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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2. 후기마르크스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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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자유라는 모델

 

183 )자유는 오늘날 구태의연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아도르노는 더 이상 현실성 없이 낡아빠진 것이 철학이나 문화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천착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풀리지 않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의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구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낡았다는 것은 억압의 징표, 후세에 태어난 사람들이 예전의 가능성에 직면하여 느끼는 수치심, 그러한 가능성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을 등한시한 데에 따른 수치심인 것이다.

 

184) 이러한 정황은 칸트에게 적용된다.

 

자유라는 개념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은 이 개념이 모든 개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 개념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개개인이 누구에게도 귀속될 수 없는 질들을 갖게 되는 상황이라는 이념이다. 즉 무언가 불가능한 것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185) 그러므로 자유라는 개념의 시간성은 과거의 역사 속에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날개죽지가 꺾인 약속으로서 과녁 너머로 날아간 화살처럼 보편적이 되었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실수를 범하는 유토피아적 사유로서 미래 속에도 놓여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모델이 제기하는 가장 절박한 형식상의 문제는 이율배반이나 내적 모순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러한 독특한 본질을 시의적절하게 재현하는 문제다.

부정변증법은 이 해묵은 문제를 풀려고하지도, 노력해서 덜 모순된 새로운 자유의 철학을 만들어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187) 두 개의 모순된 이데올로기적 요구에 편안해할 수 있는 칸트의 기발함(?)은 잠시의 휴식처에 지나지 않게 되고, 당시의 경험적 인과학문인 심리학에 의해 주관성의 영역을 식민화하기 시작, 이제는 자유라는 것이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상상마저 의심스럽게 되었을 때, 이러한 자유에 대한 무관심은 주체가 사회에 통합되어가는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나 선택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 부정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자신들에게 제공된 것에 대한 관심은 자유에 대한 관심을 불구로 만들며 그들은 자유를, 마치 그 앞에서는 무방비상태에 처한 것처럼, 두려워한다라고 하며 부자유의 개념범위 속에 어떻게 자유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190) 칸트적 의미에서 자유는 변증법적으로 우연과 동일한 것이다.

 

자신의 변증법적이고 타율적인 자유 관념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우선 칸트의 세번째 이율배반을 풀어야 하는데, 이율배반은 현상적인 자유나 그 반대인 자유 없는 인과성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해결방식(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비판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다.

 

194) 모든 사물들은 수직. 수평으로 다른 모든 사물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물들인다.

계몽이 정치적 무기로 인과성을 이용하는 이론인 마르크스의 상부구조/하부구조 이론은, 생산. 분배. 지배의 메커니즘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들을 포함한 경제적. 사회적 관계들이 풀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뒤엉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 조각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조건에 미치지 못하는 순진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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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역사라는 모델

 

부정변증법의 두 번째 모델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대한 아도르노의 가장 단호한 방어를 발견하게 된다.

 

202p-5) 이장의 목적은 역사 개념과 후기자본주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들 개념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측정되고,

-그때그때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나타나는 패러독스들이 드러나며,

-불가능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이 개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제안이 개진된다.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이러한 방식은 헤겔의 체계적인 입장과 마르크스의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 -----

203-11) 이장의 주장들이 남겨놓은 여운은 역사라는 이름의 보이지도, 있지도 않은, 총체성이 지니는 궁극적 객관성이다. 즉 우리가 이미 약속된 자연사 개념에 이르기 위한 노정을 꾸준히 밟고 있다는 것이다.

203-15) 이장에서는 현대철학이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총체성 개념이나 직선적 역사 개념-문제가 초점을 이루지도 않고, 보편과 특수의 문제에 관여하지도 않으면서, 총체성이나 역사적. 서사적 인과성은 이런 상이한 문제의 토대 위에서 사유되고 새롭게 쓰여 질 것이다.

 

204) 다른 한편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 의해 제기 되는 문제는, 사실 아도르노가 실증주의라 부른 것으로 넓은 문화적. 지적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증주의는 추상적인 것-해석이나 보편적인 이념, 포괄적이고 통시적인 집합적 단위들, 공시적 서사나 계보학-을 낡고 케케묵은 전통적 내지 형이상학적사유의 잔재로 치부하고는 점점 더 엄격하게 제한하거나 체계적으로 추방해버리면서 경험적 사실들이나 세속적 현상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가치나 도덕 같은 것들이 상실, 플라톤적인(심지어 칸트적인) 이념들의 퇴색, 집단적 정체감(민족)의 붕괴, 문화나 풍습에서의 관습적 형식들의 몰락에 대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푸념들과는 철저히 구별된다.

 

205) 그것들은 나쁜또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보편자들이며, ...철학적 사명은 이들 보편자의 임무를 새롭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제는 이들 보편자를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야에서 쫓아버리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폭력과 지배의 표지인 포섭과 포용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보편과 특수의 이상적인 화해를 상상하는 데 적절한 단어가 되지 못한다.

아도르노의 논리전개는 보편과 특수의 긴장은 오히려 첨예화되고, 역사적 모순이나 정신적 고통으로서 내부로 끌어올려지며, 그런 긴장을 억압하는 것은 특수에 대한 보편의 지배인 폭력이라고 낙인찍힌다.

이 역사의 편재성은 나의 의식내용들 속에 파고들며 그것의 사회성은 나의 언어 속에 침투해 있기 때문에 내 말의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탄생은 바로 그러한 총체성의 인정이다. (이 총체성이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궤도 속에 있으며, 이 궤도 위에서 개별적인 주체나 객체는 알지 못하는 목표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의 표현이다.)

 

207) 다른 한편 아도르노는 인간 집단의 통제 불가능한 무능력을 열거한다. 이 모든 것은 갑자기 법률로, 사법제도의 이율배반성으로, 보편자들로 고착되어, 모든 개개인이나 민주적으로 조직된 사회가 지니고 있는 나르시즘에 참을 수 없는 심리적 타격을 입힌다.

 

208) 다음 절은 아도르노 사상의 근본원리, 논리적 카테고리들과 사회/역사 카테고리들의 등가성을 상기시킨다. 그 다음에 필연성의 문제와 연결되는 역사기술의 문제로 돌아간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직선적인 역사에 이견을 제시, 마르크스처럼 역사를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하며, 보편사의 계획에 구조적인 모호성을 집어넣게 된다.

 

210) 역사적 개인의 주관성이라는 문제, 이 주관성은 현대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 의해 왜소해진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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