구의 진정한 주체인 인류는 사람들의 순진한 상상 저 너머에서 사회적으로 이미 짜여 있는 것이다. 경제관계에 의해 그렇게 되었기에 경험적으로 느끼기가 더욱더 어려워진다. 시장체계 속에 잠복해 있는 교환가치의 추상성은 사회의 온갖 계층분화 너머에 있으면서 특수에 대한 보편의 지배, 포로가 된 구성원에 대한 사회의 지배를 대변한다.
p119. 추상은 집합적인 것이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객관성은 그 자체 사회의 산물로서 이미 사회를 전제하고 있는 집합적 언어와 개념적 형식들을 통해 주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의 고전적 관념과도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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